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쭈니>
“토라는 귀여운 여자 친구도 생겼어.”
“서머 중위가 귀엽다고? 그건 동의할 수 없는데.”
도영의 말에 가말은 오히려 동의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인 귀여워서 머리 쓰다듬어줬어. 좋아했어.”
“기가 차서 반응할 타이밍을 놓친 거겠지.”
자인이 기막혀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도 머리를 쓰다듬진 않았을 것 같은데.
도영은 가말을 끌어당겨 안고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웠다.
“자자.”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니 이제 잘 시간이었다.
가말은 품에 안겨 속삭였다.
“잘 자, 도영.”
도영은 대답 대신 어서 자라는 듯 등을 두드렸다. 가말은 눈을 감았다.
***
가말은 침대에 앉아있었다.
달빛 아래 잠들어있는 도영을 물끄러미 보았다. 베개 아래 두 손을 넣고 있는 자세에 따라 근육이 불거졌다.
가말은 문신에 살짝 손을 댔다. 그리고 손끝으로 칼이 베고 지나간 흉터와 그 위를 덮은 문신의 섬세한 문양을 따라 지나갔다.
꼭 문신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걸 새긴 도영의 마음을.
간지러웠는지 도영이 뒤척거리며 돌아누웠다.
“응…. 가말.”
도영은 중얼거리고 다시 잠들었다. 그 평온한 모습을 보며 가말은 속으로 말했다.
‘도영은 살아.’
그리고 생각했다.
‘난 죽어.’
가말은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죽어야 끝나.’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 변할 거라고 믿었다. 세월이 잘못된 걸 바로 잡아주거나, 어떤 방법이든 생길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해왔는지 분명해질 뿐이었다.
토라와 라토는 이제 자신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짝을 찾지 못한 라토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토라가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토라와 라토가 이투하를 만든 이유는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다. 이제 쌍둥이들도 자유로워질 때였다.
가말은 창문을 돌아보았다. 달빛이 아름다웠다. 그게 참 슬펐다.
***
오늘도 데이트를 끝내고 토라는 자인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즐거웠어.”
그리고 볼에 살짝 굿나잇 키스를 했다. 그마저도 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다소 어색한 몸짓이었다.
“잘 자.”
토라가 말하고 돌아서려고 하자 갑자기 자인이 손을 잡았다.
“토라, 차 마시고 가.”
“차?”
뜻밖의 제안에 토라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그래.”
토라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자인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
자인은 거실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실 거 줄까?”
“아무거나 줘.”
그러자 자인은 부엌으로 갔다. 그동안 토라는 왠지 처음 여자 집에 초대받아온 소년처럼 긴장돼서 소파에 어색하게 앉았다.
조금 이따 자인이 돌아와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여기.”
“고마워.”
그리고 자인은 옆에 앉았다. 토라는 속으로 움찔했다.
정적이 감돌았다.
이 분위기는 분명히….
요즘 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숙맥 상태였지만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얼른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자인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나 싶더니, 니트를 벗어 올렸다. 토라는 깜짝 놀랐다.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자인은 생각보다 볼륨이 있었다. 몸은 탄탄해서 복근이 보였고 어디 하나 군살이 없었다.
자인이 소파를 짚으면서 몸을 기울였다. 옷을 벗느라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있었다. 그게 상당히 섹시….
토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춤하면서 물었다.
“왜…?”
“무슨 소리야?”
자인은 오히려 되물었다. 토라는 음료수 잔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차 마시고 가라고….”
“당연히 집에 들어오라고 한 말이지.”
자인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토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러자 자인은 그를 빤히 보면서 물었다.
“이건 무슨 코스프레야?”
“아니야, 그런 거.”
토라는 투덜거렸다. 예전에 한 행동들이 있으니 뭐라고 할 순 없지만 꼭 그런 식으로 봐야 하느냔 말이다.
“아니면 나랑은 그럴 마음이 없는 거야? 미안하네.”
그러고는 자인은 니트를 입고 일어났다. 토라는 바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 게 아니란 거 알잖아.”
“그럼?”
돌아보는 자인의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가웠다. 결국 토라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잘 모르겠어. 어떡해야 할지.”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처음도 아니고….”
“꼭 그런 기분이야. 이상하게 널 상대로는 그래.”
자인은 다시 옆에 앉았다.
“토라, 네 선택을 후회해?”
“뭐? 고작 너랑 자지 않는다는 거 때문에?”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정말로 그랬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의심하다니?
토라는 정색하고 말했다.
“너와 대화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고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해.”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질투심이 많은지 몰랐어. 길가다가 여자들이 널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나.”
“그럼 이마에 문신이라도 할까? 네 거라고.”
“내가 정말 그러라면 어쩌려고?”
사실 자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 뭐. 잘 그리면 힙해 보이고 좋잖아.”
자인은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실소를 지었다.
“미안. 나도 조급했던 거 같아.”
“그럴 필요 없어. 나한텐 너밖에 안 보여. 물론 내가 처음에 좀… 처신을 잘못했지만 방황하는 중이었다고 생각해줘.”
“그냥 방황하는 중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즐기는 거 같던데.”
“어떡하면 잊어줄래?”
“어떤 건 절대 잊히지 않지.”
“내 잘못이지.”
그러면서 토라는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제 머리를 문질렀다. 자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조급해졌던 건 사실이었다. 토라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
꼭 마음이 떠나가는 남자를 몸으로라도 잡아두려는 여자처럼 굴었다. 토라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믿기로 했으면서도.
천천히 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라에게도 이런 관계는 처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토라가 쳐다봐서, 시선이 마주쳤다.
토라의 눈에 결심하는 빛이 어렸다.
“키스… 해도 돼?”
그러고서는 소파를 짚고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자인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첫키스를 하는 10대들처럼 살짝 입술이 맞닿았다.
자인은 생각했다.
혹시 니카 옆에 다른 부족 소녀가 있지 않았을까? 토라를 몰래 좋아하는.
자신은 그 소녀였을 것이다. 그리고 토라가 자신을 봐주길 애타게 바랐을 터였다. 아마, 형제는 한 여자와 결혼해야하는 부족의 전통을 미친 듯이 욕하면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목을 쓰는 느낌이 오싹했다. 조금씩 혀가 본격적으로 뒤얽히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있는 동안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옆에 있는 열기가 인식되어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게, 진짜로 첫 데이트를 나온 10대가 된 기분이었다.
자인은 흘긋 토라를 보았다. 마침 그 순간에 토라도 그녀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이었다. 번개라도 친 것 같았다. 둘은 와락 서로를 안으며 거칠게 키스했다. 정신없이 타액이 오갔다.
천천히?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자인은 일 초도 더 참을 수 없었다.
토라가 끌어당기는 동시에 자인이 스스로 올라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토라는 자인의, 자인은 토라의 티셔츠를 벗겨 올려 소파 뒤로 던졌다.
자인은 토라를 밀어 소파에 눕게 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내가 할게. 넌 가만히 있어.”
“자인….”
거침없이, 우툴두툴한 복부를 타고 내려갔다.
토라는 미간을 찌푸리고 신음을 참았다.
***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소파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꽤 넓은 거실이 사우나가 된 듯이 습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느라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자인은 자신이 깨어있는지 기절해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온몸을 타고 내리는 땀과 욱신거리는 느낌은 분명히 현실인데, 마리화나라도 한 듯이 몽롱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물 좀….”
자인은 토라를 밀어내고 비척대며 일어나 부엌 쪽으로 갔다. 그러다가 앞에 서있는 인기척에 멈칫하고 앞을 보았다.
어느새 거실을 나가는, 문이 없는 아치 아래 토라가 서있었다.
거실에 켜져있는 스탠드 빛을 받은 남체가 땀에 젖어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붉은 눈동자는 불어난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안 돼. 아직.”
토라는 옆벽을 짚었다 떼며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하며 그대로 카펫 위로 무너졌다.
“참았어, 엄청 많이.”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이를 제 굴에 잡아온 야생 동물처럼 토라는 그녀를 붙들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도통 놓아주질 않았다.
“잠깐….”
자인은 저도 모르게 기어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토라가 잡아 끌어내렸다. 자인은 카펫 위로 주르르 끌려 내려갔다.
“잠….”
토라가 등 뒤로 몸을 기울였다.
***
자인은 눈을 떴다.
운동을 오래해서 이제 그녀는 어지간한 근육통은 느낄 수 없게 된 몸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굵직한 갈색 팔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숨을 쉬며 자고 있는 모습이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고 단잠을 자고 있는 동물 같았다.
직업군인의 버릇 때문에 자인은 침대에서 미적거리지 않는 편이었다. 보통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는데, 오늘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살짝 팔을 감싸 안자 토라는 오히려 깼는지 자인을 더 깊이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깼어?”
“배 안 고파?”
“고파.”
그렇게 말은 하면서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인은 자신을 안고 있는 토라의 손등에 불거진 뼈를 따라 그리면서 기다렸다.
토라는 중얼거렸다.
“기분 좋아. 머리도 쓰다듬어줘.”
부들거리는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두피를 살짝 긁으면서 쓰다듬었다. 토라는 정말 곧 그릉거리는 소리라도 낼 것 같았다.
둘은 잠깐 그대로 누워있었다.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토라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침 해줄까?”
“네가?”
“요리 잘 한다고 했잖아.”
토라는 입술에 쪽 뽀뽀하고 일어났다.
“씻고 내려와.”
그러고는 티셔츠만 주워 입고 방을 나섰다.
자인은 침대에 푹 고개를 묻고 누웠다.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
토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마무리했다.
“맛있는 냄새 난다.”
그때 자인이 부엌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접시 내갈까?”
그리고 옆으로 와서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갔다.
집이기 때문인지 자인은 품이 큰 검은 티셔츠에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조금 짧은 반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자인을 본 이래 제일 편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평소에도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집에 있을 때 특유의 부담 없는 느낌이 오히려 섹시했다. 빈틈없는 군인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 자인이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거의 혐오하다시피 해서-물론 제 잘못 때문이었지만- 더 철벽을 치고 거리를 뒀던 걸 생각하면, 지금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토라는 소스가 묻은 제 엄지손가락을 살짝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