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쭈니>
가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타디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 사타디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야.”
쿠니스는 가말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역사는 이미 우리에게 ‘바다 민족’이라는 침략자의 낙인을 찍었어.”
“그건 우리 쪽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야.”
가말이 말하자 쿠니스는 훗 웃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건데? 우리는 선량한 민족이었다고? 아무도 침략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이라도 할 셈이야?”
“…….”
“사타디는 땅을 갈구했어. 전사들을 보내고, 침략하고 약탈했지. 타와가 왜 아다위한테 널 줬다고 생각해? 타와는 아다위 쪽과 힘을 합쳐서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셈이었어.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건 테러지.”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이해해. 인간들은 법을 만들었지. 침략과 파괴, 약탈이 반복돼서는 문명을 쌓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테두리 안에 사는 자들은 그 법을 존중해야 하지.”
쿠니스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그 테두리를 뚫고 나갈 힘이 있다면?”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말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테두리를 다시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라토는 이 테러리스트 수괴에게 이상한 카리스마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의 정의감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자들에겐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는 괴이한 카리스마지만 순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갑자기 쿠니스가 웃었다.
“어쨌든 연기는 꽤 하는구나. 이게 날 잡으려는 MCTC의 작전이라는 걸 모를 거 같아?”
가말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지금쯤 사방에 특수작전팀들이 포진해있겠지. 신호만 내리면 바로 덮칠 수 있게.”
그러고는 쿠니스는 가말을 가리켰다.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데 걸게. 어쨌든 미끼 역할을 시키면서 진짜 임신한 여자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내겐 아이가 있어.”
가말은 정말 쿠니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더 잘된 일이고. 네가 날 잡아넣기 위해서 MCTC의 스파이 노릇까지 한다면 난 슬플 테니까.”
그리고 서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MCTC의 스파이라는 말이겠지. 일부러 하지도 않은 임신을 했다면서 여기에 왔다면 이 녀석을 끌어내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러면서 리의 대역을 한 남자의 시신을 툭 찼다.
“하지만 뱀은 껍질밖에 남겨놓지 않으니까.”
가말은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사실 그 말대로, 그녀의 배 속엔 아이가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
도영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일곱.”
그때 한 중사가 불렀다. 도영이 돌아보자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조금만….”
도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마음이 급하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두 젖 먹던 연기력까지 다 끌어올려 겨우 여기까지 끌고 온 작전을 망치실까봐 걱정돼서 말입니다.”
하여간 비꼬는 데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알았습니다.”
도영은 말하고 앞을 보았다.
가말이 대공과 있다고 생각만 해도 그는 등골이 서늘했다. 다른 수가 있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은 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말이 대공을 피해 섬에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그날부터.
도영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수평선에 노을이 내려 짙게 불타올랐다.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이었지만, 평생 보게 될까 걱정됐던 풍경도 다행히 마지막이었다. 도영은 드디어 섬에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그런데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가말이 그를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짙은 눈으로.
“도영….”
가말은 말문을 뗐다.
“사람들이 왔어, 섬에.”
도영은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 부족이….”
그러자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들이었어. 내게 도영이 이 섬에 올 거라고 말했어.”
도영은 멈칫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일단 가말이 뭔가 털어놓으려는 기색이기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디서 온 녀석들이었는지 알아?”
“아니. 내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다만 도영이 날 좋아하게 만들면 쿠니스가 다신 날 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했어.”
도영은 어이가 없었다.
“좋아하게…?”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냥 웃긴 일이 아니야. 이유가 있었을 테지.’
도영은 생각을 바꾸었다. 음모를 꾸미는 흉악한 녀석들이 왜 그런 커플 매니저스러운 일을 원할지 생각해보면….
도영은 가말을 위아래로 훑었다.
굳이 섬에 숨어 살고 있는 가말을 찾아내 그녀가 제대로 해낼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맡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일을 맡는 사람이 꼭 가말이어야 했기 때문일 터.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데 가말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갑자기 도영은 기밀 정보 하나가 떠올랐다.
‘늪에 있던 원형 루아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뱀파이어는 가임 능력이 있다.’
즉, 가말은 임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가임 능력이 있는 이바노프의 피를 기증받았다. 즉, 감염을 이기기만 한다면 가임 능력을 가진 루아스가 되는 것이다.
도영은 기가 찼다.
‘이 자식들이 누굴 종마 취급이야.’
게다가 도영이 참여한 타실 프로젝트는 새로운 군 기술의 실험장이었다. 그가 죽고 사는 것에 따라 보균 기술의 성공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군 기밀을 원한 것이다.
그런 형제라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숨어 살기를 택한 가말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해서.
“도영…?”
도영이 생각에 빠져있자 가말이 불안해하며 불렀다. 도영은 물었다.
“그 외에는?”
“다였어. 라토를 데리고 있겠다고 했어.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일만 제대로 해주면.”
“살아있다고 확신해?”
도영은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게 미안했지만 어쨌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신합니다.”
대답은 토라가 했다.
“라토는 살아있습니다.”
확신하는 투에 도영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토라는 손을 내밀어 막고 덧붙였다.
“단순히 그럴 거라는 소망만이 아니라, 만약 라토가 마티의 클리엔테스인 걸 알았다면 인질로서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옆에서 가말은 기가 죽어 웅얼거렸다.
“미안해.”
도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너도 그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테니까.”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들은 나쁜 사람이었어. 돕는다고 하면 안 됐어. 도영이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도영은 좋은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더니 가말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절을 했다.
“부탁할게. 제발 라토를 구해줘.”
도영은 그 정수리를 보다가 말했다.
“조건이 있어.”
그에 가말은 불안한 시선으로 도영을 보았다.
“조건…?”
“너도 같이 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가말은 토라를 보았다가 다시 도영을 보았다.
“나도…?”
“대공이 운영하던 SN은 와해됐고 그 녀석은 감옥에 있어. 더 이상 네가 이 섬에 숨어 살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만….”
여러 번 들었지만 여전히 그 사실이 와 닿지 않았다. 너무 오래 섬에 숨어 산 탓에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래서 가말은 말을 끌었다.
「가세요.」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돌아보자 마을 여자의 부축을 받아 온 앙엘라가 서있었다.
「앙엘라.」
앙엘라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던 가말은 놀랐다.
「섬을 나가세요.」
앙엘라는 다시 똑똑히 말했다. 도영은 사타디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왠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 할아버지께서 큰 마티께서 얼마나 섬을 나가고 싶어 하는지 자주 말씀해주셨죠.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은 분이라고, 자신이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줄 때 제일 눈을 빛낸다고.」
「하지만 내가 섬을 나가면….」
「우리는 이미 큰 마티의 덕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고 싶다는 건 우리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명의 손길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있었다.
부족의 장로회의는 매년 바깥세상과 접촉할지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어쨌든 섬이 언제까지 숨겨진 채로 있진 않을 거란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세상을 마주할 준비가 됐습니다.」
앙엘라는 빙긋이 웃었다.
「바깥에 살고 있을 제 친척들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
그렇게 가말과 토라는 도영과 함께 섬을 나오게 됐던 것이다.
물론 가말이 대공과 쌍둥이란 사실을 들은 MCTC 군사위원회는 멋대로 돌아다니는 핵폭탄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계속 인류의 편에서 일했던 이투하가 보증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가말은 테러리스트 수괴의 핏줄이라기보다 아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때 옆에 있는 한 중사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며 말했다.
“아무튼 연기깨나 하시네요. 연인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억눌린 분노와 처절한 심정을 절제된 표정으로 모두 내뿜는데, 로빈 윌리엄스가 살아 돌아온 줄.”
말하지 않았던가?
“드라마 수업 올 A였거든요.”
도영이 웃지도 않고 한 말에 한 중사는 피식 웃었다.
“이 개고생을 하고 사느니 차라리 연예계 쪽으로 나가지 그러셨습니까?”
“개고생이 더 체질인가 보죠.”
“아무래도 그런 거 같네요.”
모든 건 연기였다. 대공을 잡으러 작전에 나서는 척했던 것, 기지를 벗어난 것, 연하가 서류를 건네준 것, 그때 그가 했던 말, 행동, 모든 게.
남동생이 생겨서 히샤가 좋아할 거라는 말은 연하의 애드리브였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어리바리한 녀석이 연기를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결론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은 MCTC가 뒤로 보낸 특수작전팀이었다.
새로운 작전을 제안한 건 렉스였다.
***
“평범한 방법으로는 대공을 잡을 수 없습니다. 좀 더 창의적이 되어보죠.”
렉스는 말했다.
“기각합니다.”
물론 도영은 거절했다.
“기각이요?”
렉스는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어쨌든 소령이 소장을 상대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영은 단호했다.
“가말한테 그런 위험한 일을 맡길 순 없습니다.”
“하지만….”
가말이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도영은 바로 눈짓으로 막았다. 예상은 했지만, 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스터 리는, 적어도 미스터 리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악명 높은 무기상입니다.”
수십 년간 막후에 숨어 어디서 구했는지도 알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위험한 무기들을 그걸 가져선 안 되는 녀석들에게 팔아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자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자가 루아스인지, 인간인데 이름을 물려받은 건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아무것도요.”
그 정도로 리는 어둠 속에 철저하게 숨어있었다. 누군가와 접촉할 때는 꼭 대역을 썼고, 그 대역과도 절대 만나지 않았다.
어떨 때는 차라리 살아있는 육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타날 겁니다.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가말 씨가 있는 곳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