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79화 (79/110)

79화<쭈니>

“나타날 겁니다.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가말 씨가 있는 곳엔.”

누가 반응하기도 전에 가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나 베이비 가졌어?”

도영은 진정하란 손짓을 했다.

“안 가졌어.”

그사이에 렉스가 말했다.

“소령이 걱정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대공 녀석이 가말 씨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이것부터 말씀드리죠. 가말 씨와 대공, 두 사람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도영은 의아했다.

“성별이 다르지 않습니까?”

“보기 드문 남녀 일란성 쌍둥이죠. 이 경우 대체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만 두 사람은 운이 좋았죠.”

대공 녀석이 말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란성 쌍둥이는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하니까.

하지만 가말과 대공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면 도영은 불쾌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렉스가 말했다.

“하지만 장애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더군요. 대공은 불임입니다.”

이번에는 도영도 당황했다.

“네?”

렉스가 손짓하자 화면에 검사 결과가 떴다.

“인간이었을 때부터 불임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인간으로 살았어도 아이는 낳지 못했을 겁니다.”

모두 말을 잃었다.

“그게, 예전에 대공이 저희 쪽에서 루아스 배아를 얻으려고 했던 이유 같습니다. 본인은 만들 수 없으니까요.”

렉스는 덧붙였다.

“어쩌면 성 기능 자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알아보기 애매한 문제라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대공을 지켜본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쪽의 욕구나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 대목에서 도영은, 같은 남자로서는 대공이 그렇게 삐뚤어진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원래 그쪽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내시들이 더 다른 욕구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괜히 역사에 대표적인 간신들이 내시였던 게 아니었다.

가말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예전에 쿠니스는….”

아래에 반응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도영은 불쾌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성기능 감퇴는 루아스들이 생각보다 흔하게 겪는 증상입니다. 어쨌든 굳이 성기능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성기능이 점차 퇴화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한 중사가 중얼거렸다.

“전 그냥 루아스 안 할랍니다.”

그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고, 렉스는 말했다.

“하지만 성기능 감퇴가 가져오는 심리적인 문제는 본래 인간이었던 이상 불가피한 부분이죠. 대체로 성기능에서 문제를 겪는 루아스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난폭하며 가학적이죠. 그런 면에서 대공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입니다.”

렉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나치게 안정적이죠. 프로파일러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로 무감각한 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더군요.”

“어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거죠. 분노, 증오, 혹은 측은지심이나 슬픔까지도.”

“전형적인 사이코패스군요.”

도영은 말했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펼쳐 가말을 가리켰다.

“인생의 대부분을 대공을 피해 다니는 데 쓴 녀석입니다. 근데 지금 제 발로 대공을 찾아가라고요?”

그들이 그러는 동안 계속 생각에 빠져있던 가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도영이 차고 있는 총을 가져가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난 곧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터뜨릴 거야. 날 쏠 거야, 쏘지 않을 거야?”

도영은 인상을 썼다.

그 말은….

“자기 형제가 몇 백 명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의 기폭 장치를 들고 있다면 대령님은 어떡하실 겁니까?”

“형제를 죽이겠지.”

아주 예전에 대령과 했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 들었어도 상관없었다.

도영은 총을 가말에게 뺏어서 제자리에 돌려 넣으며 딱 잘랐다.

“말도 안 되는 가정엔 대답 안 해.”

하지만 이번에는 가말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영 말이 맞아. 난 평생 쿠…를 피해 다녔어. 도망쳤어. 이번엔 도망가지 않아. 끝낼 거야.”

“결심은 훌륭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잡았어. 일대일도 아니고 머리에 나사 하나는 나간 테러리스트들의 소굴에 제 발로 가겠다고?”

“아뇨. 소굴에 가는 건 아닙니다.”

렉스가 끼어들었다.

“그건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저희로서도 구출 작전을 펼치기가 어렵죠.”

“하지만….”

“들어보십시오. 저희는 미스터 리와 같이 만나는 자리를 세팅할 겁니다. 로열 스타는 대공의 세력과 긴장 관계에 있죠. 미스터 리가 그쪽의 병력이 포진한 곳에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그랬다.

“일종의 중립지대에서 만나려고 하겠죠. 가말 씨는 이 자리까지 대공과 미스터 리를 끌어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도영은 인상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에 렉스가 토라와 라토를 보고 말했다.

“가말 씨를 경호할 이투하들이 필요합니다. MCTC 대원들은 만나는 순간 죽일 테니까요.”

반면 이투하는 용병이고, 아무리 많은 SN 대원들을 죽였던 과거지사야 어쨌든 간에 지금은 가말의 세력으로 간다면 공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투하의 두 대장 중 한 분도 가말 씨를 따라가야 합니다. 두 분처럼 극진한 클리엔테스들이 파트로네스를 혼자 보낸다면 이상해 보일 테니까요. 분명히 의심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토와 토라는 동시에 대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또 동시에 말했다.

“내가 갈 거야.”

“내가 가.”

그러다가 라토는 제 쌍둥이와 말이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렉스를 보고 말했다.

“제가 가야 합니다.”

토라는 기가 찼다.

“웃기지 마. 어디서 그런 법이….”

“토라는 계속 MCTC에 있었기 때문에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살 겁니다. 한때 그쪽과 손잡으려고 했던 제가 그나마 당위성이 있습니다.”

라토의 말에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효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토라 씨가 MCTC의 군인과 데이트하는 장면은 레기온도 봤을 겁니다. 연인이 이쪽에 있는데 갑자기 배신한다는 게 썩 당위적이진 않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라 토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팔짱을 끼고 계속 상황을 지켜보던 도영이 말했다.

“이투하는 MCTC 못지않게 많은 SN과 레기온 대원들을 죽였어. 어떻게든 그쪽을 손봐주고 싶어 하겠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라토는 비장하게 말했다. 정확하게 저런 반응을 예상한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오하지 마.”

렉스가 나섰다.

“어쨌든 이투하는 레기온으로서도 탐낼 만한 세력입니다. 대장을 함부로 죽이게 놔두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포섭하려고 할 것이다.

“저번에는 로열 스타가 같은 편에 있어서 이투하를 데려오는 데 그렇게 열심이진 않았겠지만 이제는 로열 스타가 없으니까요.”

렉스는 스크린을 보았다.

“뱀의 발이라도 아쉬운 입장일 겁니다.”

***

도영은 손목 밴드를 확인했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어서 가말을 데리고 탈출해야 했다.

가말의 역할은 ‘좌표’였다. 대공, 레기온의 수뇌부, 로열 스타를 운영하는 미스터 리라는 인물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좌표.

가말만큼 한 번에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인물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바노프의 아이를 임신한 가말이라면 미스터 리도 두 발 벗고 뛰어올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폭풍의 언덕’ 작전이 시작된 이후 그들이 이 작전 장소를 완벽하게 복제한 레플리카까지 지었다 부쉈다 하면서1) 훈련한 건 이때를 대비해서였다. 대공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팀은 가말을 데리고 탈출하는 역할이었다.

한 중사가 위를 올려다보고 중얼거렸다.

“크라켄이 신났겠군요.”

크라켄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 역할을 맡은 팀의 콜사인이었다.

“저희는 저희 일에 집중하죠. 가말과 라토를 구출해야 합니다.”

보통 때라면 이런 작전의 메인이벤트에 본인 팀이 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반발했겠지만, 도영은 이번만큼은 메인이벤트에 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지금 도영의 유일한 목표는 가말을 그 자리에서 무사히 빼내는 것이었다.

“타와.”

그때 어둠 속에서 토라가 나타났다.

“이동 수단들은?”

도영은 물었다.

“모두 무력화시켰어.”

사라졌던 토라와 그 이투하들의 역할은 레기온과 로열 스타가 이동할 수 있는 수단들을 모두 막는 것이었다.

토라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근데 감이 좋지 않아. 안쪽에서 움직임이 분주해.”

도영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모든 대원들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는 랜드 시스템을 통해 무전이 들어왔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기온이 자신들의 소행이라며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영은 바로 크라켄 쪽에 무전을 보냈다.

“지금 당장 돌격해야 합니다.”

이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됐다. 대공은 MCTC가 동요하는 이 틈을 만들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크라켄을 이끄는 쪽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내부 상황이 좋지 않은 거 같아. 대기….]

“지금 바로 들어가십시오.”

[여기 명령권자는 나야.]

도영은 더 말씨름하는 걸 그만두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바로 무전을 끊고 팀에게 말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한 중사는 물었다.

렉스와 대립한 건 연기였지만 지금 명령 체계를 무시하면 나중에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영은 확고했다.

“가말에게 신호를 보내세요.”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바람이 느껴졌다.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숲이 흔들리면서 떠올랐다, 숲에서 나타나는 맹수처럼 눈을 빛내는 헬기가.

그리고 빛이 번쩍이는 순간 일방적인 사냥에 가까운 사격이 시작되었다.

도영은 외쳤다.

“달려!”

***

“지금 당장에라도 네가 임신했는지 검사할 수 있어.”

쿠니스는 말했다.

로열 스타는 그를 도와주는 대가로 이쪽이 가지고 있는 ‘루아스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 자료’를 요구했다. 3년 전 루아스 바이러스를 연구했던 제약회사 제노아틱스가 해체되면서 감쪽같이 사라진.

그리고 가말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은 순간에 쿠니스는 로열 스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그걸 역이용하기로 했다.

가말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영 드페르가 아무런 죄가 없는, 심지어 사람들을 지키는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남자로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로열 스타의 작전은 실패할 거라는 걸 처음부터 내다보았지만 어쩌면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이용해 가말이 제 발로 제게 오도록.

쿠니스는 말했다.

“어쨌든 이야기는 조용한 곳에 가서 더 나누자고. 지금은 떠나야 할 때야.”

가말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아니, 넌 나와 가는 거야. 결혼하지 않은 여성 부족원은 가장에게 복종해야 하는 거야. 잊었어? 나는 사타디 부족장의 장남이야.”

“넌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을 받지 않았어. 그런 사람은 부족장의 자격이 없어.”

사타디 부족에서는 부족장에게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거나 아들에게 흠이 있다면 부족장의 자격은 다음대로 내려갔다.

즉, 원칙적으로 부족장의 자격은 가말이 낳을 아이에게 있는 것이다.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룰에 복종할 생각도 있어. 날 재판할 사람이 있다면.”

징.

그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고 지적인 인상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1) 마크 오언, 케빈 모러, 「노 이지 데이」, 이동훈, 길찾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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