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쭈니>
“사제님.”
여자가 갑자기 불렀다. 그에 도영은 태연한 척하며 돌아보았다.
“네.”
여자는 흔히 ‘퍼스널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공간이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 윤기가 없이 짙은 눈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인 기대를 담고 속삭였다.
“강론을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영혼을 빼앗긴 것같이 공허한 눈으로 싱긋 웃었다. 꼭 웃음의 의미를 모르는 인형이 웃는 걸 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영원교 신도들은 생명의 신비를 푼다면서 뱀파이어 사제와 잔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런 사이비가 또 없군.’
하지만 도영은 독실해 보이는 표정을 잃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내일 어디로 찾아뵈면 될까요?”
도영은 작전 브리핑에서 보았던 설계도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동관으로 오십시오.”
말을 들은 그제야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뱀파이어 테러리스트 조직과 인간 사이비교의 동거라, 꽤나 기괴한 조합이었다.
이런 곳에 가말과 제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도영은 일 초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 이 네오 소돔 같은 곳을 떠나고 싶었다.
고대의 느낌을 한껏 재현한 성채에서는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느껴졌다. 성채 구석구석에 빛이 닿지 않는 곳엔 유독 그늘이 짙었다.
도영은 복도를 유심히 살폈다.
가말은 이 요새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신원이 조금이라도 불분명한 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안쪽에.
“Bonjour.(안녕.)”
갑자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Je vous connais.(나 그쪽을 아는데.)”
상대는 영어 악센트가 잔뜩 섞인 어설픈 불어로 말하고는 기다렸다. 도영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거기엔 라헬이 서있었다. 짙은 웃음을 짓고.
수비대 대장 역할을 하고 있다더니 화려한 견장이 달린 검붉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엔 금줄을 늘어뜨린 모습이 역할 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자들을 거느린 라헬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아무리 이 요새가 크다지만 자기가 꽤 눈에 띈다는 걸 간과했나봐. 못 보던 멋진 사제님이 뭔가를 찾는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다니는데 여자들이 주목하지 않을 거 같아?”
바로 최종 보스 바로 아래 새끼 보스라니. 도영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영원교 사제들이 워낙 잘생기기로 유명하더라고.”
라헬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느낌이 좀 다르지.”
그 순간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시간 사이에서, 도영이 품에서 총을 꺼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라헬 뒤에 있던 남자들이 어느새 그를 감싸고 모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라헬은 싱긋 웃었다.
“저항하면 죽일 거야. 그럼 가말 씨를 만날 수 없지 않겠어?”
도영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에 한 남자가 그에게서 총을 빼앗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이만한 인원 앞에서는 저항하는 게 크게 의미 없었기 때문이다.
라헬은 남자에게서 도영의 총을 건네받아 한 번 보더니, 그의 턱에 대고는 정말 기쁜 듯이 웃었다.
“드디어 널 손에 넣었네.”
***
검은 안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잡혀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팔은 뒤로 꼭 중세 시대의 철제 구속구 같은 수갑에 묶여있고, 정수리 위에서 그를 비추고 있는 조명 빛이 느껴졌다.
주변 온도는 조금 서늘하고, 사방으로 희미한 벽돌 냄새가 났다.
또각….
하이힐 소리가 나고 눈에 쓰인 검은 안대가 벗겨졌다. 그리고 강한 빛이 도영의 눈을 때렸다.
그 빛 사이로 라헬이 다가서며 말했다.
“예전에도 멋있었지만 더 멋있어졌네.”
라헬은 싱긋 웃었다.
“너라면 동족이라도 괜찮을 거 같아. 아쉬워. 내가 임신만 할 수 있었어도 널 유혹하는 역할은 내 거였을 텐데 말이야.”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작전을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취향은 잘 간파했던 거 같네.”
라헬은 진하게 웃었다.
“난 정말 너 같은 남자들이 좋아. 너희들이 무너질 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거든.”
그러더니 ‘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네. 네가 너무 쉽게 잡혔어.”
도영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아마 둘 중 하나겠지. 내가 널 잡은 걸 보여주기 위해서 가말 씨를 불러내게 하든가, 아니면 내가 여기서 너와 노는 동안 다른 대원들이 가말 씨를 구해내든가.”
“작전을 잘 짜네. MCTC에 취직할 생각 없어?”
“헤드헌팅이야?”
“월급은 여기만큼 많이 주진 못하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몸 좋은 인간 남자들은 많아. 톰슨이라는 친구는 어때? 네 취향대로 아주 머리까지 근육으로 꽉 차있는 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지금쯤 기지에 있을 톰슨의 뒷골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라헬은 도영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그거 구미가 당기네.”
그리고 예전에 도영을 붙잡았을 때 그랬듯이 천천히 어깨를 쓸면서 말했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어떻게 딱 총수님이 자리를 비운 타이밍을 알았지?”
안 그래도 쿠니스는 일이 있어서 마침 요새를 비운 상태였다.
“그래? 그거 우연이네.”
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라헬은 싱긋 웃었다.
“배신자가 있구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라헬은 이미 도영의 말은 듣지 않았다.
“누굴까….”
마치 먹잇감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는 암컷 아나콘다처럼 섬뜩했다.
“한번 맞춰볼까?”
라헬은 뒤에서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사실 전부터 좀 수상한 점이 있었어. 정보가 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
확실한 건 아니었다. 꽤 교묘했기 때문이다.
“그날, 자기가 죽을 뻔했던 날. 그날도 약간 시간차가 있었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찾아왔지. 그 정도 정보를 흘릴 수 있으려면 아주 말단은 아닐 거야.”
라헬이 신고 있는 부츠의 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도영은 그 소리를 좇았다.
“지금도 이렇게 쉽게 잡혔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겠지. 자기를 탈출시켜줄 수 있거나, 내가 자리를 벗어나도록 할 수 있거나….”
라헬은 말을 끌었다.
“그러려면 꽤 위치가 있어야 할 거야.”
그러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감시카메라를.
“안 그래? 하심 말루프.”
감시카메라 너머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 하심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기가 차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를 보는 모두의 눈빛이 이상했다.
하심은 기가 차 외쳤다.
“설마 저 말을 믿는 건가? 내가 인간 따위를 도울 리가…!”
[데려와.]
이쪽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라헬이 말을 끊고 말했다.
***
경비병들이 끌고 온 하심의 어깨를 눌러 무릎을 꿇렸다. 하심은 제 앞에 서있는 라헬을 노려보았다.
“미쳤군.”
라헬은 팔을 들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기회를 줄게. 네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봐.”
“총수님이 이런 월권을 허락하실 거 같아?”
하심이 이를 갈았지만 라헬은 태연했다.
“다른 말은 하지 마. 네가 MCTC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라고 했어.”
“그딴 걸 어떻게 증명하라는…!”
하심이 언성을 높이며 일어나려고 하자 경비병들이 내리눌렀다. 라헬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해야 할 거야. 네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하심은 이를 꾹 물었다.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라헬 뒤로 포진해있는 경비병들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배신자에 대한 살의로.
“내가 인간을 도울 리가 없잖아?”
“그런 말로는 안 돼.”
라헬은 팔짱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럼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심.”
단호한 어조였다. 가슴 안쪽에서 깊이 올라오는, 묵직한 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난 말했어. 이건 ‘기회’라고.”
“난….”
그제야 하심은 심각함을 느낀 듯이 입을 열었다.
하심의 옆얼굴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순간이었다.
촥.
경비병들의 얼굴에 핏줄기가 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이라 경비병들도 움찔했다.
하심은 긴장한 표정 그대로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라헬은 ‘훗’ 하고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누구도 그녀가 언제 꺼냈는지 보지 못한 검을 흔들어 핏방울을 털어냈다. 하심 목의 단면에서 피가 용솟음치며 몸이 무너져 내렸다.
쿵.
앞으로 고꾸라진 몸 아래로 목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웅덩이가 천천히 퍼졌다. 라헬은 옆에서 건네는 천으로 칼을 별거 아니라는 듯 스윽 닦아냈다.
긴장한 표정이 그대로 굳어있는 하심의 머리 옆으로 피에 얼룩진 천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천은 웅덩이의 핏물을 흡수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영은 등골이 서늘했다.
아무리 같은 뱀파이어여도 한 합에 목을 잘라내는 힘과,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을 받을 권리 따위 무시하고 바로 목을 자르는 비정한 가슴에는 할 말이 없었다.
철퍽.
부츠가 웅덩이를 헤치고 들어와 도영 앞에 섰다.
“아무래도 신나서 그냥 이대로는 못 있겠네.”
라헬은 정말 약간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지독한 피 냄새 가운데 싱그럽게 웃는 눈매 사이에 빛나는 건, 피를 보고 흥분한 포식자의 눈이었다.
“역시 좋은 건 자랑을 해야지.”
***
가말은 책을 읽는 척하면서 옆을 살폈다.
문 앞에 영원교 여자들이 서있었다.
저 여자들을 제치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영원교 여자들은 모두 무전기를 차고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경고가 갈 것이다.
정말 한시도 감시가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는 이런 왕궁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레기온의 대원이었다.
그는 가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서 용건을 말했다.
“라헬 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그쪽이 오라고 해.”
가말은 뾰족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그 메두사 같은 여자한테는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대원은 흔들리지 않고 재차 말했다.
“보여드릴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쪽이 보여줄 만한 거엔 관심 없어.”
“오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하십니다.”
가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 말이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일단 이 방을 나가야 탈출로를 찾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가말은 일부러 귀찮다는 내색을 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어나 대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뒤로 경호원 넷과 영원교 여자 둘이 따라붙었다.
가말이 지내는 방이 있는 건물을 두른 벽의 문을 지나갈 때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기 도착한 이래 이 문을 나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원은 바깥을 네모 형태로 두르고 있는 건물 내부로 가말을 데려갔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 어떤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살짝 열려있는 안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가말은 어두운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코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피 냄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건 뱀파이어의 피 냄새였다. 하지만 뱀파이어를 신처럼 모시는 이곳에서 뱀파이어의 피 냄새가 날 일이….
내부는 깜깜했고, 빛 속에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바로 사제복을 입은 도영이었다.
가말은 눈을 크게 떴다.
“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