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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69화 (69/110)

69화<쭈니>

“워낙 오래 팀 생활을 하셨고 임무 수행 능력도 뛰어난 분이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루아스 적응 프로그램을 이수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도영은 좀 봐달라는 듯이 눈을 굴렸다.

“계급을 들고 흔들 생각은 없지만 제가 소령입니다. 신병들과 같이 프로그램을 이수하라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담당관은 사무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장교 전용 적응 프로그램은 현재 개설 예정이 없습니다. 현직 장교 상태에서 루아스가 된 분이 거의 없어서 말이죠.”

타실 프로젝트가 앞서 성공만 했었어도 현직 상태에서 루아스가 된 군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전용 프로그램이 개설됐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까지 타실이 성공한 경우는 도영밖에 없었다.

도영은 머리가 아파 이마를 한 번 문지른 다음 말을 꺼냈다.

“부탁드리죠. 테라피를 성실하게 들을 테니….”

하지만 침대도 아니고 흔들림이라고는 없는 담당관은 말했다.

“이수 확인증은 꼭 끊어오십시오.”

***

강의실 번호가 적힌 팻말을 본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군인이란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하는 슬픈 종족이었다.

문으로 다가가자 자동문이 열렸다. 그러자 강의실 군데군데 앉아있는, 다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탐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부 루아스여서 다 남자였지만 여자도 한 명 있었다. 그보다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순간 헷갈렸지만 가슴이 있었다.

도영은 비어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참았다.

“어느 쪽이야?”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깍두기 머리를 한, 손을 씻은 건달 같은 남자가 두 칸 너머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름표에 ‘톰슨’이라고 적혀있었다.

강의실 분위기를 생각해서 계급장은 떼고 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도영의 군복에는 계급장이 달려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쪽?”

도영은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톰슨은 한심한 놈을 보는 눈을 하고 손을 꼽았다.

“모병 담당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얼간이, ‘집’에 들어가는 대신 입대하기로 한 전과자, 갈 곳 없어 들어온 길바닥 양아치. 어느 쪽이냐고. 첫 번째에 건다만.”

자고로 신병들이란 셋 중 하나이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입대는 지금 했어도 나이가 좀 있어서 말이야.”

톰슨은 팔짱을 풀고 책상에 턱 한쪽 팔을 걸쳤다.

“그쪽은 피부에 갓 감염된 윤기도 다 가시지 않은 걸 보니 기껏해야 몇 주 전에 루아스가 된 거 같은데? 연장자를 존경하는 태도를 흉내는 내야하지 않을까 싶네.”

루아스로서 나이가 좀 있는데 지금 입대했다면 입대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잡혀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요즘 모병 담당부가 괜히 ‘지옥에서 온 헌터’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군복무를 피해 도망 다니는 루아스들을 하도 잡으러 다녀서.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 하도 당당해서 도영은 코웃음을 치고 무시했다. 톰슨은 발끈했지만 그때 담당관이 들어왔다.

“다 오신 거 같군요.”

시선이 잠깐 도영에게 멈추었다. 담당관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 훈련병이 고개를 기울이고 옆 녀석에게 속삭였다.

“저 자식은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그러자마자 역시 루아스인 담당관이 말했다.

“다 들립니다. 상사에 대한 무례로 벌점 5점입니다.”

훈련병은 혀를 내차고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

톰슨은 계속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도영은 무시로 일관했다. 이런 녀석들은 한 번 상대해주면 더 끝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귀가 막혔어, 신입?”

톰슨은 웃으며 빈정거렸다. 아무래도 오늘 도영을 ‘찍은’ 모양이었다.

보통 군대에서라면 병사와 영관급(소령, 중령, 대령) 장교가 같은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도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고서야 잘 없을 것이다.

하지만 MCTC는 인간과 루아스가 함께 일한다는 특수성이 있는 군대였고, 따라서 이런 기 막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영은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톰슨은 도영의 말투를 오버스럽게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점잖은 말투가 그의 귀에는 같잖지도 않게 들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도영은 팀원들에게도 반말로 윽박을 지르는 편이 아니었다.

역시 무시하는 게 나았다. 도영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기척이 났다.

도영은 뒤로 날아오는 손을 확 잡았다.

“꽤 하는데?”

머리를 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은 톰슨은 기가 차 웃었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감안했겠지?”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주먹을 날렸다. 길바닥에서 힘깨나 썼는지 꽤 날카로운 주먹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역시 도영의 손에 잡혀있었다.

“어쭈? 막았냐?”

여기까지만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도영은 화가 났다.

그는 군인 아버지 아래서 자랐고 본인도 어렸을 때 입대해 거의 평생을 이 바닥에서 살았다.

즉, 이런 녀석들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새삼 화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술집 싸움 한 번 해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영은 순식간에 톰슨의 멱살을 휘어잡아 책상에 내리쳤다.

쾅!

굉음이 울렸다.

도영은 저도 모르게 비틀린 웃음이 올라왔다.

“사내새끼는 관심 없으니까 앵앵거리지 말고 안아줄 남자는 다른 데 가서 찾아.”

톰슨은 그야말로 얼굴이 흉포해졌다.

“이 개새끼가…!”

그러면서 일어나는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도영의 얼굴을 쳤다. 뻑 소리가 났다.

솥뚜껑만 한 주먹 아래 도영의 눈이 번뜩거렸다.

“이게 다야?”

이번에는 도영이 주먹을 휘둘렀다.

뭐가 부러져도 부러진 소리가 나면서 톰슨은 책상에 부딪쳐 무거운 대강의실용 책상이 주르르 밀려날 정도로 뒤로 밀려났다.

“으윽!”

톰슨은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겨우 손을 떼자 코에서 주룩 코피가 흘렀다.

피를 보자 톰슨은 성난 황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여길 두 발로 걸어 나갈 생각은 버려, 이 기생오라비야!”

도영은 고개를 젖혀 주먹을 피했다.

“피해?!”

톰슨은 근접 전투에 자신이 있는지 꽤 능숙한 폼으로 다리를 올려 찼다. 도영은 손으로 무릎을 막았다.

“덤벼!”

다른 루아스들도 그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야말로 개싸움이 시작되었다.

담당자는 기겁해서 재차 외쳤다.

“소령님! 소령…!”

누가 소령이라는 건지 몇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도저히 소령 같아 보이는 사람이 없자 다시 얽혀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난장판이었다.

“그만두십시오!”

도영은 담당관의 군복에 붙은 견장을 보았다.

“대위님. 언제부터 군 생활을 하셨습니까?”

계급보다, 도영이 자신을 보는 서늘한 눈빛에 위압된 담당관은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 그래도 전 이 프로그램의 담당자….”

쾅.

그때 문이 열리면서 고함이 울렸다.

“드페르! 네가 무슨 이병이야!”

***

옆으로 중령이 지나갔다.

“루아스가 되니까 다시 태어난 거 같지? 입대 다시 한 거 같고?”

도영은 등 뒤에 뒷짐을 지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장교로 입대했기 때문에 얼차려를 받은 기억은 정말로 손에 꼽았다.

“파릇파릇한 훈련병들하고 한 공간에 앉아있으니 있지도 않았던 훈련병 시절이 그립던가?”

작전 현장에서 혼자 날뛰고, 그 벌로 이수하게 된 프로그램에서 훈련병들하고 주먹다짐을 한 장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도영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중령은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일어나.”

도영은 한 손을 내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중령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땀도 안 흘리니까 얼차려 주는 재미가 없구먼. 땀으로 푹 젖어서 후들거리며 기어나가는 모습 보는 게 제일 큰 재미인데.”

안 그래도 인간이었다면 제대로 서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뻐근하다는 느낌 정도만 있었다.

중령은 투덜거렸다.

“하여간 이 루아스 놈들은 벌주기도 힘들어서 문제야. 하늘에서 떨어뜨리든가 해야지.”

“그럼 죽습니다.”

중령은 갑자기 차분해져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답지 않게.”

도영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성격이 난폭해진 느낌입니다. 아까도 옛날이었으면 참았겠죠. 하지만 녀석이 시비를 거는 순간 오히려 즐거워지면서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성격이 아무리 온화해도 누구나 마음속에 어느 정도 난폭성은 감추고 있지. 특히 뱀파이어는 사냥을 하고 살아야 했던 종적인 특성이 난폭하니까.”

얼차려를 주긴 했어도 중령은 처음부터 도영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던 투였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지금은 처음이라 제어가 힘든 거지. 뭔가 다른 배출구를 찾아봐. 운동이나….”

중령은 도영은 훑었다. 운동량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일 테니….

“꽃꽂이를 한다거나?”

도영이 기가 막혀 쳐다보았지만 중령은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의외로 그런 게 효과가 있다더군.”

***

“가말, 나 왔어.”

말하면서 백을 문 옆에 내려놓는데 음식 냄새가 났다. 그리고 뛰어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영, 왔어?”

막 나타난 가말은 꽃무늬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고 앞치마를 걸친 모습이 너무 깜찍해서 잠깐 멍해졌다.

도영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요리해?”

“응. 클로에가 알려줬어. 아, 잠시만. 끓어.”

그러고는 가말은 부엌으로 돌아갔다. 도영은 따라갔다. 가말은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사람도 끓일 수 있을 커다란 냄비에 뭘 끓이고 있었다. 도영은 뒤로 다가가 물었다.

“뭔데?”

“스튜. 제대로 한 건진 몰라.”

제대로 하긴 했는데, 단지 허기에 시달리는 중공군 한 부대도 먹일 수 있을 것 같은 양이라는 게 문제였다. 루아스여서 그런지 일 인분 산정 방식이 영 제 기준이었다.

도영은 문득 시선이 닿아 가말을 보았다. 머리를 한 갈래로 올려 묶고 있어서 목덜미에 검은 머리카락 몇 갈래가 흩어져있었다.

점이나 얼룩 하나 없어서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깨끗했다. 그가 뱀파이어라면, 아니 뱀파이어가 맞긴 하지만, 정말 물어볼 만한 목덜미였다.

부엌 테이블에는 신문지가 깔려있고 여러 종류의 꽃들이 널려있었다. 도영이 그쪽을 보는 걸 알았는지 가말이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모임에서 했어.”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도영도 해볼래?”

“나?”

가말은 도영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얼결에 테이블에 앉자 가말은 꽃을 몇 송이 집어 건네주었다.

“자. 도영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그러고는 자기도 만들던 걸 계속 만들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하고 꽃꽂이를 하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서 일찍 시집 간 어린 새댁 같았다.

부엌에는 음식이 끓고 햇빛이 테이블을 비추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꽃꽂이를 해보라더니….

도영은 중얼거렸다.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네.”

그러면서 꽃을 기울여 냄새를 맡았다.

꽃 냄새.

암컷의 냄새.

도영은 눈을 들었다. 꽃향기 사이로 묘한 냄새가 났다. 그를 보고 있었던 가말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가말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고 일어났다.

“다 됐나봐.”

그러고는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서 냄비를 확인했다. 도영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가말 옆으로 다가가 싱크대에 손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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