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쭈니>
가말이 지내고 있는 방 앞에 도착하자 라토는 말했다.
“피곤하지? 들어가.”
첫날에는 걱정이 돼서 같은 방에서 잤지만, 아무래도 다 큰 남녀가 계속 같은 방에서 지내기는 무리여서 라토는 옆방에서 지내기로 한 상태였다.
옆방이라고 해도 한 방당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서 모퉁이 너머에 있었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뛰어올 수 있는 정도는 돼서 괜찮았다.
“응. 좀 잘게.”
가말은 여러모로 피곤했는지 기운 없이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옛 왕궁의 시녀처럼 영원교 여자 둘이 그 뒤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라토는 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다시 돌아보자, 어느새 허리를 편 영원교 여자 둘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는 얼굴로.
그러고는 그런 적 따위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거두고 가말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석연치 않았지만, 인간인 그들이 가말에게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 영원교도인들은 체취처럼 석연치 않은 느낌을 풍겼다.
하필 데리고 있어도 저런 사이비 교도들이라니,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소장님 들어오십니다.”
한 군인이 말하고 렉스가 들어왔다. 방 안에 둘러앉아있는 군인들이 모두 일어나려고 하자 일어나지 말라 손짓하고 바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벽 패널에 사진이 떴다. 레기온 요새를 찍은 위성사진과 설계도였다.
“요새는 원래 이 지방의 군벌이 지은 걸 사들여 증축한 겁니다.”
“레기온이 저런 성을 만들고 있는 동안 넋 놓고 있었다는 겁니까?”
휴 대위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중앙 정치의 공백이 심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아무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UFD(연합 사막 연방)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사막 부족들이 마침내 뜻을 모아 만든 연합국가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축적된 파벌 DNA가 단번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UFD 내부는 아직도 옛 아랍 태수(지방 제후) 시대처럼 극도로 혼란했다.
따라서 신중한 계산 없이는 공습할 수 없었다. 이미 상부에서는 당장 공습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우세하고 있었다.
렉스는 말했다.
“애초에 루아스의 침입도 염두에 두고 지어서 잠입하기 쉽지 않습니다.”
도영은 한 손으로 입가를 괴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새의 설계도를 그대로 머리에 전사하듯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훑었다.
저 선과 선이 연결된 어딘가에 가말이 있었다. 배 속의 아이와 함께.
“한 번 들어가면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방법밖엔 탈출로가 없습니다. 즉, 루아스로만 구성된 팀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렉스의 말에 휴 대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하지만 레기온 내부에도 루아스 전투원의 비율은 30%가량에 불과합니다. 거의 얼굴이 알려져있겠죠. 낯선 루아스들이 어슬렁거리면 바로 티가 날 겁니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죠. 들키기 전에.”
“그게 최선입니까?”
휴 대위의 회의적인 어조에도 렉스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렇죠. 불행히도 저희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습니다.”
***
제자님.
속삭임이 들렸다.
제자님.
귓가에서 빙글빙글 도는 속삭임이었다.
“제자님, 축복을.”
라토는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눈앞에 벌거벗은 여자가 둘 있었다. 둘 다 몸매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라토는 낯선 여자 둘이 제 침대 위에 알몸으로 앉아있는데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손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꼭 약을 먹은 것처럼.
뱀파이어에게는 인간의 약이 통하지 않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하지만 자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건 저녁 식사에 뭔지 모를 것을 섞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제자님, 축복을.”
여자 둘이 다시 말하며 다가왔다. 라토의 전신을 타고 파도가 일었다. 피가 울렁거렸다. 피의 점성이 달라진 것처럼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에 탄 건 최음제 종류였던 모양이다.
한 여자가 부드러운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위험할 정도로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라토는 이대로 휩쓸려 가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순간 머릿속에 섬광이 쳤다.
“마티.”
가말도 자신과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말에게도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몸을 지배하는 약 기운이 전부 순식간에 달아났다.
“제자….”
라토는 다가오는 여자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그러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아래로 내팽개쳐졌다.
힘 조절이 잘되지 않아서 생각보다 세게 밀어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자에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당장 문으로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잠깐 문설주를 짚었다가 겨우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꼭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여자들이 우르르 뒤따라왔다.
“제자님.”
“제자님.”
여자들은 주변을 맴돌며 새처럼 쫑알거렸다.
“진정하세요.”
“방으로 가세요.”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으로 팔을 잡고 옷을 끌어당겼다.
토끼 떼 같은 느낌이었다. 작고 부들거려서 힘을 줘서 내치는 데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인데 귀찮고, 라토로서는 달갑지 않은 뚜렷한 목적이 느껴졌다.
몸에 감도는 약 기운 때문에 특히 기분이 더 불쾌했다.
“놔.”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여자들은 듣지 않았다.
“제자님.”
“제자님.”
계속 쫑알거리면서 그를 감싸왔다. 그런데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라토는 겨우 모퉁이를 넘어서 가는 길이 천릿길 같았다.
그때 몸을 지탱하기 위해 뻗은 손바닥에 벽이 닿았다.
라토는 그대로 벽을 후려쳤다. 루아스의 힘을 막기 위해 특수 처리되어있는 벽이 천장까지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그러자마자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라토는 그들이 가말의 방을 지키는 경비병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밀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티!”
침대에 사람이 누웠던 흔적은 있었지만 가말이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배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대공!’
어떤 방식으로든 가말을 털끝이라도 건드렸다면 사지를 찢어버릴 것이다.
“마…!”
돌아보면서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라토, 무슨 일이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잠자리에 드는 차림을 한 가말은 오히려 라토의 모습에 놀란 얼굴이었다. 별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라토는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어?”
“화장실 다녀왔어.”
가말이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에 라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가말이 얼른 달려와 그를 살폈다.
“왜 그래?”
“미안해. 계속 자.”
라토는 일어나 문으로 갔다.
“라토.”
가말이 따라오며 불렀다. 라토는 돌아보고 말했다.
“악몽을 꿨어.”
그러자 가말이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같이 잘까?”
한때 이 부드러운 애정을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 이제 악몽 정도는 혼자 괜찮으니까.”
그리고 나가는 라토를 가말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여자들이 막아섰다.
“사도님.”
“잠깐, 라토가….”
“방에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라….”
가말이 목을 빼고 부르려고 했지만 라토는 이미 방을 나선 후였다.
반면 나머지 여자들은 옷자락을 흩날리며 분분히 라토를 따라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이 심상치 않았는지 이번에는 시끄럽게 불러대지 않았지만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은 분명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라토는 그대로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그러자 밖에서 여자들이 쿵쿵 문을 두드렸다.
제자님….
라토는 가운데 소파에 무너지듯이 앉았다. 그 상태로 한참 대답하지 않자 문밖에서 점차 기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일렁거리는 피는 잦아들지 않았다. 몸속에서 나쁜 피가 끓고 있었다.
라토는 기둥 너머로, 그의 방에 딸려있는 정원에 있는 수영장을 보았다. 물 아래서 조명이 비춰 푸른 물이 형광 안료가 들어있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옷을 입은 그대로 물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 머리까지 깊이 담갔다.
미지근한 물이 몸을 감싸왔다.
촤아악.
세찬 물소리와 함께 일어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몸을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네가 가임 혈통이라는 사실을 듣고 여자들이 거의 미쳐버렸지 뭐야.”
그때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계단 위에 라헬이 서있었다.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 방에라도 들어온 듯이 자연스러웠다.
느릿한 밤바람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실크 나이트가운이 물결쳤다. 그리고 잠자리에 있다가 나왔는지 처음으로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꺾일 듯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지구라트 같은 높은 계단 위에 서있는 모습이 마치 제물을 거두러 온 고대 종교의 잔인한 여신 같았다.
남자의 에고를 위협하는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있어도 그 눈빛은 누구라도 기죽이기에 충분했다.
“영원교 교리에 사도 외에 메시아를 출현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지.”
라헬은 말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아이를 임신해서 사도와 비슷한 존재라도 될 수 있다는 건 영원교의 여신도들에겐 생각만 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일이지.”
하이힐의 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물처럼 매끄러운 실크 가운은 바람결에 다리를 훑으며 흩어졌다가 다시 다리에 나른하게 감겨들었다.
긴 다리가 수영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라토 곁을 지나갔다.
“조심해. 언젠간 강간당할지도 모르니까.”
라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시선으로만 라헬의 발을 따랐다. 조명 때문에 환한 푸른 물이 넘실거렸다.
라헬은 계속 말했다.
“제 신앙을 위해서라면 철문도 뜯고 들어갈 여자들이거든.”
라토는 계단을 올라 수영장을 나왔다. 몸의 굴곡이 보일 정도로 딱 달라붙은 옷에 물이 촤르르 떨어져 내렸다.
“게다가 이투하에 대해서는 영원교 교리 외에는 모르는 저 무지한 여자들도 들어본 적 있거든.”
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라헬이 따라오며 말했다.
“이투하는 위대한 전사들이지. 일대일로 싸워서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들이고, 자기들의 대장을 위해서라면 배를 갈라 심장도 내놓는다는 높은 충성심을 지녔지. 그리고 그런 이투하의 대장, 라토 사타디.”
자신의 파트로네스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결사를 조직하고, 수십 년에 걸쳐서 테러리스트 두목에 대한 암살 작전을 주도해왔다.
“사도의 제자.”
라헬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말로 하면 클리엔테스지만. 어쨌든 그런 존재의 아이를 얻을 수 있다면 철문쯤이야 못 뜯을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라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