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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85화 (85/110)

85화<쭈니>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라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넌 말이 많아.”

그때 갑자기 라헬이 라토를 잡았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 라토가 그녀를 붙잡아 정원 한편에 있는 기둥에 밀어붙였다.

그사이에 라헬은 라토의 뒷목을 잡고 한쪽 다리를 그의 허리에 걸었다. 그녀의 검은 실크 나이트가운 옷자락이 크게 휘돌았다.

쿵.

세찬 부딪힘에 기둥이 살짝 진동했다.

서로의 동공 안쪽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밤바람이 둘을 훑고 지나갔다. 라헬이 낮게 내쉬는 숨이 입술에 느껴졌다.

향수를 들이마신 것 같은 숨이었다. 향기로웠으나 사치스럽고 지독하게 진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깊이 파인 가슴골은 한 번 들어갔다가는 나올 수 없는 지옥의 골짜기 같았다.

거의 검게 보일 정도로 짙어진 라토의 눈동자가 라헬을 담고 있었다. 곧고 단호한 성품이 들여다보이는, 깊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간만에 구미가 당겼다. 구릿빛 피부를 미끄러져 내리는 물방울을 핥고 싶어졌다.

라헬은 그에게 위험하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내 하렘에 들어오면 적어도 자다가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라토는 물러서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꺼져.”

잠깐 정적이 감돌고, 라헬은 손끝으로 라토의 어깨를 짚어 밀어내고 발을 내렸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면서 훗 웃었다.

“역시 동족 남자들은 살까지 뻣뻣해서 말이야.”

라헬의 가운 자락이 낮은 바람을 일으키며 라토를 훑고 따라갔다. 라헬은 방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라토는 욕실로 들어가 티셔츠를 벗으려다가 순간 혹시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다행히 욕실에 숨어있는 여자는 없었다.

라토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곳에서 목숨이 아니라 정조가 위험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쾅!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방금 라헬이 나간 문을 가말이 박차고 들어왔다.

“라토!”

가말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아마 가말이 제 방을 박차고 나오는 걸 막지 못한 사람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 같았다.

“괜찮아? 누가 무슨 짓 했어?”

가말은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들은 어머니처럼 사색이 되어 라토를 붙잡고 물었다.

아무래도 아까 라토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탓에 쫓아오려고 했는데 영원교 여자들과 경비병이 가지 못하게 말려서 실랑이를 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순간 가말은 라토가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사색이 되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

라토는 가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런데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 공기는 특정한 누군가가 나타날 때 사람들 사이에 미묘하게 감도는 시그니처에 가까웠다.

소란을 들었는지 쿠니스가 나타났다.

총수까지 나타나자 사방에 긴장감이 어린 침묵이 감돌았다.

쿠니스는 사방을 쭉 훑었다. 그리고 젖어있는 라토와 안절부절못하는 영원교 여자들을 보고 상황 파악을 끝냈는지 라토에게 말했다.

“실례했군.”

그리고 옆을 돌아보고, 그와 같이 온 영원교 신부에게 말했다.

“내 손님에게 무례를 저질렀군.”

신부는 라토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저희 아이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다 꺼져.”

“벌을 내리기 원한다면 어떤 벌이든 내려도 좋아. 잘못한 건 이 아이들이니까.”

쿠니스가 말했다. 그러자 영원교 여자들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양 고개를 조아렸다. 라토는 이게 21세기에 펼쳐지는 광경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제발 꺼져.”

쿠니스가 살짝 고갯짓하자 그제야 모두 방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가말은 라토의 손을 꽉 쥐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마지막으로 쿠니스가 그 모습을 보고 나갔다.

“마티야말로 괜찮아?”

가말은 멈칫했다.

제 두 쌍둥이 중 항상 더 섬세한 건 라토였다.

토라는 함께 있으면 즐겁고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해주었고, 라토는 더 깊이 마음을 알아준다는 느낌이었다.

토라의 밝고 건강한 면에 끌리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라토의 사색적이고 진지하면서도 섬세한 면에 끌리는 쪽도 있었다. 그들의 부인이었던 니카는 후자였던 것이다.

“괜찮지 않아.”

가말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영이 보고 싶어.”

라토가 가볍게 안아주자, 가말은 아들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었다. 라토는 작게 말했다.

“소령님은 오실 거야.”

“응.”

그러니까 그전에 가말의 가슴에 있는 폭탄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갑자기 가말이 몸을 떼더니 물었다.

“근데 정말 왜 이렇게 젖었어?”

라토는 가말을 놓아주고 뒤돌아가면서 말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

가말이 따라왔다.

“여자들이 덮쳤어?”

“아니야.”

라토는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 제 어머니와 그런 쪽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아들처럼. 하지만 가말은 듣지 않았다.

“다들 쳐다봐. 라토는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여기 여자애들은 안 돼.”

라토는 짧게 웃었다.

“마티 노릇하는 거야?”

“후회했어. 안 그래도 둘이 어렸을 때 내가 성교육을 해주지 않아서….”

“마티. TMI는 그만하자. 가서 자.”

그러면서 라토는 가말의 등을 살짝 밀었다. 정말 가말과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도님.”

라토의 방을 나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가말이 돌아보기도 전에 영원교 여자들이 부산하게 무릎을 꿇었다. 꼭 왕이라도 행차한 듯이.

뒤에는 한 백인 남자가 서있었다.

가운 같은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잠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온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만나뵙게 되어, 만세에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가말은 의아했다.

“넌….”

“영원교의 교주야.”

옆에 있는 쿠니스가 말했다. 그에 가말은 다시 백인 남자를 보았다.

교주는 생각보다 젊었다. 한 사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인상이 온화하고 얼굴빛이 맑았다.

딱히 교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을 거라고 예상해보지도 않았지만, 막연하게나마 기대했던 얼굴은 아니었다.

가말이 뭐라고 하려는데 쿠니스가 먼저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보지.”

교주는 쿠니스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별말 없이 가말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꼭 찾아주십시오.”

물론 가말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영원교를 가까이 할 생각 따위 없으니까.

그래서 더 말하지 않고 가말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라토가 박차고 들어왔을 때 그대로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이어서 영원교 여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탁.

방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가보겠다고는 했지만, 좀 크게 뒤척이는 소리만 내도 당장 올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가말은 지금 일단 제 방이라고 부르는 곳을 보았다.

‘천일야화’에나 나오는 왕궁처럼 호화롭고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들이 그린 것 같은 섬세한 무늬들이 신비로웠다.

매끈한 윤기가 감도는 시트로 덮인 침대 끝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음각 조각이 된 창문 밖에는 검은 바다가 넘실거렸다.

창가로 다가서 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자신이 동화에 나오는 탑에 갇힌 공주님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가말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솟구친 바람이 얼굴에 훅 몰아쳤다. 그럼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저 멀리 달빛에 비춰 윤기가 기름기처럼 보여 석유 같은 검은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

검은 머리가 검은 바닷물에서 조용히 솟아올랐다.

두 눈이 수경 너머로 어둠이 내려앉은 주변을 살폈다.

바위 절벽 위에 서있는 고대의 성채 같은 요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옛 성채와 달리 전기가 들어오는 요새는 관광지에 가면 볼 수 있는 유적처럼 불이 환했다.

반면 아래쪽 바다에는 어둠이 짙어 사방이 깜깜했다. 현대에도 인공조명이 없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진한 어둠이 그들의 모습을 숨겨주고 있었다.

뭍으로 다가갈수록 특수부대 특유의 검은 건식 잠수복을 입은 모습이 드러나고, 뒤로 검은 머리가 하나둘 더 솟아올라 따라왔다.

마치 지하의 강물에서 솟아오르는 지옥의 군대 같았다.

팀은 모두 뭍으로 올라섰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공기통에 연결된 마스크에서 스읍 스읍 소리가 났다.

도영이 잠수복 머리를 뒤로 벗어내자 이어서 팀원들도 잠수복을 벗었다. 모두 안에 검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다들 한마디 말없이 잠수복을 정리했다.

접근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루아스로서도 힘들 정도로 아주 먼 거리에서부터 헤엄쳐왔기 때문에 숨을 정리하기 위한 탓도 있었다.

준비를 끝내고 돌아보자 도영만 조금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영원교의 사제복이었다.

한 대원이 영원교에서 사용한다고 들은 원형 성호를 긋고 말했다.

“저 이교도들을 모두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도영은 손목 밴드의 시계를 조정했다.

“약속한 시간에 포인트에서 보죠.”

맥코이 하사는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군요.”

하지만 그 지옥에 가말이 있었다. 도영은 한시라도 더 빨리 그 지옥에 뛰어들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럼.”

도영과 팀은 헤어져서 암벽 사이로 난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보에 의하면 이쪽으로 길이….’

주의 깊게 소리를 듣다가 훌쩍 창가로 올라섰다. 그리고 복도 양옆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복도로 내려서자마자 늘 이곳에 살던 사람처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다보니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사제로 변장하고 있긴 하지만 어지간하면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았다.

도영은 재빨리 옆 복도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있자 기척이 모퉁이 너머로 지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쪽 복도 끝에서도 기척이 났다.

한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었다. 도영은 아무 일 없는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여자는 정말 시간을 거슬러온 것같이 긴 중세풍의 옷을 입고 있었다.

피부 아래서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 요새에 있는 인간은 딱 두 가지였다. 성에서 일하는 고용인이거나, 영원교 신도거나.

여자는 도영을 발견하고 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빤히 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도영은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어쨌든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여자는 영원교 신도라는 점.

흔히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이비 교도들과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점이 모호한, 윤기가 없이 짙은 눈.

둘이 거의 스쳐 지나갈 만큼 가까워졌다. 도영은 인사로 살짝 묵례하고 여자를 지나갔다. 다행히 여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도영은 안도했다.

“사제님.”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불렀다. 그에 도영은 태연한 척하며 돌아보았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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