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83화 (83/110)

83화<쭈니>

“잘 어울리니 된 거 아닙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면서, 레기온의 자금책 하심 말루프가 온갖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멋대로 들어오지 마.”

라토는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하심은 개의치 않고 가말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뜨거운 눈으로 말했다.

“아름다우십니다.”

가말이 반응하기도 전에 라토가 당장 그녀의 손을 빼내 제 소매로 하심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닦았다.

“멋대로 만지지 마.”

하심은 순식간에 텅 빈 제 손을 접고는 허리를 일으켰다.

“경계하지 마십시오. 총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곳에서 감히 가말 님을 해칠 사람은 없으니까요.”

라토는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들이 하늘이 푸르다고 해도 믿을 거 같아?”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하심은 어깨를 으쓱이고 찾아온 본론을 말했다.

“가말 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더 있겠습니까.”

하심은 비웃음을 지었다.

“몸이 달을 대로 달은 로열 스타죠.”

그러고는 가말을 보았다.

“어쨌든 살아있는 황금을 눈앞에서 놓쳤으니까요.”

***

양옆으로 문이 열리고, 커다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가 마치 옛 중동의 왕궁처럼 호화로워 어지러울 정도였다.

가운데 놓인 기다란 탁자에는 쿠니스와 나이 든 백인 남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멋들어지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는 가말과 그 뒤를 따라오는 라토를 발견하고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말에 가말은 살짝 인상을 썼다가 깨달았다.

“리…?”

리, 즉 리의 대역이 싱긋 웃었다. 쿠니스는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결국 이번에도 네가 직접 나타날 생각은 하지 않았군. 별로 사과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는걸.”

리는 살짝 묵례했다.

“제 안전에 관련된 문제라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수배된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정체를 꽁꽁 감추는 이유가 있나?”

“집안사가 좀 있다고 해두죠.”

쿠니스와 가말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가족이 살아있을 리 없는 루아스에게 집안사라고 한다면 파트로네스나 클리엔테스와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쪽의 집안 사정 따위 아무래도 좋아서, 쿠니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영원교 여자가 가말이 테이블 한쪽에 앉도록 손짓했다. 따라온 라토는 그냥 가말 뒤에 서있었다.

자리가 갖춰지자 리는 가볍게 손을 맞잡고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워낙 에두르는 걸 싫어하시니까요.”

“말해.”

쿠니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루아스 배아가 그쪽에 있다고 해도 레기온은 루아스 바이러스를 추출해 활용할 기술이 없습니다. 장비도, 자금도 없죠. 기술력은 저희 쪽에 있으니 협력하죠.”

예고한 대로 단도직입적인 말이었지만 쿠니스는 턱을 괴고 있을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손을 내리고 말했다.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아쉬운 쪽은 너희들이야. 아쉬운 사람처럼 행동해.”

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위라는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잘 누려야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시는군요.”

“미래를 잘 보기 때문에 이런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쿠니스는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우위를 뺏기는 일 따위 없을 거라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리는 잠깐 말이 없더니 일어났다.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락 주십시오. 협상 테이블은 언제든 열려있으니까요.”

그러고는 태연히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쿠니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시선을 떼지 마. 가말을 노릴 테니까.”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가말은 쿠니스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쉽게 화를 내던 그는 더는 무작정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더 단단해져서, 아주 오래 살아서 비늘이 돌처럼 딱딱해진 뱀 같은 느낌이었다.

기나긴 세월은 그를 변하게 했다. 최악의 방향으로.

인간이었을 때 이미 살인을 저지른 제 핏줄은 자신이 흘린 피를 뒤집어쓰고 괴물이 되었다.

그런 쿠니스를 보고 있는 게 괴로워, 가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쿠니스가 말했다.

「잠깐.」

그때 가말이 들어왔던 쪽 반대편 오픈형 아치 문 너머에서 정장을 갖춰 입은 한 여자가 들어왔다.

가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의사야.」

「의사?」

「검진.」

가말은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쿠니스가 말했다.

「걱정 마. 이상이 없나 검사하려는 거뿐이야. 네 배 속에 있는 이바노프는 쓸모가 있으니까 해치지 않아. 그리고 로열 스타와 달리 우리가 원하는 건 배아가 아니라….」

「네 조카야.」

쿠니스는 가말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러자 가말은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네 조카라고. 그냥 이바노프가 아니라.」

그러고는 라토와 함께 의사를 따라 밖으로 사라졌다.

***

검진을 끝내고 나오자 쿠니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늘 따라다니는 간부들은 아무도 없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방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쿠니스는 그냥 방에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말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데?」

둘은 복도와 회랑을 지나 정원으로 갔다.

술탄이 살던 알함브라 궁전을 옮겨놓은 것 같은 정원에 개방감 있는 벽을 통해 바다가 내다보였다.

그야말로 절경이라고 할 만한 풍경이었지만, 가말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벽과 지붕이 반은 뚫려있어 온실 같기도 하고 온실 벽이 그냥 조형물 같기도 한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쿠니스는 그 나무로 다가섰다.

정원에는 나무가 많았지만 개중에서 그 나무가 눈에 띈 이유는, 그것만 지붕이 뚫린 온실 안에 하얀 울타리로 둘러져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처럼.

쿠니스는 그 나무에 열려있는 작은 초록색 열매 하나를 따서 건넸다.

「기억해? 네가 좋아하던 거야.」

가말은 열매를 건네받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멸종했잖아.」

이건 언젠가 가말이 도영에게 말했던 그 나무 열매였다. 기본적으로 무화과지만, 종이 달라서 현재의 것과는 모양도, 맛도 상당히 달랐다.

쿠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언젠가 찾으려고 했더니 멸종했더라고. 유전자 기술로 다시 만들어낸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날 그녀를 위해서.

가말은 아직 쿠니스가 들고 있는 무화과 열매를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이런 게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 같아?」

그 긴 세월… 가말은 두려웠고, 무서웠다. 부족이 멸족하고 사람들이 죽은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자책하고 슬퍼했다.

그래도 쿠니스가 제가 알던 사람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진심으로.

하지만 그가 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확실해진 이 순간,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형제나, 가족이나, 설령 같은 종으로라도.

쿠니스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럼 내가 어떡했어야 한다는 거야? 네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청혼했다고 네가 날 받아줬을까? 다른 방법으로 가질 수 없다면 차지할 수밖에 없잖아.」

그녀를 보는 건, 어려 보이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다 자란 ‘남자’의 눈이었다.

「넌 내 쌍둥이야.」

그래도 가말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생물학적으로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쿠니스는 꾹 입을 다물었다.

「만약 내가 네 쌍둥이가 아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가말은 생각해보았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녀의 형제, 함께했던 어린 날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할 만큼 어렴풋한 나날들에 기대어 그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했던 지난날….

가말은 똑바로 쿠니스를 보았다.

「널 죽였을 거야, 오래전에.」

쿠니스의 눈빛이 난폭해졌다.

「하지만 네겐 그럴 능력이 없었지.」

「마음이 없었던 거야, 쿠.」

갑자기 쿠니스는 황당해하는, 하지만 싫어하지만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애칭이야?」

가말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도영이 네 이름을 부르는 걸 싫어하거든.」

쿠니스의 표정이 굳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가말은 돌아섰다. 몇 걸음 가는데, 깨끗한 온실 유리에 자신이 비쳤다. 그 뒤로 얼핏 쿠니스가 보였다.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자신에 비해, 쿠니스는 여전히 열여덟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늪에 빠진 날 그대로.

그래서 이제 누군가 둘을 본다면 쌍둥이는커녕 가족인가 어렴풋이 생각할 정도로밖에 닮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서야, 도영이 두 사람이 핏줄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긴, 우린 더는 쌍둥이도 아니지.」

가말은 중얼거렸다. 그러자 쿠니스도 가말이 보는 유리를 보았다.

「네가 나이 들었으니까.」

「내 얼굴에서 뭘 봤어?」

가말은 유리에 비치는 그들을 본 채로 물었다.

「‘날’ 봤어?」

쿠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어떤 종류의 질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널’ 봤다고 생각하진 않아?」

돌아보는 눈동자가 서늘했다.

「조심해. 네 얼굴이 비친 연못에 빠져 죽지 않도록.」

그러고는 가말은 걸어갔다. 정원 밖 기둥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토가 바로 반응했다.

“마티.”

“괜찮아.”

가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라토의 팔을 잡았다.

라토는 흘긋 정원 쪽을 보았다. 그 모습을 쿠니스가 빤히 보고 있었다. 열매를 그대로 손에 쥔 채로.

라토는 고개를 돌리고 가말과 함께 복도를 내려갔다.

***

가말은 한동안 말없이 걸어갔다. 라토는 그녀를 보았다.

말투와 성격 때문에 가말의 지적 능력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역시 제 모국어를 쓸 때는 그녀도 전혀 사람이 달라 보였다.

걸어가던 가말은 문득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제게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중 아주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워서, 순간 가말마저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는 검은 신부복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한 템포 늦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가말을 빤히 보면서.

“쳐다보지 마. 영원교의 사제야.”

라토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가말은 라토를 돌아보았다.

“루아스인데?”

라토는 말했다.

“영원교의 사제는 루아스만 될 수 있어. 추종을 받는 상대이자 교단을 이끄는 중심 세력이지.”

“잘생겼어.”

가말은 어린아이가 사실을 말하듯이 아무 사심 없이 말했다. 라토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교 사제들은 원래 아름답기로 유명해. 안 그래도 사제 지원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게 얼굴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니까.”

“진짜?”

“진짜 그렇진 않겠지. 아무튼 워낙 수상한 구석이 많은 집단이니까 가까이 가지 마.”

“알았어.”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라토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

라토는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훑었다.

요새는 복잡하고 견고했다. 밖에서 침입자가 들어오기도 힘들었지만 한 번 들어오면 거의 나갈 수 없는 미로 구조였다.

게다가 이곳은 내부 사정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UFD(연합 사막 연방)의 땅이었다. MCTC로서도 섣불리 간섭할 수 없는.

대공은 이번에야말로 제 쌍둥이가 도망칠 수 없도록 최적의 감옥을 준비해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