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76화 (76/110)

76화<쭈니>

“들어가 보셔도 좋습니다.”

헌병이 수갑을 풀어주며 말했다. 도영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신문해도 그에게서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을 리 없었다. 배신당한 건 그니까.

도영은 눈을 감쌌다. 숨이 떨려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니.

엉뚱한 모습, 그를 바라보는 표정, 눈빛…. 어디서부터 거짓말이었을까? 그를 사랑한다고 했던 것? 아니면 처음부터?

‘아니.’

도영은 손을 뗐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눈빛은 거짓말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사정이. 바보같이 착한 녀석이니까 혼자 책임지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이건 사랑에 눈이 먼 남자가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가말이 오로지 정보를 빼내거나 아이를 가지기 위해 접근한 거였다면 최대한 빨리 목적을 이루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고 있을 게 아니라.

하지만 가말에겐 그가 루아스가 된 이후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목적을 이루고 떠났다. 시간을 끌다, 끌다 어쩔 수 없어서 일을 한 것처럼.

도영은 손을 내리고 방을 보았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도는 생각들이 수학 공식처럼 짜 맞춰지고 정리되는 동안 잠깐 가만히 있는가 싶었다.

갑자기 일어나 아직 입고 있는 전투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에 받쳐 입은 군용 티셔츠를 벗어 올렸다.

서랍 안에서 별 무늬가 없는 검은 티셔츠를 꺼내 입고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 걸쳤다. 그리고 벗은 제 전투복에서 손목 밴드를 꺼냈다.

분명히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개인 물품을 압수당했지만 버젓이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당연했다. 렉스가 주었으니까.

그는 표면적으로는 MCTC의 이득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도영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르….

달칵.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마자 도영은 상대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말했다.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전 절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건너편에서는 잠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영은 기다렸다.

거의 고통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에 하나 가말이 정말 SN의 정보원이라면 어떡할 거지?]

그때도 정의를 선택할 수 있는가.

이반은 그걸 묻고 있었다.

도영은 그게 이반이 도와주는 대신 내거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땐….”

도영은 말을 끌었다.

“벌을 받게 할 겁니다.”

마침내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기다릴 겁니다.”

가말이 모든 형을 다 살고 나올 때까지.

그때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 같았다.

뱀파이어 청력으로도 들을 수 없도록 방음이 되어있어서 잘 들리진 않아도 처음에는 차분히 대화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쿵 하고 문에 무언가 와서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흔들렸다.

징.

그리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복장에 캡모자를 눌러쓴….

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소령님.”

맥코이 하사였다.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부터 저 덩치의 주인공쯤은 알고 있었다.

이어서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한 중사와 크루즈 중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한 중사는 가타부타 군말 없이 말했다.

“가시죠.”

이반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줄 수단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제 팀원들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도영은 군말 없이 밖으로 나섰다. 일단 기지를 벗어나는 게 중요했기에.

***

차가 멈추었다.

사방은 적막했다.

운전한 한 중사는 흘긋 돌아보면서 말했다.

“일단 이곳으로 모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압니다.”

도영은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 뒤에서 한 중사는 맥코이 하사와 크루즈 중사를 보고 중얼거렸다.

“루아스 되고 나서 이상한 카리스마가 생기지 않았어?”

크루즈 중사는 실없는 소리에 눈을 굴리고는 도영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나머지 두 남자도 차에서 내렸다.

빵.

그때 뒤쪽에서 차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윤기가 나는 검은 차가 옆에 와 멈추었다.

이어서 차의 문이 열리고, 청바지에 재킷을 입은 연하가 내렸다. 그리고 인사말 따위 덧붙이지 않고 본론부터 말했다.

“그쪽 정보망엔 우리 클랜은 다 얼굴이 알려져있어. 내가 따라가 봤자 들키는 역할만 할 거야.”

그러고는 연하는 보안을 위해 사용하는 종이 파일을 건넸다.

“여기.”

도영은 파일을 받아 펼쳤다. 맨 위에 쓰여있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로열 스타>

“한마디로, 회사 모습을 한 무장단체야.”

연하는 말했다. 그리고 파일을 가리켰다.

“거기 보면 알겠지만 이들 소속의 함선이 올해 4월 13일 UTC(협정 세계시) 7시경에 사타디 섬에 접근했던 기록이 있어. 정기적으로 근처 항로를 이용하는 일반 무역 함선으로 위장했었기 때문에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도영은 심각한 눈으로 파일을 훑어보았다. 그동안 연하는 계속 말했다.

“원래 로열 스타는 SN에 무기를 대는 무기상들 중 하나였어. 그런데 3년 전 대공이 붙잡힌 이후 파편화된 SN의 지부들을 흡수하면서 규모를 키웠고….”

도영이 쳐다보자 연하는 말했다.

“자금의 흐름을 추적한 결과를 보면 레기온은 사실 SN이라기보다 로열 스타에 가까워. 로열 스타가 운영하는 PMC(민간군사기업)라고 봐야 하지.”

그리고 연하는 덧붙였다.

“대공을 교도소에서 탈출시킨 녀석들도 로열 스타 소속의 용병들이었고.”

이 로열 스타가 대공을 돕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마땅히 그 의문을 가질 것으로 생각했는지 연하가 말했다.

“여기 대표가 ‘미스터 리’라고 알려진 녀석인데 절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우리도 아무리 찾아도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대표님이 보시겠다는군.”

라헬이 의미했던 ‘대표’가 이 미스터 리라는 걸, 도영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하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우리도 아직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녀석들이 뒤에 있어. 일이 잘못되면 이번엔 정말 살아 돌아오기 힘들지도 몰라.”

도영은 파일을 닫았다.

“가말을 데려올 거야.”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데려와.”

도영은 의외로워 연하를 보았다.

“말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말은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가말이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어.”

도영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처럼.

“세 사람은 돌아가세요.”

도영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 팀이 사라진 걸 알면 위에서 눈치챌 겁니다.”

하지만 한 중사는 손가락을 저었다.

“이게 뭐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거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ISLE에 취직시켜달라고 알랑방귀를 미리 뀌는 거지.”

그러자 맥코이 하사가 덧붙였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ISLE에서 전부 책임져준다니까 순전히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이라 이거죠.”

어쨌든 요즘 ISLE은 루아스에게는 신의 직장, 인간에게는 옛 테슬라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회사니까.

이반은 처음부터 도영이라면 당연히 가말을 찾으러 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라도 그랬을 테니까.

연하는 말했다.

“같이 못 가줘서 미안해.”

“됐어. ISLE의 안주인을 끌고 다녀선 나도 자유롭게 행동하기 힘드니까.”

도영이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하자 연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난 군인이야.”

“알아, 멍청아.”

도영은 툭 내뱉고 몸을 돌렸다. 그제야 연하는 도영이 제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이었다고 깨달았다.

“축하해.”

연하는 갑자기 말했다. 도영은 이해하지 못해 돌아보았다.

“뭘?”

“아이 가진 거.”

도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혼란한 와중에 아무도 축하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 아빠인 도영 그마저도.

팀원들도 그제야 생각이 닿은 듯 도영을 보았다.

연하는 말했다.

“남자아이면 히샤가 좋아할 거야. 남동생을 갖고 싶어 하거든.”

생각에 빠져있던 도영은 말하고 차에 올랐다.

“여자아이가 좋아. 사내 녀석들은 충분하니까.”

그건 도영이 아직 토라와 라토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연하는 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가말은 창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아래 내려다보이는, 잘 정리된 프랑스식 정원에 은은하게 불이 밝혀져있었다.

징.

자동문이 열리고, 정장을 갖춰 입은 라토가 들어왔다.

“마티.”

가말은 돌아보았다. 그 동작에 따라 그녀가 입고 있는 연보라색 드레스에 반짝임이 흘러 바닥에 둥그렇게 고인 옷자락까지 미끄러져 내렸다.

길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에는 탐스러운 윤기가 흘렀다.

라토는 말을 잃고 가말을 보았다.

제 파트로네스의 미모에 대해서는 새삼 이야기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화장까지 제대로 한 모습을 마주하자 오래전에 사라진 감정도 다시 살아나려고 할 지경이었다.

라토는 가말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마티가 예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가말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겨우 미소를 보여주었다. 라토는 물었다.

“준비됐어?”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토가 팔을 내밀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을 가볍게 올렸다.

그러자 옆에 서있는, 이 저택에 속한 직원들로 보이는 여자 둘이 가말의 드레스 자락을 들고 따랐다.

두 사람은 방을 나섰다.

고풍스러운 복도를 지나 계단에 닿았다. 그리고 반원형으로 둘러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가말의 드레스 자락이 끌려오며 계단식 폭포를 타고 내리는 물처럼 미끄러져 내렸다.

계단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옛 사교계 파티에 참석한 것처럼 시가를 피우거나 샴페인을 마시며 작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계단 위에 나타난 가말과 라토를 보고 말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사람들 가운데 쿠니스가 가말을 똑바로 보았다. 아직 앳된 끼가 있는 얼굴이지만 정장을 입은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늘 정장을 입고 살았던 옛 귀족 같았다.

폴프는 가말을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눈부시군요.”

가말은 계단 아래 걸음을 디뎠다. 지나가는 자리에 서있는 라헬이 웃음기를 머금고 묵례했다. 그녀는 블라우스까지 같은 검붉은 색인 투피스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쿠니스는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라헬.”

라헬은 중세의 남성 귀족이 인사하듯 손을 가슴께에 대고 인사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라헬입니다.”

가말은 특별한 반응은 하지 않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뒤에서 라헬은 조용히 허리를 들었다.

다음으로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고정한, 북유럽계로 보이는 삼십 대 후반의 백인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판데르발트입니다.”

네덜란드 왕국 출신으로, 옛 네덜란드인답게 상인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대로 상인다운 수완으로 대공이 없는 레기온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이인자였다.

판데르발트는 가말 뒤에 있는 라토를 보았다.

“이투하의 대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싱긋 웃는 눈에 비정상적으로 밝은 안광이 돌았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제 아이들을 특히 이투하에게 많이 잃었죠. 이투하는 정말 자비가 없는 전사들이더군요.”

“테러리스트에겐 그렇지.”

라토가 무심하게 대답하자 판데르발트는 엄지손톱으로 입술을 쓸었다. 긴장감 어린 공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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