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쭈니>
가말이 작게 물었다.
“영원교가 뭐야?”
라토는 가말을 보았다. 섬에서 거의 나온 적 없는 가말은 영원교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루아스를 추종하는 종교단체야. 특히 여자 뱀파이어를 신성시해. 임신할 수 있는 여자 뱀파이어, 자기들 말로 ‘사도’가 있다고 믿거든.”
가말은 자신을 가리켰다.
“나?”
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도의 배에서 태어난 메시아가 자기들을 천국으로 안내할 거라고 믿어.”
라토로서도 정작 그들이 가임 혈통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얼마 전까진 그냥 별게 다 있구나 생각하고 넘겼다.
가끔 영원교 신도를 마주친 적 있었지만 그쪽도 그를 지나가다 만나는 뱀파이어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원교는 예전부터 여러 여자 뱀파이어 납치 사건에 연관되어있었어. 희생자도 여럿 있었지.”
하지만 뱀파이어에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기 전이라서 처벌받는 일 없이 지나갔다.
“그 이후로도 납치 사건은 몇 번 있었지만 사도님을 모시려는 거뿐이었다고 주장해서 그냥 정신 나간 사이비 교도들의 행각 정도로 받아들여졌지.”
관련자들은 대부분 벌금형이나 기소유예로 방면되었다.
“나한테도 가끔 여자 신도들이 접근한 적이 있었어. 보통은 뱀파이어와 자면 영생까진 아니어도 그 기운을 얻는다고 해서 자려는 목적이었지.”
“잤어?”
가말은 설마하면서 물었다. 라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런 여자들은 눈빛이 이상하거든. 뱀파이어로서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내 목덜미라도 물어뜯을 거 같아서. 어쨌든 요즘은 조용해서 교세가 많이 기울은 줄 알았는데….”
라토는 돌아보았다. 거기엔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미소를 잃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전부 여기 모여있었어.”
긴장감이 도는 속삭임이었다.
***
어떤 방으로 다가갔을 때쯤 한 여자가 라토에게 말했다.
“제자님께는 다른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라토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 옆에 있겠어.”
여자는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살짝 당황했다.
“그건 허락받지 못한 일입니다.”
“그럼 직접 와서 떨어뜨려놓으라고 그래. 절대 그렇게 하진 못할 테지만.”
라토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인간에 불과한 여자들은 겁먹은 기색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버려둬.”
돌아보자 라헬이 다가왔다. 꼭 퇴근하는 샐러리맨처럼 목 끝까지 채우고 있던 단추를 두 개 풀고 있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집에 와서 불안한 아이가 마마와 꼭 같이 자야겠다면 그러라고 해야지.”
그러고는 가볍게 웃고 지나갔다.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부가 허락한 탓인지 시중을 드는 여자들도 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예상대로 호사스러웠다.
“새장을 정성스럽게도 준비했군.”
라토는 잔뜩 비꼬았다.
중정 위로 하늘이 열려있었다.
평범한 인간 여자라면 몰라도 가말은 충분히 뛰어나갈 수 있는데도 그물망 하나 쳐놓지 않았다는 건 감옥은 따로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가말을 이곳에 가두고 있는 감옥은 그녀의 가슴에 심겨있으니까.
“목욕하시겠습니까?”
그때 한 여자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에 가말은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휴가라도 온 줄 알아?”
여자는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가말은 바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하려고 했다.
“아니, 난….”
라토는 그런 가말의 손을 꾹 쥐었다.
“됐어, 마티.”
가말은 라토를 보고는 말을 삼켰다.
***
“난 바닥에서 잘게.”
라토가 말하며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남자 다섯이 누울 수 있을 것처럼 큰 침대에 앉아있는 가말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럼 나도….”
라토는 손을 저었다.
“임신한 여자는 바닥에서 자는 거 아니야.”
“하지만 바닥 딱딱해.”
라토는 아무렇지 않게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짚더미에서도 잤는데 이쯤이야.”
사실 바닥이라고 해도 카펫이 워낙 크고 두툼해서 푹신한 베개 몇 개와 이불을 가져오니 충분히 훌륭한 잠자리였다.
게다가 쓸데없이 모든 물건이 고급이어서 오히려 불편할 정도로 부들거렸다.
“마티도 어서 누워.”
라토가 말하자 가말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가말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네.”
“그러네.”
라토도 중얼거렸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아마 그가 가말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되었을 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어릴 때와는 달라졌다.
그게 숲 속에서만 살아와 가말 외에는 여자라고는 볼일이 없어서 착각한 건지, 아니면 혈통이 아닌 인연이라는 끈으로만 이어져있는 그들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때론 인연의 힘이 혈통의 힘보다도 강했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 사실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라토에게 제 파트로네스에 대한 미련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었더라도, 대공을 보는 순간 모조리 말라버렸다.
그 집착은 광기였다.
라토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 녀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예전에도 가말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원하지 않는 상대에겐 폭력일 수 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지만 좋은 거 하나 있어.”
가말은 갑자기 말했다. 라토는 침대 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뭐가?”
“라토와 같이 있는 거.”
가말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숲 속에서 혼자 사는 건 외로웠어. 어느 날 너희가 와서, 사실 너희 마티에겐 고마웠어. 너희를 내게 줘서. 나 나빠?”
그러면서 가말은 흘긋 라토를 보았다. 라토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마티도 차라리 고마워했을 거야.”
가말은 연한 기운이 도는 눈으로 속삭였다.
“너희가 인간으로 죽었으면… 아주 슬펐을 거야. 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라. 따라갔을 거야.”
그런 가말을 보고 있으려니 라토는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미안해, 마티.”
“뭐가?”
“속 썩여서.”
“사과하지 마.”
가말은 작게 말했다. 그러고는 뻐기듯이 덧붙였다.
“자식이란 원래 그런 거야.”
그 말에 라토는 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
이곳에서는 하인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건너편에 앉은 쿠니스는 말했다.
“들어.”
물론 라토는 잔을 들지 않았다.
“할 말이 뭐야?”
묻자 쿠니스는 거두절미하지 않고 말했다.
“일전에 널 가둬뒀던 데에는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좀 있었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오해를 풀었으면 해.”
쿠니스는 똑바로 라토를 보았다.
“난 실수를 저질렀어. 끔찍한 실수였지. 누누이 반성하고 있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
“…….”
“내가 단순히 여자를 원하는 거였다면 이 오랜 세월 가말을 찾아다니지도 않았어. 가말은 내 하나뿐인 형제고, 이젠 유일한 가족이야.”
라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쿠니스는 계속 말했다.
“내가 가말을 데려오는 데 무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도 잘 알 거야.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거든.”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폭탄은 알다시피 내 몸에도 들어있어. 가말과 오해만 풀린다면 바로 제거할 생각이야.”
라토는 무표정했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하나?”
“인간과 공존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뭐지?”
쿠니스는 화제를 바꾸었다.
“인간은 우리를 이용할 뿐이야. 이투하와 레기온은 목적이 같아. 원하는 건 우리만의 땅이지. 네게 레기온의 간부 자리를 주지. 이투하를 데리고 들어와.”
“만약 마티와 오해를 풀고 싶다면.”
라토는 강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아니, 마티와 네 사이에 어떤 오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네가 할 일은 레기온을 해체하고 선고받은 형을 살고 나오는 거야. 하지만 넌 하지 않겠지. 이 권력과 부를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드륵.
라토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솔직해져. 네가 원하는 건 부와 권력, 여자라고.”
그리고 서늘하게 한마디 남겨놓고 돌아서서 갔다.
“이투하는 자유를 원할 뿐이야. 죽으면 죽었지, 지상 최악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쿠니스는 중얼거렸다.
“하여간 클리엔테스도 꼭 자기 같은 녀석을.”
뒤쪽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판데르발트가 말했다.
“이투하는 제 대장들의 말이 아니면 듣지 않을 겁니다. 적의 얼굴에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죽을 녀석들이죠.”
“아니었다면 이런 짓까진 하지도 않았어.”
쿠니스는 돌아보지 않고 회의감이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종교단체든 테러단체든 어쨌든 단체를 운영한다는 건 싫은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옆 소파에 앉아있는 라헬이 담배 연기를 내뱉고 말했다.
“제 하렘에 주시면 며칠 내로 얌전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고문한다고 말을 들을 녀석이 아니야.”
여전히 쿠니스가 돌아보지 않고 말하자 라헬은 어깨를 으쓱였다.
“프라이드가 높은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가 쉽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프라이드를 꺾으면 바로 무너지거든요.”
“관건은 그 프라이드를 어떻게 꺾느냐 하는 거 아닌가?”
창가에 서있는 하심이 지적했다. 라헬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방법은 많지. 제 본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당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쿠니스는 새삼스럽게 라헬을 보았다.
“너도 참 사이코야.”
라헬은 우아한 몸짓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쿠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로 회유할 수 없는 녀석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
“마티.”
라토는 방으로 들어가며 가말을 불렀다. 왠지 방 안에서 많은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라토.”
가말이 라토를 기다렸다는 듯이 곤란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는, 청순하면서도 발랄해 보이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냥 드레스가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었을 법한 제대로 된 드레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떠오르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가발은 쓰지 않았지만 머리를 복잡하게 땋아 올리고 화사하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온갖 드레스와 화장품들이 늘어져있었다.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 뭐야?”
“사도님께 옷을 입혀드리고 있었습니다.”
한 영원교 여자가 대답했다.
“마티는 인형이 아니야.”
어제 저택에서 드레스를 입은 건 눈속임을 위한 거였지, 도영이 아닌 여기 있는 녀석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말의 성격에 무해해 보이는 인간 여자들에게 윽박을 할 순 없었을 것이다.
제 쌍둥이를 잘 알고 있는 쿠니스가 일부러 인간 여자들을 보낸 게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가말은 라토의 말을 자기 딴에는 화난 얼굴로 따라했다.
“인형 아니야.”
짐짓 그러는 모습이 오히려 인형처럼 깜찍해서 도리어 여자들은 누가 봐도 가말을 귀여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라토는 골치가 아파 중얼거렸다.
“마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러움이 제 파트로네스의 장점이라지만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 어울리니 된 거 아닙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