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74화 (74/110)

74화<쭈니>

“애초에 모두 계획된 거였다면요?”

렉스는 갑자기 말했다.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네?”

“가말은 계속 섬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걸 증언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중령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화면을 보았다가 다시 렉스를 보았다.

“부족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모두 인간입니다. ‘오랫동안 섬을 지켜온 존재가 있었다.’는 전승만 들어왔을 뿐이죠. 설사 가말이 계속 그 섬에서 살았다고 해도 바깥과 접촉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가말이 이반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렉스도 단 한 번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둘이 만난 것도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사이에 사람이나 상황, 혹은 사정이 변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렉스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드페르 소령을 붙잡았을 때 레기온은 ‘대표’가 직접 본다는 이유로 소령을 이송시켰습니다. 굳이 바다를 건너서요. 그런데 아무리 소령이 유능한 대원이라고는 해도 어이없이 놓쳤죠. 인간을. 그것도 상공에서.”

“그건 적기가 나타나서….”

“그 적기에 대한 정체는 아직도 찾지 못했죠. 사실 어떤 나라의 소속이었다면 저희 측에서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데도 굳이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렉스는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습니까? 녀석들은 일부러 드페르 소령을 사타디 섬 근처에 떨어뜨린 거라고.”

그렇다면 그때 홀연히 나타나 레기온의 비행기를 공격하고 사라진 적기는 인간을 놓쳤다는 신빙성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투입시켰다고 볼 수 있었다.

중령이 겨우 말문을 뗐다.

“하지만 왜 굳이 드페르 소령을….”

하지만 말하다가 말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타실 프로젝트.

렉스의 눈에 심각한 빛이 스몄다.

“ISLE에 침투해서 케리어(보균) 기술에 대해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죠. 반면 타실 군인들은 걸어 다니는, 말 그대로 신기술의 케리어들입니다.”

렉스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말처럼 엄청난 검술을 가진 뱀파이어가 기지 내에서 허무하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고작 인간 학자한테요.”

모두 미처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점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 것 같았다.

“납치된 가말을 구하려다가 드페르 소령은 죽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소령이 죽는다는 건 보균된 바이러스가 활성화된다는 말이죠. 케리어 기술이 유효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도영은 성공적으로 루아스가 되었고, 케리어 기술은 새 가능성을 열었다.

“이 모든 게 다 지나치게 잘 짜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렉스는 진짜 질문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처음부터 소령을 이용했다는 말씀입니까?”

“타실 군인이라면 아무나 상관없었겠지만… 이왕이면 가임 혈통이 확실한 이바노프가 좋았겠죠. 일이 잘 풀리면 루아스 배아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타실 프로젝트에서 이바노프의 피를 기증받은 건 도영이 유일했다.

그만큼 도영의 위치가 독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피가 어떻게 발현될지 실험하기 위해 모든 군인이 각자 다른 혈통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렉스는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모습 그대로 멈춰있는 가말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가말은 레기온의 정보원인 겁니다.”

붉은 눈이 우울한 빛을 뗬다.

“소령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번 작전도 함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

도영은 장갑 손목의 벨트를 당겨 제대로 고정했다. 그리고 창밖을 보자 하강 포인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체가 기류에 몇 번 덜컹거렸다.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 작전은 아주 중요했다. 정부에게나,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팀원들에게나, 도영 개인에게나.

정부로서는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테러리스트를 마침내 제거할 기회였고, 팀원들에게는 이런 중요한 작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도영에게는 삼천 년간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 중사마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만큼만 합시다.”

도영은 말했다. 팀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하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종사가 언뜻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복행(착륙하려고 내려오던 비행기가 착륙을 중지하고 다시 날아오름)1)한다. 복행한다.”

모두 의아하게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조종사가 대답했다.

“작전이 취소되었습니다. 귀환 명령입니다.”

“그게 무슨….”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인 이상 대원들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통 조종사들은 계급이 더 높았기 때문에 토를 달 수도 없었다.

기지로 귀환한 비행기가 착륙했다.

쿵. 끼이이.

램프도어가 열리고 도영이 가장 먼저 램프도어를 타고 내려갔다.

“왜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소장이 손수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부대쯤 되는 헌병들과 같이.

대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도영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헌병들이 먼저 움직여 도영을 에워쌌다. 도영은 눈가가 움찔했지만 섣불리 움직이진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프로세스일 뿐이니까. 혐의가 입증되지 않으면 바로 풀어줄 겁니다.”

렉스는 평소처럼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특별한 친밀감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의 같은 감정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이었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혐의라뇨?”

“정보 유출에 관한 혐의입니다.”

정보 유출?

여전히 도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이해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 말 때문인지 렉스는 정말 직접적으로 말했다.

“드페르 소령의 연인인 루아스 가말은 SN의 정보원으로 밝혀졌습니다. 본의든 타의든 소령으로부터 유출된 정보가 있는지 조사할 겁니다.”

도영은 실소를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가말은 어디 있습니까?”

렉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건 이 기지 어디서도 가말을 찾을 수 없을 거란 대변이었다.

도영은 손을 저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겁니다. 잠깐 어딜 간 거겠죠. 아니면 저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렉스는 그 말을 잘랐다.

“처음부터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소령의 본능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감정이 덮어버린 의심이 정말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소장님, 송구합니다만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지 본인도 알고 계시죠?”

“가말이 임신했습니다.”

렉스는 바로 말했다.

“……?”

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렉스가 진지함이 도를 넘은 얼굴로 뭐라고 말을 있긴 하지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영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렉스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 그는 계속 말했다.

“임신을 하자마자 달아난 건 한 가지로밖에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이바노프의 유전 정보를 가지고 달아난 겁니다.”

여전히 무심한 붉은 눈이 도영을 똑바로 보았다.

“가말은 일부러 당신을 노린 겁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올라온 장교이자, 이바노프의 피를 기증받은 타실 군인을.

쾅!

도영이 집어던진 헬멧이 파편을 터뜨리며 튀어 올랐다.

도영은 턱에 근육이 꿈틀거리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가말을 데려오겠습니다. 그 입으로 직접 듣겠습니다.”

렉스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사단장의 권한으로 3팀을 작전에서 제외하겠습니다. 작전에는 다른 팀이 들어갑니다.”

“무슨 개…!”

반사적으로 도영은 사납게 소리치다가 이를 꽉 다물었다. 렉스는 그 타이밍을 기다린 듯이 말했다.

“이렇게 감정이 격해져있는 대원을 작전에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

도영은 렉스를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공기가 감돌았다. 지켜보는 이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여기서 소장을 공격하면 일개 소령은 운이 좋아봐야 직위해제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도 끼어들 수 없었다.

불타오르는 눈으로 렉스를 응시하던 도영은 그냥 돌아섰다.

***

아무 마크가 그려지지 않은 군용 헬기가 내려섰다. 헬기가 일으킨 바람이 기다리고 있는 가말과 라토, 그들을 위시한 모두의 머리카락과 옷깃을 흩날렸다.

문이 열리고, 무장한 남자들이 소총을 들고 내려섰다. 그 사이로 정장을 입은 폴프가 내렸다.

폴프는 바람에 흩날리는 정장 상의를 잡아 단추를 채우며 다가왔다. 그리고 라토를 포함한 이투하들이 위시하고 있는 가말에게 다가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가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폴프는 헬기 쪽으로 손짓했다.

“가시죠.”

가말은 별말 없이 헬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헬기에 오르려고 하자 폴프가 손을 내밀었다.

“홑몸도 아니신데.”

“치워.”

뒤에서 라토가 그 손을 밀어냈다. 폴프가 그를 보자 가말이 차갑게 말했다.

“추격대가 오고 있을 수도 있어.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어?”

문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문장으로.

폴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오르시죠.”

가말은 라토의 에스코트를 받아 헬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은 폴프는 라토를 보고 깨닫고 물었다.

“참, 다른 한 분은…?”

“신경 쓰지 마. 자기 할 일을 하러 갔으니까.”

다른 곳에 잠복시켰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이쪽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의미였다. 현명하게도.

헬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사방으로 아직도 중세 시대인 것 같은 녹음이 펼쳐져있었다.

그곳을 내려다보는 높은 지대에 잘 관리된 중세 성이 서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소규모 성이었지만 부드러운 연두색 융단 같은 논이 깔려있는 유럽 시골의 전경 속에 홀로 조용히 서있는 모습이 옛 왕족들의 별장인 듯했다. 입구에서 돌길이 이어졌고 바닥에 박힌 은은한 조명들이 빛났다.

넓게 펼쳐진 성 뒤뜰 한편에 쿠니스는 초조하게 서있었다.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보이는 모습이 그답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하늘에서 헬기가 빛을 내며 다가왔다. 쿠니스는 다급하게 그것을 돌아보았다.

헬기는 헬기장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프로펠러가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폴프가 먼저 내리고, 라토가 내렸다. 그리고 라토가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나와 그가 뻗은 손을 잡았다.

이어서 바람 속에 가말이 내려섰다. 쿠니스는 폭발할 것 같은 환희를 억누르고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

“가말, 잘 왔어.”

가말은 쿠니스를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 늘 꿈속에서 봐왔던 입술로 조용히 말했다.

“쿠니스.”

쿠니스는 온갖 감정이 솟구치는 얼굴이었다.

폴프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쿠니스는 가말을 보았다. 그가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먼저 남의 의사를 묻듯이 쳐다보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가말은 쿠니스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라토는 쿠니스를 무표정하게 한 번 보고 무심히 시선을 거두며 가말을 따랐다. 그 뒤를 이투하들이 바로 따랐다. 누구도 끼어들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이.

그제야 쿠니스도 안으로 들어갔다.

가말은 사방을 쭉 둘러보았다.

성 내부는 외관에 비해 현대식이었다.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을 써서 르네상스적인 느낌은 냈지만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났다.

그때 폴프가 와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게 일을 수행해주셨습니다.”

가말은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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