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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65화 (65/110)

65화<쭈니>

“저희를 구해주신 분이니까요.”

라토가 말하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자 라토는 별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갔다.

같은 얼굴인데도 분위기가 참 달랐다. 그 생각을 하며 자인은 라토가 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토라가 얼굴을 붙잡아 돌렸다.

“어딜 봐?”

훅 가까워진 거리에 순간 놀랐지만 자인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토라를 밀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똑같은 얼굴이잖아요. 어느 쪽을 보든….”

“내 얼굴이라고?”

토라가 말을 채갔다.

“이러나저러나 내 얼굴로 생각하고 보는 거니까. 그렇지?”

자인은 말문이 막혔다. 라토의 얼굴을 쳐다본 건 순전히 그게 토라와 같아서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멈췄던 것이다.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자인은 반사적으로 부정하고 가버렸다. 어쩐지 토라는 쫓아오지 않았다. 자인은 그게 신경 쓰였지만 그냥 걸어갔다.

***

밖으로 나왔는데 토라가 없었다.

“없네?”

담배를 피우러 뒤따라 나온 타오 대위가 말했다.

이미 소문이 다 나서 타오 대위도 토라가 자인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화장실 갔나보네.”

요즘 토라가 기다리는 게 하도 당연한 탓인지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라는 선택지는 아예 머릿속에 없는 모양이었다.

“담배 좀 끊으세요. 뱀파이어들도 안 피우는 담배를 피워서 안 그래도 짧은 수명을 더 깎아 먹을 셈이에요?”

자인은 괜히 말하고 걸어갔다. 그 뒤에서 타오 대위는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왜 시비야?”

자인은 길을 걸어갔다.

토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확실해졌다.

이게 의미도 없는 저항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참 아이러니하다 싶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는데 정작 사랑하게 되자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오히려 그래서 제 맘대로 할 수 없는 건지.

밤거리에 조명 빛이 흩어졌다.

한숨이 나왔다. 이 와중에 토라가 보고 싶었다.

토라가 이 순간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받아주지 않으면 점차 지쳐갈 것이다.

그리고 토라라면 천 리 길이라도 달려올 여자는 차고 넘치니까 개중 괜찮은 여자를 만나면 사랑하게 되겠지.

자인은 멈칫했다.

하지만 만약 괜찮은 여자가 아니라면?

토라는 그래 봬도 순진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가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그를 상처 주지 않을 괜찮은 여자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또 그가 상처 입는다면….

니카에게 입은 상처를 삼백 년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뱀파이어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정말 제 직업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토라.”

자인은 기가 막혀 말했다. 토라는 그녀의 집이 있는 타운 하우스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뭐해요?”

“신경 쓰지 마.”

그러고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자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어쨌든 저녁 늦은 시간에 밖에 돌아다닌다고 깡패들한테 얻어맞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토라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고 있는데 그냥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토라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집에 가요.”

토라는 제 앞에 와 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꼭 버려진 아이 같은 얼굴로.

“생각했어.”

그러면서 갑자기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그네의 줄을 놓고 일어섰다. 당연히 그가 키가 한참 크니까 더 위로, 위로 올라갔다.

“자인에게도 자인의 사정이 있겠지, 내 감정만 강요하지 말자고.”

희한하게, 내려다보는 데서 오는 착시였었는지 버려진 아이 같은 얼굴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었다.

“딱 한 번만, 자인이 정말 나한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러면서 토라는 몸을 기울였다. 자인은 주춤했다. 그녀가 어디서 위압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뭐예요, 왜….”

“그만 인정해. 날 좋아하잖아.”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는 그 자만심은 언제쯤….”

“세상 모든 여자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자인은 날 좋아할걸. 자인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나란 사람을 좋아하는 거니까.”

“착각이 지나치네요. 얼굴을 좋아하는 건데요.”

부정하기 위해서 한 말인데, 토라는 웃었다.

“드디어 인정했네. 나 좋아한다고.”

자인은 당황했지만 무마하기 위해 말했다.

“그러니까 얼굴만….”

“어쨌든.”

그러면서 토라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을 뺄 새도 없이, 그 위에 키스했다. 입술이 와 닿는 감촉에 자인은 충격을 받은 듯이 움직일 수 없었다.

토라는 똑바로 그녀를 보고 속삭였다.

“사랑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신기할 만큼.”

무너진다, 속절없이.

장대비 앞에 흙벽이 녹아 사라지듯. 제 마음속에 벽이 있었는지조차 흐릿해질 만큼.

“내게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한 번만 기회를 줘. 널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인은 한참 말이 없다가 물었다.

“각오한 거죠?”

토라가 뭐라고 하려고 하기 전에 자인이 덧붙였다.

“바람피울 때는 총 맞을 각오.”

“아니, 안 했어.”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자인은 기가 막혔다.

“잘난 척하기는.”

토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인생에서 이만큼 확신이 드는 일은 또 없었거든.”

니카를 그렇게 잃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돼도 그 여자가 라토나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는 자신감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에 집착하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자인을 상대로는 이상할 만큼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인이 그를, 토라 사타디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얼굴 껍질 너머.

지금도, 얼굴을 본다기보다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올곧고 똑바른 시선을 마주하면 그런 걱정 따위는 그대로 녹아버렸다.

***

손을 잡고 그대로 걸어서 집까지 걸어갔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맞잡은 손에서 감정이 오갔다.

집 앞에서 자인은 돌아보고 물었다.

“늦었는데 어떻게 돌아가려고요?”

“두 발이 없어서 못 돌아가겠어?”

“가다가 괜히 불량배들 패지 말고요.”

“걱정 마. 쓸데없이 눈에 띄는 짓은 안 하니까.”

자인은 확연하게 깊어진 눈빛으로 토라를 보았다.

“잘 가요.”

“잘 자.”

토라는 돌아섰다. 여자와 첫 만남에서 자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그래서 자인이….”

토라는 한창 신나서 말하다가 앞을 보고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반응이 뭐 그래?”

맞은편에 앉아있는 도영은 눈가를 한 번 문질렀다.

“토라, 지금은 새벽 6시야.”

세 사람은 부엌의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가말은 도영 옆에서 아예 대놓고 자고 있었다. 토라는 제가 직접 끓여다놓은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섬에서는 6시면 다 일어났을 시간이야. 밤에 잠은 안 자고 딴 짓을 하니까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지금 사랑의 신께서 말씀하시는 거냐?”

도영은 수면 부족 때문에 평소보다 더 시니컬하게 말했다. 다 마신 찻잔을 싱크대에 넣어놓은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진정한 사랑은 몸과는 관계없는 거야.”

그러고는 가버리는 토라를 보며, 도영은 그가 자신의 뒤통수라도 후려치고 간 듯이 중얼거렸다.

“미쳤어, 저거?”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가말도 중얼거렸다.

“그런 거 같아.”

***

토라는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라토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은 채. 그러고는 들어오는 토라를 보고 물었다.

“어디 다녀와?”

“아, 마티네.”

옛날이었다면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상대는 라토였지만 요즘 라토는 유난히 과묵했다. 계속 생각에 잠겨있었다.

라토가 겪은 일도 겪은 일이고, 아무리 제 좋을 대로 사는 토라도 그런 라토에게 여자와 데이트한 이야기를 떠들어댈 정도로 속이 없진 않았다.

그래서 라토가 알아서 그에게 오기 전까지는 내버려두는 중이었다.

토라는 방으로 가려다가 돌아섰다.

“라토. 괜찮아?”

“뭐가?”

라토는 오히려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토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도 속은 거였잖아.”

“얼간이처럼 말이야.”

“라토.”

토라가 부르자 라토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자기혐오에만 빠져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야.”

제 세계가 뚜렷한 라토의 성격상 밀어붙여봐야 나올 게 없다는 건 토라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지. 알지?”

라토는 웃었다.

“물론, 시지.”

***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고?”

커피를 내리던 도영은 지금 자신이 뭘 들었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토라와 자인이 데이트를 시작한 지 2주는 됐는데 말이다. 그것도 현재 둘 다 급한 일이 없는 상태여서 꽤 자주 만나는 것 같았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토라는 목 뒤를 쓰다듬었다.

“긴장돼.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영은 싱크대에 기대서 커피 잔을 들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토라를 알아온 이래,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단 여자에 관한 한 제 말대로 신에 가까운 녀석이었는데.

하지만 지금 토라는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 어떻게 손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 상담하는 10대 같은 얼굴로 말했다.

“게다가 예전에 보여줬던 게 있어서 좀 켕긴다고 해야 하나…. 설마 자인과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코너를 돌았을 때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인생은 항상 흥미로운 거란다, 아들아.”

토라는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타와라고 부를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들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토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행복해. 뭔가 이대로라도 좋다는 느낌이야.”

“사랑이네.”

“그런 거 같아.”

그때 가말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토라 요즘 도영한테만 말해.”

그러면서 정작 그쪽이야말로 토라의 이야기에 별 관심 없는 듯이 도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오늘 클로에 집에 가기로 했어. 괜찮아?”

“다녀와.”

볼일을 보고 나자 가말은 부엌을 나갔다. 토라는 그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요즘 마티 괜찮아?”

“뭐가?”

“그냥 별다른 건 없나 싶어서.”

도영은 가말이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보았다.

“어제만 젤리 세 통을 끝장내긴 했지.”

그러고 도영은 물었다.

“왜? 뭐가 신경 쓰여?”

“아니. 오히려 너무 신경이 안 쓰여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도영의 목에 있는 흉터를 가리켰다.

도영은 싱크대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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