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쭈니>
자인은 군인다운 각에 맞춰 그릇을 세팅했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토라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자인은 깜짝 놀랐다.
“못 참겠어.”
그녀를 끌어안은 몸도 뜨거웠고,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뭘….”
토라는 자인의 뒷목에 키스하면서 뜨거운 숨을 끼얹었다.
“토라, 잠깐. 왜 갑자기 이렇게 흥분….”
토라는 그녀의 귀 뒤를 입술로 문지르면서 말했다.
“부대의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하지 마. 레즈비언이 섞여있다면 노릴 수도 있어.”
“누가 날… 앗….”
토라는 귀를 잘근거렸다.
손끝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서 바지춤으로 파고들었다. 자인은 흠칫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상했을지도 몰라.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중위님의 몸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이상한 상상하지 마….”
자인이 바르르 떨며 말했지만 토라는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토라는 자인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입술이 내려가는 대로 티셔츠를 휴지 조각이라도 찢듯이 찢어냈다.
“하지만 자인은 내 거야.”
토라는 분을 토하듯이 말했다.
“나만 만질 수 있어.”
“상상의 인물한테 질투하지… 토라, 자국은 안 돼… 훈련을 해야….”
아무리 토라가 상상의 레즈비언을 만들어내 질투해도 훈련은 해야 했고, 그러면 공용 샤워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토라는 듣지 않았다. 자인의 가슴 밑, 명치, 배에까지 자국을 내며 내려갔다.
어제는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도 버릇처럼 전혀 자국을 남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작정한 것 같았다.
“토라, 이젠 정말 못해….”
허벅지를 들고 근육의 결을 따라 핥으며 자국을 내고, 계속 애무하느라 제 눈만큼이나 붉어진 입으로 속삭였다.
“정말?”
토라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고 물었다.
예전에 토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백 년간 수행을 쌓은 비구니도 앉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오게 할 목소리라고.
“정말 더 할 수 없어?”
이번 건 천 년간 수행하고 내일이면 승천하는 이무기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오게 할 목소리였다.
자인은 토라를 끌어안으며 거칠게 뇌까렸다.
“넌 여자 근처에도 가지 마. 다 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키스했다.
토라의 입매가 웃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
냉장고 문을 열던 라토는 소파에 앉아 전화 통화 중인 토라를 보았다. 두 시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꼭 처음으로 남자 친구가 생긴 10대 소녀 같았다.
“네가 먼저 끊어.”
토라는 말하고 가만히 있다가 웃으며 물었다.
“왜 안 끊어?”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겨우 전화를 끊었다.
라토는 냉장고에서 플로스를 꺼내며 물었다.
“서머 중위가 그렇게 좋아?”
“최고야. 같이 사냥할 수 있을 거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토라는 거의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에 라토는 토라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만약 나도 중위가 좋다고 하면?”
토라는 멈칫했다. 라토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재차 물었다.
“난 너의 시지잖아. 더 이상 나랑 모든 걸 공유하지 않는 거야?”
둘이 쳐다본 채 침묵이 흘렀다.
사실 라토는 형제는 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부족의 전통만 없었더라면 니카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니카에 대한 마음도 확실하지 않았고.
그러니까 토라는 그가 괜히 제 마음을 떠보기 위해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사회주의야.”
토라는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라토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토라는 그 옆으로 지나가면서 희극적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사람은 사실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이거든. 뭔가를 독점하는 걸 좋아하지.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남아있는 나라가 없는 거야.”
“빠져나가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라토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자인은 안 돼.”
토라는 똑똑히 말했다.
“내 거야.”
그러고는 토라는 집을 나섰다.
어쨌든 자인에 관해서는 진심이긴 했지만 그래도 점차 라토가 평소처럼 돌아오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길을 가다가 토라는 자기 집 정원에 서있는 가말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고마워, 마티.”
“응, 나도. 근데 뭐가?”
가말은 버릇처럼 대답하고 되물었다. 토라는 말했다.
“저번에 문 잠가준 거.”
“무슨 문?”
“왜, 자인하고.”
그렇게 말해도 가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토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티가 한 거 아냐?”
“뭘?”
“자인한테 쪽지도 줬잖아.”
가말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거 누가 전해주라고 한 건데.”
“누가?”
“모르는 사람.”
토라는 가말을 보다가 아무래도 가말은 아니었던 거 같아서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다시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집 쪽을 쳐다보았다.
‘혹시….’
설마 싶어 기가 막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라토는 괜찮은 것 같았다. 제 연애 사정에 신경을 쓸 정도면.
***
“심경에 변화는 없습니까?”
의사가 물었다.
“변했다라고 스스로 인지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사무실 책상 건너편에 앉아있는 도영은 의자 팔걸이에 두 팔을 걸치고 가볍게 깍지를 낀 채로 대답했다. 의사는 재차 물었다.
“변화한 자신의 몸이나 식생활에 대한 불안감이나 거부감은요? 모두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계속 루아스 동료들을 봐왔기 때문에 특별히 낯설게 느껴진 부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감염이 성공했을 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은요?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십니까?”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가끔은 제가 스스로 루아스가 된 게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의사는 카르텔을 보고 말했다.
“입으신 부상이 상당히 심각했었군요. 목으로 무언가 다가오는 게 거북스럽거나… 하진 않으신 거 같고.”
의사는 목에 있는 문신을 보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한동안 카르텔을 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다시 임무에 투입되어도 괜찮으실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관찰 기간 동안 임무에 나가는 일이 금지되어있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사실 관찰 기간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그로서는 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의사는 말했다.
“전문의 감정서는 알아서 전송될 겁니다. 가보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때 의사는 생각나 말했다.
“문신 멋있군요.”
“감사합니다.”
도영은 말하고 방을 나섰다.
의사는 서류를 정리한 후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타실 프로젝트 관련자를 마주쳤다. 관련자는 그에게 말했다.
“좀 보시죠.”
어쨌든 기밀에 관한 대화라 둘은 방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관련자는 물었다.
“드페르 소령 면담은 하셨습니까?”
“아침에 끝났습니다. 임무에 투입돼도 괜찮을 거 같더군요.”
의사는 덧붙였다.
“확실히 효율적이긴 하군요, 원래 대원을 루아스로 만든다는 게.”
관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시대마저 다 달라서 천차만별의 개성을 가진 루아스들을 군대라는 한 틀 안에 녹여내는 건 상당히 골치 아픈 작업이죠.”
“그렇죠.”
“하지만 원래 대원이 루아스가 되면 짧은 관찰 기간 후에 바로 임무에 투입할 수 있으니까요.”
“정부로서는 이래저래 가성비가 좋은 일이군요.”
군인 하나를 키우는 그 큰돈을 아낄 수도 있고 말이다.
“이제야 첫 번째 성공 케이스가 나왔지만 미래는 밝아 보입니다.”
***
한 중사는 입을 떡 벌렸다.
“와 씨, 소령님, 어마무시하게 강해 보이네요. 밤에 생각나서 오줌 지리겠어요.”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라지만 목에 기하학적인 문신을 감고 나타난 도영은 그야말로 고대 부족의 전사 같은 느낌이었다. 적 따위는 한입에 씹어 삼킬 것 같은 아우라가 있었다.
하지만 도영은 인간일 때부터 생긴 거에 비해서 겉멋 따위 들지 않아 몸을 치장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처럼 눈에 띄는 곳에 문신을 하고 온 이유를 알만했다. 그래서 한 중사는 물었다.
“가말 씨가 보기 힘들어해서요?”
“아뇨.”
그런데 도영은 대답했다.
“그럼?”
“저한테 집중하지 않고 흉터에 정신이 팔려있는 거 같아서 말이죠.”
“네?”
한 중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리고 무심히 옆을 지나가 사물함을 여는 도영을 돌아보았다. 도영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도영은 옷을 다 갈아입고 전투복의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 사물함의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왜인지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영은 의아해졌다.
“뭡니까?”
“아뇨….”
한 중사는 애매하게 말을 끌었다.
이상하게 도영이 전신을 다 가렸는데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있었다.
안쪽에 기능성 목 폴라 티셔츠를 입어서 문신은 끄트머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눈매라든가, 풍기는 느낌이 변했다.
특히 눈 깊은 곳에 자리한, 정면으로 마주치면 인간으로서는 흠칫 굳을 수밖에 없는 동물적인 느낌이.
“가죠.”
도영은 헬멧을 집어 들었다.
***
도영은 모퉁이 너머로 신중하게 사방을 살폈다. 옆에서 한 중사가 속삭였다.
“역시 경비가 삼엄하군요.”
그때였다. 저편에서 총을 겨눈 적이 나타났다.
그게 이상할 정도로 느린 그림처럼 보였다.
팀원들 쪽을 돌아보자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영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탕, 탕탕!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팀원들이 기함해 외쳤다.
“일곱!”
티링.
튕겨 나온 탄환이 떨어져 굴렀다.
이제 제 몸이 탄환쯤은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상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힘이 전신에 넘실거렸다.
훈련할 때는 전혀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적을 마주하자 혈관의 피가 들끓는 느낌이었다.
도영은 유리가 파손되어 앞이 보이지 않는 헬멧의 아래쪽을 잡아 벗겨 올렸다.
퉁.
헬멧이 바닥에 반동을 일으키며 떨어졌다. 푸른 잿빛 눈이 붉은 윤광을 발하는 것처럼 번쩍거렸다. 낮게 내쉬는 숨이 검게 보일 것만 같았다.
테러리스트는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를 마주친 사람처럼 얼어있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리더 놈이 루아스…!”
테러리스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다. 심상치 않은 퍽 소리가 났다.
“일곱!”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팀원들이 경악해 외쳤다.
와장창.
그 옆으로 테러리스트가 공처럼 날아가 유리를 뚫고 나갔다. 팀원들은 그 모습을 아연하게 보았다.
***
“흥분하셨군요.”
담당관이 말했다.
도영은 팔짱을 끼고 입가를 가리고 서있었다. 작전이고 팀워크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도영은 대체로 그러는 루키들을 혼내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그때 그는 그들을 꽤 융통성 있게 대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사회성 부족해 보이는 담당관보다는.
“워낙 오래 팀 생활을 하셨고 임무 수행 능력도 뛰어난 분이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루아스 적응 프로그램을 이수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도영은 좀 봐달라는 듯이 눈을 굴렸다.
“계급을 들고 흔들 생각은 없지만 제가 소령입니다. 신병들과 같이 프로그램을 이수하라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