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쭈니>
폴프가 중재하기 위해 말했다.
“대표님께선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폴프는 식기가 준비된 테이블을 정중하게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모두 부디.”
모두 일단 별말 없이 착석했다. 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자들이 모여 앉은 식탁에 발랄한 담소가 오갈 리 없어,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촛불이 아련히 타올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쿠니스가 말했다.
“리가 늦는군.”
폴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워낙 바쁘신 분이다 보니….”
“다른 사람은 바쁘지 않을 거 같은가봐?”
가말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폴프는 웃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담배 연기가 넘실거리며 허공에 퍼졌다. 폴프는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라헬이 나와서 물었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
폴프는 정장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라헬은 검은 시가릴로를 물고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였다.
폴프는 라이터를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서 테라스의 유리창 너머로 내부를 보았다.
세팅이 된 탁자 쪽에 가말을 위시한 이투하들이 모여있었고, 쿠니스와 그 관련자들은 소파에 모여있었다.
다들 각자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등 생각보다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연했지만.
아직 리가 도착하지 않고 있어서 다들 무작정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리고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그룹의 수장, 이투하의 여왕, 제 상사 사이에서 가장 골치가 아픈 건 이쪽이었다.
폴프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대표님은?”
라헬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죽을 맛이군.”
라헬은 어깨를 으쓱였다.
“중간 관리자는 항상 고달프죠.”
그러고 돌아서서 갔다. 타이트한 정장 바지 너머로 봉긋한 엉덩이가 살랑거렸다.
명색이 이쪽이 상사였지만 서로 임무가 엇갈려서 라헬을 실제로 보는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볼 때마다 서로 일로 바쁘기도 했고.
어쨌든 루아스니까 당연히 라헬은 육감적인 인상의 보기 드문 미녀였고, 제 동족보다 인간 남자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폴프는 입맛을 다셨다.
여자 루아스와 인간 남자는 관계를 맺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즐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인간은 항상 문제에 해답을 찾는 존재니까.
폴프는 담배를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쿠니스가 가말에게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다. 라토와 이투하들은 살짝 가말을 둘러싸며 경계했다. 하지만 쿠니스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도영 드페르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가말은 무심한 눈짓을 한 번 했다.
“좋은 사람이었지.”
정말로 그랬다. 도영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녀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있었다. 사랑 놀음을 하고 있기에는 그것이 너무 소중했다.
그녀를 악이라고 하면 악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니스는 바깥쪽으로 고갯짓했다.
“저 녀석들보다 차라리 이바노프와 거래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어.”
“로열 스타는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어. 그게 전부야.”
그때 마침 폴프의 손목 밴드가 울리면서 전화가 왔다.
“네.”
전화 통화를 하고 난 폴프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도착하셨군요.”
곧 입구가 열리고, 한 남자가 몸집이 심상치 않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색 정장을 입은 동양인 남자였다.
머리를 쓸어 넘겼고 값비싼 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눈이 붉다는 걸 제외하면 특별히 눈에 띌 만한 게 없었다.
동공이 유난히 작은 편인 붉은 눈이 웃음기를 담고 좌중을 보았다.
“리, 약속이 틀리군.”
쿠니스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내가 루아스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자료를 넘겨주면 넌 내게 가말을 보내준다고 했지. 하지만 배 속에 이바노프의 애새끼를 딸려 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가말은 미간을 좁히고, 라토가 바로 그녀를 보호하듯이 막아섰다. 리는 당황하지 않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건 죄송합니다만 두 분의 사랑을 제가 무슨 수로 막았겠습니까?”
그러면서 가말을 가리키고 말했다.
“원하신다면 제가 가져가도…?”
라토는 바로 사나운 표정이 되며 나직한 으르렁거림을 흘렸다. 도리어 쿠니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가말한테 손대면 넌 죽어. 이 대역 녀석 말고 진짜 너.”
리, 아니 리라고 온 남자는 움찔했다. 귀 뒤쪽에 작게 붙은 수신기는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텐데도….
하지만 대역 남자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로열 스타는 A/S는 끝까지 책임지니까요. 저희가 어떡하면….”
“아니, 됐어. 계약 파기야.”
쿠니스는 딱 잘랐다. 대역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그건 냉기가 감도는 서늘한 웃음이었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 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아시겠죠.”
“네 회사가 남아있다면 말이지.”
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이렇게 되면 그가 나설 차례였다. 아무래도 대공은 아직도 SN 시절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헬.”
폴프가 부르자 라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스릉.
날카로운 금속이 서늘한 울음을 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라헬은 검술의 귀재였다. 레기온 내에서도 그녀를 제압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간의 조직에서 간부는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는 자가 되기 마련이었지만, 루아스 사이에서는 오로지 강함만이 리더십을 만들었다. 따라서 간부란 강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라헬이 다가섰지만 쿠니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폴프는 말했다.
“총수님,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쿠니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여기저기 붙어먹던 무기상이 한자리 제대로 차지했나 보군.”
“말씀을 삼가시죠.”
항상 기름처럼 미끈거리던 폴프는 처음으로 불쾌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미스터 리가 그래도 꽤 충성스러운 부하를 둔 모양이었다.
어쨌든 쿠니스는 현재 제 위치가 이 정도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의 중간 보스쯤이나 될까 싶은 녀석이 정색하고 대할 수 있는 이빨 빠진 호랑이.
다가오는 라헬이 들고 있는 검에 윤기가 미끄러져 내렸다.
라헬은 빙긋이 웃었다.
“불사조는 자신을 태운 재에서 다시 탄생하지.”
퍽 소리가 났다.
정적이 감돌았다.
툭.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폴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배를 보았다. 검이 똑바로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하지 못한 가말은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아? 결국 자기라는 거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말하며 라헬이 단번에 검을 잡아 뽑자 사방으로 파밧 핏자국이 튀었다. 폴프는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무너졌다.
그 머리 위에서 라헬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 달링. 인간 따위가 우리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쿨럭이며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폴프가 일어나려고 힘을 주다가 핏물에 미끄러지자 섬세하게 모자이크된 대리석 바닥에 핏물이 붓질하듯 그려졌다.
폴프는 배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표정한 쿠니스, 비웃음을 지은 라헬, 이 상황을 말릴 생각 따위 없는 판데르발트, 이제 보니 은근히 입구나 창가를 막아서고 있는 레기온 대원들, 그 사이에서 주춤거리며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제 부하들….
폴프는 깨달았다. 이 자리에 그의 편은 없었다.
자만했던 건 누구였던가?
그때 사람들 사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는 가말과 시선이 마주쳤다.
“살려….”
폴프는 본능적으로 가말에게 도움을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라헬.”
그 뒤에서 쿠니스가 말했다. 그러자 라헬이 검을 쿠니스에게 건네주었다. 판데르발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핏자국을 그리며 애써 몸을 끌고 가는 폴프 뒤로 쿠니스가 다가섰다.
가말은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만해, 쿠니스.”
쿠니스는 가말을 보았다. ‘무표정’의 절대적인 기준치가 있다면 그때 그녀를 보는 표정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이 녀석과 나 사이의 일이야.”
“그만…!”
가말이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라토가 그녀를 붙잡으며 만류했다.
“마티!”
가말이 라토에게 붙잡혀 멈추는 순간 쿠니스가 검을 휘둘렀다. 잔인한 주인이 노예를 벌주며 채찍을 휘두르듯이.
일이 끝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닥에 핏물이 넘실거리며 번져갔다.
라토는 잡고 있는 가말의 몸이 짧게 경기하듯 떨리는 걸 느꼈다.
둘 다 명색이 뱀파이어였고 부족 출신으로서 현대 문명인처럼 살생 장면이 특별히 거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비정한 살생에는, 정말 저 사람이 가말의 핏줄이 맞나 싶을 뿐이었다.
아래를 보고 있는 쿠니스의 앞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려 시간의 흐름을 일깨웠다.
그때 쿠니스가 라토를 쳐다보았다. 거의 불을 뿜는 것 같은 살의에 가말은 당장 라토를 제 뒤로 숨겼다.
쿠니스는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라토를 응시했다. 가말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래, 클리엔테스를 죽이면 정말 날 미워할 테지.”
하지만 쿠니스는 갑자기 기색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혈통이니까요. 가임 능력이 있을 겁니다.”
라헬이 흰 천으로 검을 닦으며 말했다. 동족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더니 과연 사실을 적시하는 무심한 어조였다.
“리 녀석은 뱀이야.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쿠니스가 리 대역을 쳐다보자 남자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이 녀석을 꼬챙이에 거꾸로 꽂아다가 돌려보내주고 싶지만, 이 녀석은 무슨 죄겠어? 나도 불필요한 피는 보고 싶지 않아.”
리의 대역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찰나 쿠니스는 말했다.
“하지만 봐야 할 피는 봐야지.”
퍽 소리가 나고 대역의 가슴을 뚫고 검이 솟구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초도 이렇게 죽여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쿠니스는 살인을 하는 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라토는 긴장한 얼굴로 가말을 밀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쿠니스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로열 스타가 네게 뭐라고 말했어? 내게서 널 보호해주겠다고? 그 같잖지도 않은 계약서 쪼가리를 내밀었겠지.”
쿠니스가 검을 뽑자 리의 대역이 쓰러졌다.
“회사의 껍질을 쓰고는 있지만 그 녀석들은 하시시야(중세 아랍의 암살단)와 다름없는 녀석들이야. 원하는 걸 얻고 나면 네 자궁까지 긁어내 빈껍데기로 만들고 아무렇지 않을 녀석들이지.”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루아스들이었다.
쿠니스는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
가말은 그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되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향은 이미….
“형제니 부부니 그런 모든 틀을 벗어나서 가족이 되는 거야.”
쿠니스 뒤로 라헬과 판데르발트, 그리고 레기온의 대원들이 포진해있었다. 그 가운데서, 쿠니스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새로운 사타디 부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