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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73화 (73/110)

73화<쭈니>

가말이 도영의 양손을 펼쳐 잡았다. 붕대로 싸인 손을 보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도영이 다쳤어. 가슴이 아파.”

가말이 옷을 대충 주워 입은 상태여서 가슴골이 들여다보였다.

도영은 배 아래쪽에 열기가 모였다. ‘이런 사내놈’ 하고 돌을 던진다고 해도 솔직히 아까 드레스 입은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안고 싶었다. 아니, 365일 가말을 안고 싶었다.

도영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그럼 안 아프게 해줘.”

가말은 간절한 눈으로 도영을 보았다.

“어떻게?”

“알잖아.”

도영은 빙긋이 웃었다.

“제대로 하는 거.”

그런데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가말이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는 건 처음이라 도영은 의외로웠다. 그런데 가말이 바로 덧붙였다.

“도영 손 다쳤어. 쓰면 안 돼.”

“그럼 네가 하면 되잖아.”

“내가?”

“응. 네가.”

가말은 주저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진 모양이었다.

“근데 다친 건 손이잖아. 그게 손이 아프지 않게 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꽤 논리적이 됐다 싶었지만, 아직 그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가 만져주면 난 행복하니까. 아픈 건 다 잊을 수 있어.”

사실 마취제를 맞아서 그리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도영은 이 좋은 기회를 써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말은 그 말에 납득한 얼굴이 되었다. 좀 미안하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가말은 천천히 몸을 숙여서 아래로 내려갔다.

도영은 살짝 입술을 핥았다.

“통나무집에 있으니까 꼭 섬에 있는 것 같네.”

그때라면 이렇게 가말과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 먼 길을 왔다 싶어서 감개무량할 정도였다.

***

도영은 사람들 가운데 서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축제 같았다. 남자들이 춤을 추고, 여자들이 박수를 쳤다. 주변에 도영에겐 들리지 않는 음악이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한 여자가 도영을 돌아보았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푸른빛이 돌 정도로 짙은 검은 머리에 웃음을 머금은 검은 눈. 나이는 사십 대쯤, 차고 있는 액세서리가 화려해서 꽤 높은 신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웃고 있는 여자가 입은 흰 옷자락이 느리게 흩날렸다.

여자는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선뜻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자 옆에 있는 남자가 돌아본 순간 도영은 깨달았다.

두 사람은 가말의 부모님이었다. 본 적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남자답고 다부진 인상을 지닌 미남이었다.

가말의 부모님이 웃으며 도영을 사람들 사이로 잡아끌었다. 도영은 얼결에 끌려갔다. 사람들이 도영을 에워싸고 춤추었다. 북소리가 울리고 하늘 높이 솟은 깃발이 흔들렸다.

갑자기 도영은 눈을 떴다. 익숙한 물건들이 보이고, 달빛 아래 가말은 옆에 잠들어있었다.

“가말.”

“응…?”

가말은 잠결에 대답했다. 도영은 아직까지도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네 고향을 본 거 같아.”

“고향을…?”

가말은 잠에 취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웅얼거렸다.

“마티와 타와는 잘 있어?”

“잘 계셔. 마티와 타와가 널 잘 부탁한다고 했어.”

그제야 가말은 눈을 떴다. 그리고 잠기운이 가득한 몽롱한 눈으로 웃었다.

“마티와 타와에게 말해주고 싶어. 가말은 행복해요.”

그러고는 다시 가말은 눈을 감았다. 잠결에 한 말이었는지 금세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영은 가말의 볼을 쓰다듬었다.

꿈을 꿨는지, 아니면 정말 초현실적인 경험 같은 걸 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꿈이라기엔 생생하고, 실제로 그곳에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냄새까지도 묘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꼭 평생 만날 일 없는 장인, 장모에게 허락을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들의 딸을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가말은 완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대공 녀석이 있는 한.

도영은 자기 형제가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의 기폭제를 들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를 죽일 테니까.

그러므로 남의 형제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특히 그게 가말을 불행하게 만드는 형제라면.

도영은 가말을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어떤 폭풍이 닥쳐올지라도 지금은 달빛 아래 사방이 평온했다.

그때 가말이 조용히 눈을 떴다. 밤의 정적이 내려앉은 방을 한동안 응시했다.

손은 제 배 위에 가만히 얹어져있었다.

***

“대공을 끝내야겠습니다.”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스크린 너머 MCTC 마크 앞에 앉아있는 대장들은 심사숙고하는 얼굴이었다. 그 가운데 있는 총장이 깎지를 쥐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사살 작전을 허가합니다.]

렉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주장하고 반려되고 또 반복됐던 일이 드디어 승인되었지만 기뻐하기보다 더 신중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코드네임 ‘대공(ANTIAIRCRAFT)’에 대한 사살 작전, 작전명 ‘폭풍의 언덕’, UTC(협정 세계시) 9월 9일 13시 21분 32초부로 발동되었습니다.”

***

소식을 들은 대원들은 아무도 함부로 반응하지 않았지만, 흥분이 일렁이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조용한 얼굴로 뿜어내는 기운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팔짱을 끼고 있는 도영 옆에서 한 중사가 말했다.

“신혼여행도 못 가고 바로 작전에 투입되는 꼴이군요.”

신혼여행은 고사하고 당장 시작될 모의훈련을 생각하면 매일 밤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그때 렉스가 와서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아일이라도 빌려줄 테니 한 한 달간 푹 쉬다가 오십시오.”

아일은 이바노프 클랜이 소유하고 있는 섬이었다. 한때는 이바노프 클랜이 모두 모여 살았던 곳으로 꽤 번성했지만 지금은 무인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둘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섬은 지긋지긋하거든요.”

***

활주로에 서있는 렉스의 머리카락이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날은 맑고 공기는 서늘했다.

뒤에서 가말이 다가왔다.

가말은 프릴이 달린 쉬폰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런저런 옷을 사줬지만 입기가 편하다는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그녀는 거의 원피스만 입었다. 그런데 그게 청초한 본인 분위기와 워낙 잘 어울려서 가말 특유의 스타일처럼 보였다.

가말은 옆에 와 물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어?”

“드페르 소령이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가말은 렉스를 빤히 보았다.

“난 강해.”

렉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소령이 그걸 몰라서 허락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럼?”

“당신을 보호해주고 싶으니까요.”

“나도 도영을 보호하고 싶어.”

“그렇다면 더 소령을 혼자 보내주세요. 당신이 현장에 있다면 소령은 당신이 신경 쓰여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가말은 전투기가 출항 준비 중인 활주로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내려 전투기 표면이 광을 발했다.

“가끔 꿈을 꿔.”

가말은 중얼거렸다.

“섬에 도영이 오지 않은 꿈. 난 영원히 그 섬에서 혼자 사는 거야. 지금도, 나중에도.”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운 꿈이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전투복을 입은 도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느릿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뱀파이어가 된 후로 도영의 눈동자는 더 진해진 느낌이었다.

도영은 말했다.

“다녀올게.”

가말은 도영을 올려다보았다.

“약속, 잊지 마.”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의미했다.

도영은 대답하는 대신 가말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지그시 키스했다. 그리고 말했다.

「약속해.」

고대 사타디어로.

가말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도영이 고대 사타디어로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토라나 라토가 알려주었을 것이다.

도영은 가말의 얼굴을 감싸고 속삭였다.

“사랑해.”

도영이 돌아서서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하자 팀원들이 뒤를 따랐다.

가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아랫배를 짚었다.

감금되어있는 다나에에게 황금의 비로 화한 제우스가 찾아와 영웅 페르세우스를 잉태시켰듯이, 섬에 갇혀있는 그녀에게 빛나는 남신이 와서 빛을 잉태시켰다.

그녀는 빛을 낳을 것이다.

***

방 앞에서 군인은 말했다.

“쉬세요.”

가말을 데려다준 군인은 덧붙였다.

“소식은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창가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방은 조용했고 전자시계는 옛날처럼 초침이 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어느 순간 시간이 바뀔 뿐이었다.

지잉.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가말은 멈칫하고 돌아보았다. 문가에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을 한 토라가 서있었다.

“확인했어. 아무도 없어.”

가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토라를 지나 복도로 나갔다.

둘이 함께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얼굴이 낯익은 군인 하나가 알은체했다.

“토라 씨.”

토라는 웃으며 말했다.

“마티가 바람을 좀 쐬고 싶다고 해서.”

군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다녀오세요.”

토라와 가말은 군인을 스쳐지나갔다.

큰 작전을 앞두고 모두 그쪽에 신경이 쏠려있어서 복도에는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 한 남자가 옆에 와 섰다. 짙은 얼굴에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 한눈에도 이투하였다.

이어서 이투하 둘이 더 나타나 뒤따르기 시작했고, 하나둘 더 붙기 시작해 마침내 열 명 정도 되는 이투하들이 날개처럼 뒤를 따랐다.

그사이에 라토가 있었다. 평소와 같은 차림을 한 토라와 달리 라토는 티셔츠, 가죽 재킷에 바지까지 전부 검게 무장하고 있었다.

이투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투복을 입은 정도는 아니지만 모두 심상치 않은 의도를 풍기는 차림이었다.

토라는 제 쌍둥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내가 할 말이야. 덜렁대다가 잡히지 말고.”

“이번에 구해준 건 나였던 거 잊었어?”

토라는 기가 차다는 투로 말했다.

“정확하게 날 구해준 건 MCTC의 팀이었지.”

라토가 지지 않고 말하자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인정할 줄 모르는 놈은….”

“라토, 토라.”

가말이 단호한 투로 불렀다. 그러자 쌍둥이는 바로 농담하는 걸 그만두었다.

“간다.”

토라는 모퉁이 너머로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모퉁이를 돌아 어둠에 녹아들 듯이 사라졌다. 그 뒤를 이투하 몇이 따랐다.

나머지 이투하들은 라토를 보았다.

“대장님.”

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도 가자.”

라토는 말하고 가말을 돌아보았다.

“마티.”

“준비됐어.”

그리고 그들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따라가면서, 가말은 뒤를 돌아보았다.

***

그 모습이 화면에 박제된 듯이 멈춰있었다. 렉스를 포함해 모두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대위가 말했다.

“기지를 나설 때까지 아무도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합니다.”

중령이 화면 속에 있는 가말을 가리켰다.

“저건 강요에 의해 같이 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라토 씨를 이끄는 모습이죠.”

이 와중에도 렉스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이상해 중령이 돌아보았다.

“소장님?”

“애초에 모두 계획된 거였다면요?”

그때 렉스가 갑자기 말했다.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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