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쭈니>
폴프가 와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게 일을 수행해주셨습니다.”
가말은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이 일은 모두 도영이 섬에 오기 전에 시작되었다.
도영이 섬으로 오기 직전, 그들이 그녀에게 왔다. 바로 로열 스타가.
***
“붙잡아!”
숲이 소란스러웠다.
“상처를 입히지 마!”
한 용병이 소리쳤다.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퍽 소리가 나면서 막 그렇게 말하던 대원이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그를 타격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폴프는 경호 인력 사이에서 태연자약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방에서 수풀이 바스락거렸다.
한동안 상황을 관망하던 폴프가 갑자기 뭔가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뭔지 아시겠죠?”
시력이 좋아서 한 번에 그 물건을 본 가말은 수풀 속에서 움찔했다.
폴프가 들어 올린 건 라토의 목걸이였다. 칼로 자른 듯이 단면이 날카로운.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폴프는 병력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단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동안 침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바스락.
그런데 수풀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가말이 나타났다.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한 듯 기척만 날 뿐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가말은 폴프를 노려보며 물었다. 폴프는 담배를 던져 발로 껐다.
“이투하의 대장님을 붙잡느라 고생깨나 했죠. 저희 대원만 해도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맹수가 따로 없더군요.”
가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토라는 실종된 라토의 소식을 찾아 섬을 나간 상태였다. 어쩌면 이들이 토라가 섬을 비우는 타이밍을 기다린 게 아닌가 싶었다.
“가말, 룩카의 딸.”
폴프는 리듬을 넣어 읊조렸다.
“쿠니스 씨의 쌍둥이죠?”
가말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쿠니스가 보낸 녀석들이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저희는 쿠니스 씨의 사업 파트너….”
폴프는 빙긋이 웃고 덧붙였다.
“같은 겁니다.”
그렇다면 어쨌든 쿠니스와 연관이 있다는 의미였다. 가말은 주춤했다.
‘결국….’
쿠니스가 이곳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때 폴프가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쿠니스 씨는 이곳을 모릅니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소름이 등허리를 훑으면서 패닉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가말은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라토도, 토라도 없는 지금 부족을 지킬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폴프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금색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명함을 가말이 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렸다.
“저희는 이런 사람입니다.”
<로열 스타>
명함에 쓰여있는 이름이었다.
“필요한 곳에 인력을 파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폴프는 명함 케이스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가말 씨에게 어떤 제안을 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더니 주변을 쭉 둘러보고 다시 가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하지만 이제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내는 건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까?”
그 말은 로열 스타가, 대체 뭘 하는 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쿠니스의 관계를 안다는 말이었다.
아주 기민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말 하나로 굳이 증거가 없어도 자기들과 쿠니스의 관계를 입증하면서, 뒷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쿠니스 씨께서도 당신이 어떤 일을 해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쫓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확실히, 그건 반응하지 않기 힘든 말이었다.
“어떤… 일?”
가말이 묻자 폴프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섬에 어떤 남자가 올 겁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호감 이상의 것…이면 더 좋겠고요.”
거기까지 말한 폴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남자와 관계를 가지라든가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건 불법이죠.”
그러고는 말했다.
“그리고 그쪽은 인간이어서 당신에게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명예를 아는 남자라서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 걱정한다면 말입니다.”
가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
폴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당신이라면. 인질이 없었다면 당신도 잡기 힘들었겠죠.”
가말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물었다.
“그럼 그 남자가 날 좋아하게 하면 된다는 거야?”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으시겠지만요.”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는 과연 보는 순간 욕심이 날 수밖에 없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는 드물었다.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혈통의 고대적인 신비로움에 비인간적인 초월성이 더해져 눈앞에 있는 여자 뱀파이어는 흡사 달의 파편 같았다. 그만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애타는 느낌을 주었다.
삼천 년을 넘게 살며 수많은 여자를 만났을 텐데도 대공이 아직도 가말을 쫓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걸 원하는 이유가 뭐야?”
가말은 제법 날카롭게 물었다.
폴프는 무심히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만….”
그러더니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죠. 어쨌든 영문도 모르고 휘둘리는 건 가말 씨도 원하지 않을 테고, 저희도 일을 맡긴다면 진심을 다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가말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도 같잖은 소리여서- 토를 달지 않았다.
“루아스 바이러스.”
폴프는 허공에 손을 펼치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루아스들은, 그러니까 뱀파이어들은 일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인간에서 뱀파이어가 됐다고 하죠.”
그건 가말도 알았다. 섬에 오래 숨어 살았지만 바깥세상의 정보는 계속 전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프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바이러스를 분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용할 수도 있겠죠. 생물학 무기처럼.”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생물학 무기 따위로 쓰기에는 가치가 어마어마하겠지만요. 우리는 그걸 개발할 겁니다.”
가말이 뭐라고 하기 전에 폴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보세요.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려고 해봤습니까? 절대 이투하 대장님들만은 아니겠죠.”
“…….”
“예전에는 쿠니스 씨를 피해 다니느라 그런 적이 없다면 적어도 이 섬에 살면서는 몇 번 시도했겠죠.”
이 섬에 살면서 두 클리엔테스 외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테니까.
“하지만 성공한 적이 없죠?”
만약 가말이 토라, 라토 외에 감염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이투하에는 뱀파이어가 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그만큼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희박한 확률을 뚫어야 하는, 일종의 상위 종으로 가기 위한 치열한 사다리 타기죠. 누가 당첨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눈이 웃음기를 머금고 휘어졌다.
“우리는 그 사다리 타기의 룰을 바꿀 겁니다. 완전히.”
가말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럼… 누가 감염될지 정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폴프는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한 것에 비해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톤을 유지한 채 말했다.
“앞으로 이 섬에 올 사람은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저희 편으로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나야?”
“접근하는 쪽에서 조금이라도 악의가 보인다면 바로 감지해낼 사람이거든요.”
폴프는 손목 밴드로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악의가 없으면서도 저희와 확실한 이해관계가 있고, 더불어 이득도 볼 수 있는 사람. 이 모든 복잡한 요건을 충족하는 유일한 사람이 가말 씨였다-라고 하면 충분한 답이 되겠습니까?”
가말은 폴프가 한 말의 진위를 가늠하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그거면 돼?”
“그렇습니다.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당신은 자유입니다.”
가말은 생각에 빠졌다.
폐쇄된 환경에서 사타디는 죽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제 목숨보다 부족이 더 중요해졌다.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긴 하지만 정작 수호신다운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쿠니스에게서 벗어나기까지 할 수 있다면….
마침내 가말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 남자는 뭘 하는 사람인데?”
폴프는 훗 웃었다.
“게라입니다.”
게라.
고대 사타디어로 ‘전사’였다.
***
폴프는 가말의 배를 보았다.
“부탁드린 거보다 더 일을 잘 수행해주셔서 말이죠.”
가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이는 계약 사항에 없던 거야. 꿈도 꾸지 마.”
폴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한 걸음 물러나듯이.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궁금하긴 하군요. 드페르 소령님과 이바노프 클랜이라면 당신에게 약간의 과오가 있어도 목숨을 걸고 아이를 보호해줄 텐데, 굳이 돌아오신 이유가 뭔지.”
“그쪽이 얼마나 날 바보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말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가임 혈통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어. 삼천 년쯤 살다 보면 이래저래 보고 듣게 되지.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분명한 사실을 모를까봐?”
“…….”
폴프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확실히 편견이란 무서운 존재였다. 쿠니스에게 쫓겨서 섬에서 숨어 지내왔다고 가말을 지나치게 무시했던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읽은 듯이 가말은 훗 웃었다.
“‘왜 굳이 이 남자를 내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악의이니 이해관계이니 했지만 그런 말로는 삼천 년 전의 나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을 거야.”
폴프는 살짝 묵례할 뿐이었다.
가말은 라토 쪽으로 고갯짓했다.
“토라를 시켜서 알아봤지. 도영 드페르. MCTC의 대원이라는 거 외에는 평범한 인간 남자…. 하지만 ISLE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소문.”
폴프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하진 않고 그냥 듣고 있었다. 가말은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ISLE은? 플로스를 만들었고, 루아스 분야 기술의 선구자.”
3년 전에 헥사 사이언스를 합병한 후로 그쪽 연구에 더 박차를 가한다는 소문이었다.
“즉, 도영 드페르 이 남자의 머리나 몸속에 뭔가 있을 거다, 생각했지.”
로열 스타는 가말에게 도영을 단순한 정보원쯤으로 말했지만 말이다.
“보균 기술 자체는 내겐 별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그걸 통해 도영 드페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바노프 혈통이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도영에 대해 알게 된 가말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사타디는 죽지 않게 될 거야.”
가말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제 사람들을 위하는 선한 의지도 악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폴프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말은 말했다.
“무엇보다 내가 그쪽 혈통의 아이를 가진 이상 이바노프는 날 어떡할 수 없어.”
로열 스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루아스 바이러스고, 거기에 대한 열쇠를 제 아이가 쥐고 있는 한 로열 스타는 그녀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열 스타가 이쪽을 보호해준다면 예전만 한 세력이 없는 쿠니스가 멋대로 굴 수 없는 건 더 자명했고 말이다.
가말은 훗 웃었다.
“거의 미스릴을 입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