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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80화 (80/110)

80화<쭈니>

징.

그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고 지적인 인상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뭐야?”

“의사야.”

의사가 다가오자 라토가 가말을 제 몸 뒤로 숨기며 이를 드러냈다.

“다가오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쿠니스는 고갯짓했다. 그러자 레기온 대원들이 동시에 라토에게 위험한 동물을 사냥하듯이 총을 겨누었다.

“저항하지 말아주십시오.”

의사는 인간이었다. 꼭 인간이라면 가말이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듯이 인간으로 데려온 것이다.

가말은 라토와 이투하들을 돌아보았다.

비록 루아스 바이러스를 원한다는 건 작전 때문에 한 거짓말이었지만 부족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장 소중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사이에 의사가 가말의 팔을 잡아 피를 뽑았다. 그리고 분석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라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뭔가 해야만 했다.

두두두두두두.

갑자기 밖에서 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다 닫혀있는데도 이 정도로 들린다면 일반적인 총으로 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쿠니스의 얼굴을 보니 그는 이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라토는 감이 좋지 않았다. 혹시 MCTC의 팀이 들킨 거라면….

그때 의사가 패드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양성입니다.”

쿠니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의사를 돌아보았다.

“양성?”

“네. 임신하셨습니다.”

가말도 의아해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임신하지 않았다. 혹시 의사가 같은 스파이인가 싶었다.

“임신했다고?”

쿠니스도 납득을 할 수 없는지 누차 물었다. 그리고 인상을 쓰고 말했다.

“거짓말하면 산 채로 사지를 찢어버릴 거야.”

“사실입니다. 원하시면 다시 검사해보셔도….”

쿠니스는 가말을 돌아보고 위에서 아래로 꼼꼼히 훑었다. 가말은 태연한 척 말했다.

“봐.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

쿠니스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정말 루아스 바이러스를 원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왜 여기 있겠어?”

쿠니스는 잠깐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세월은 너마저 변하게 한 걸까?”

그건 거의 자문에 가까웠다.

“삼천 년이야, 쿠니스.”

가말은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바위산도 변할 세월이었잖아.”

쿠니스는 가말과 그 주변을 주의 깊게 보았다.

달칵.

벽에 붙어있는, 빈티지한 커다란 괘종시계에서 분침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틱, 틱….

그때였다. 라토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있는 루아스의 목을 후려쳤다. 바로 이투하들이 반응했다.

라토는 가말을 잡자마자 안아들어 창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말이 놀라 외쳤다.

“라토, 왜…!”

거의 성공했는데 어째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안, 마티. 감이 좋지 않아.”

저쪽에서 굳이 가말이 임신했다고 페이크를 쓸 이유가 없었다. 진짜로 임신한 게 아니고서야.

물론 작전에 임하기 전에 모두 검사했지만 일이 잘못되려면 어떻게든 잘못되는 법이었다. 그걸 인정한다는 점에서 라토는 토라보다 현실적이었다.

이제 작전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것, 무엇보다 그게 최우선이었다.

창문에 거의 다다른 순간, 갑자기 베란다에서 무장한 레기온 대원들이 총을 겨누며 나타났다.

라토는 주춤했다.

어느새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치의 빈틈없이 총구가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일당백인 이투하들이라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쿠니스가 뒤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사이에 착상된 거야. 그렇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아니, 아닐 것이다.

가말은 흔들리는 눈으로 라토를 보았다.

“라토.”

라토는 총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냐, 마티. 저 녀석들 수법이야. 동요시키려는 거야.”

하지만 앞을 주시하는 라토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말은 라토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의미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좋아. 내겐 더 잘된 일이니까.”

그러고는 고갯짓했다.

“데려가.”

그러자 레기온 대원들이 라토에게 거의 총구를 갖다 붙였다. 가말은 얼른 그 사이를 막아섰다.

“라토를 건들지 마.”

“그럼 저항하지 마.”

쿠니스는 눈이 번뜩거렸다.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것만 해도 충분히 죽이고 싶어지니까.”

그때 라토가 가말을 잡고 말했다.

“마티, 약속했잖아.”

“마티, 약속해.”

작전이 시작되기 전 라토는 가말을 마주하고 말했다.

“만약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날 희생하겠다고.”

“뭐? 말도….”

가말이 말하려고 하자 라토는 일단 말을 막고 덧붙였다.

“내가 죽겠다는 이야기가 아냐. 난 어떻게든 살아나올 거야. 이건 마티의 마음가짐에 대한 문제야.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만 집중해. 약속할 수 있지?”

하지만 가말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마티.”

라토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투로 불렀다. 그제야 가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그때였다. 둘 사이에 무슨 약속이 오갔는지 대강 짐작한 쿠니스가 말했다.

“내가 이 녀석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제는 널 잡을 미끼로 쓸 일도 없으니까.”

가말은 표정이 흐려졌다.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쿠니스는 라토를 죽일 것이다. 여봐란듯이.

강하지 못하다고 해도, 각오가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라토를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제 마티를 보는 라토는 눈빛이 짙어졌다.

그도 이런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착하고 다정한 제 마티는 그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참지 못할 테니까.

그게 단점이자 최대 장점인 사람이었고, 그 마음씨는 가말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라토는 이 상황이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하기도 했다.

레기온 대원들이 라토를 가말에게서 뜯어내듯이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에게 수갑을 채우는 동안 가말은 쿠니스를 보았다.

그는 특별히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렴풋이 만족감이 감돌았다. 꼭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시죠.”

레기온은 그녀를 옥상으로 데려갔다. 곧이어 헬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타.”

쿠니스가 가말에게 말했다.

라토는 흘긋 뒤를 보았다. 도영의 팀이 시간에 맞게만 온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있었다.

드드드….

그때였다. 멀리서 폭음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며 땅이 진동을 일으켰다. 라토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육안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땅이 흔들렸다.

“MCTC는 오지 않아.”

뒤에 오는 라헬이 말했다.

“여기까지 병력을 보낼 겨를은 없을 테니까.”

쿵…. 쿠구궁….

“이 소리가 들려?”

모래바람에 휘날리는 금발 사이로,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SN이 돌아온 소리.”

결국 라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전은 실패했다.

***

쾅!

도영은 어깨로 문을 밀치고 옥상으로 뛰어나갔다. 폭풍 같은 바람이 헬기장을 휩쓸고 있었다. 바람에 섞인 굵은 알갱이들이 헬멧과 헬멧 유리에 타닥, 타다닥, 탁탁, 와 부딪쳤다.

그 사이로 이미 헬기는 잿빛 하늘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소령님!”

한 중사가 외쳤다.

“당장 뒤쫓아 갑니다.”

도영은 지체할 것 없이 돌아서면서 소리쳤다.

***

헬기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왕국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

창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쿠니스가 비쳤다.

“대도시들 중에 하나를 탈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 고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

“고향은 없어.”

그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가말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곳은 터키라고 부르는 나라였고, 고향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변해버렸다. 땅도, 사람들도.

하지만 쿠니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없다면 다시 만들면 되는 거야.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으니까.”

“사이코 자식.”

좀 떨어진 자리에 붙잡혀 앉아있는 라토는 욕설처럼 내뱉었다. 쿠니스는 흘긋 라토를 보았다.

“앞으로 말을 삼가도록 해. 계속 가말 옆에 있고 싶다면.”

갑자기 거구의 흡혈귀가 라토를 붙잡으려고 했다. 라토는 재빨리 반응해 피했다.

“라토를 내버려둬!”

가말이 외쳤다. 분위기가 아수라장이 되자 쿠니스는 말했다.

“모두 진정해.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말은 내 쌍둥이야. 이 세상에서 가말에게 해를 끼칠 사람의 리스트가 있다면 난 그 리스트에 올라가지도 않아.”

“그럼 왜 이런 식으로 마티를 납치하는 거야? 넌 마티의 의사 따위 존중하지 않잖아.”

라토는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쿠니스는 여유로운 투를 잃지 않았다.

“우리에겐 찬찬히 대화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 아무도 그걸 존중해주지 않아서 말이야.”

가말은 심각하게 말했다.

“라토를 놔줘.”

쿠니스는 손짓했다. 그러자 거구의 흡혈귀가 라토에게서 손을 뗐다.

“넌 도영을 죽일 뻔했어.”

가말도 작전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했다.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내 덕분에 뱀파이어가 됐으니 따지고 보면 내가 은인 아니야? 그래서 덕분에 이렇게 아이까지 가졌잖아?”

“헛소리하지 마.”

라토가 끼어들었다. 쿠니스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가족끼리 너무하네.”

“누가 가족이야?”

라토는 이를 갈았다.

“감염원이 같을 뿐이야. 넌 마티가 아니라 마티를 감염시킨 늪에 감염됐으니까.”

그때 가말이 나섰다.

“쿠니스. 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어. 죗값을 치러. 널 기다리고 있을게. 난 네 시지니까.”

쿠니스는 훗 웃었다.

“맞아. 우리는 시지야. 아다드 신이 널 내게 줬어.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영원히.”

그때 라헬이 아까부터 특수 케이스를 들고 다니던 대원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아 다가왔다. 그리고 케이스를 의자에 내려놓고 열었다.

탁.

뚜껑이 열리자 거기에는 충전재 가운데 총처럼 생긴 철제 주사기 두 개가 놓여있었다.

가말과 라토 모두 그쪽에 시선이 팔린 사이 쿠니스가 말했다.

“내게도 클리엔테스가 하나 있었어. 이름은 마르코프였지. 말이 없는 녀석이었어. 대신 비디오 게임을 잘했지. 항상 내가 졌어.”

그러면서 쿠니스는 제 팔을 걷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날 도와준답시고 제 몸에 폭탄을 심어서 이반 이바노프와 알렉스 야크트훈트를 한 번 시원하게 날려버렸지 뭐야?”

그러고는 라토를 눈짓했다.

“이투하 네 녀석은 알지? 3년 전 크루즈 폭발 사건. 안타까운 일이야. 늙은 것들은 살이 질겨서 살아나왔는데 마르코프 녀석만 죽어나갔으니.”

당연히 라토는 그 사건에 대해 알았지만 순순히 대답하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때 이바노프 녀석들을 죽일 뻔했던 물건.”

라헬이 주사기 하나를 꺼내 쿠니스의 팔에 주사했다.

“마르코프가 제 몸에 넣었던 거랑 달리 이건 심장에 가 붙어. 제거할 수 없지.”

그리고 라헬은 주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푹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주사기 안에 들어있는 정체 모를 것이 쿠니스에게 주사되었다.

이어서 가말을 보는 붉은 눈이 빛나는 안광을 뿜었다.

“그리고 한쪽이 폭발하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폭발해.”

쾅!

순간 라토가 옆에 있는 레기온 대원을 벽으로 처박아버리고 뛰어나갔다.

그럼에도 쿠니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가운데 두고 바위를 둘러 흐르는 강물처럼 레기온 대원들이 당장 달려와 라토를 바닥에 억눌렀다. 그러다 못해 거의 몸으로 깔아뭉갰다.

“마티를 건들지 마!”

라토는 울부짖었다. 그가 일어나려고 하자 둘이 더 와서 내리눌렀다. 그리고 용접기처럼 불꽃이 번쩍거리는 테이저를 목에 갖다 댔다.

살이 타는 냄새가 퍼졌다. 라토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씹어 삼켰다.

가말은 소리쳤다.

“그만해! 라토를 놔줘!”

그사이에 라헬이 가말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하지만 가말은 라토를 신경 쓰느라 그녀가 그러는 줄도 몰랐다.

쿠니스는 웃었다.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우리는 시지니까. 안 그래?”

미소가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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