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쭈니>
“도영!”
이게 꿈은 아닐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말은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도영을 살피는데 발치에 핏물이 밟혔다.
“어디 다치….”
깜짝 놀라 말하다가 핏물이 번져오는 방향을 보고 목과 몸이 따로 노는 하심을 발견했다. 가말은 놀랐다.
반면 도영은 그녀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드레스를 입은 가말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순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낯선 모습이었지만 드레스를 입던 시대에서 막 걸어 나온 것처럼 제 것인 듯 어울렸다.
그래서 도영은 거의 멍하니 말했다.
“공주님 같네.”
하지만 가말은 파르르 눈을 떨었다.
“도영, 어떻게… 왜….”
“당연히 공주님을 구하러 오셨죠.”
라헬이 빛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도영의 어깨를 쓸면서 말했다.
“정말 용기가 대단하지 않나요? 보균 기술로 뱀파이어가 된 소령님이 붙잡히면 모르모트로는 끝나지 않을 걸 알면서 말이죠. 직접 구하러 오다니. 직접 나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거겠죠?”
갑자기 가말이 전에 없이 날카롭게 라헬의 손을 쳐냈다.
“누가 너한테 손대도 좋다고 했어?”
라헬은 피식 웃었다.
“힘.”
강하게 내뱉는 그 말을 따라, 두 레기온 대원이 도영에게 다가섰다.
“힘이 가능하게 해주죠.”
그 순간 가말이 라헬의 뺨을 때렸다.
도영은 놀랐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한 속도도 속도였지만, 가말이 저렇게 단호하게 누군가를 손찌검하고도 태연하다는 사실에.
라헬은 별말 없이 가말을 보았지만, 그 눈엔 살의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가말은 한 번 더 손을 날렸다. 이번에는 라헬이 팔을 잡았다.
그런데 순간 가말은 팔을 잡아 빼고 도리어 라헬의 팔을 잡았다.
“너 따윈 한입거리도 안 돼.”
“그럼 해보시죠.”
라헬은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팔을 뺄 수 없었다.
뱀파이어에게 혈통은 힘이었다. 그리고 그 혈통을 만드는 건 시간이었다.
견디면 견딜수록 더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무생물도 견디기 힘든 긴 시간이 제련한 육체는 라헬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타디 혈통은 성격이 무르다는, 뱀파이어로서는 최악의 단점이 있었지만 힘만으로는 대적할 상대가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도와달라고 해. 그게 네 ‘힘’이잖아.”
가말은 여봐란듯이 말했다. 라헬은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지만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반면 도영은 거의 감동하고 있었다.
라헬이 구두 높이까지 포함해서 가말보다 훨씬 큰데도 전혀 밀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했다.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게 가말의 매력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는 데 성공한 자식을 보는 것 같은 기분까지 밀려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라헬의 눈 밑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제 귀 뒤쪽을 짚고 말했다.
“어느 쪽으로 갔어?”
잠깐 심각한 눈으로 무전을 듣는가 싶더니 도영과 가말을 돌아보았다.
“그쪽 팀원들, 이 잡듯이 뒤졌는데 여태 잘도 숨어있었군.”
그러고는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방으로 모시고 소령한테서는 눈을 떼지 마.”
이내 라헬은 대원들 몇을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경비병들이 가말에게 다가와 말했다.
“가시죠.”
“…….”
가말이 움직이지 않자 한 경비병이 도영의 허벅지에 총구를 갖다 댔다.
“가지 않으시면 쏘겠습니다.”
나름 정중하게 말했지만 분명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쏠 것이다.
가말은 꾹 이를 물고 돌아섰다. 경비병들은 그 뒤로 따라붙었다.
방을 나가기 전 가말은 도영을 돌아보았다. 도영은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듯이 레기온 대원이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가말은 방을 나섰다.
밖은 방과 다른 세상처럼 빛이 환했다.
어쨌든 도영을 탈출시켜야 했다.
복도를 내려가면서 가말은 따라오는 경비병들을 흘긋 보았다. 여섯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처리하지 못해서 붙잡혀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가말은 꾹 주먹을 쥐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덜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놀라 돌아보자, 맨 뒤에 따라오던 경비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 심지어 가말까지 포함해 모두 루아스였는데도 기척을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뭐….”
갑자기 그림자가 뒤에서 경비병 하나를 확 덮치면서 목 아래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반응하려는 다른 레기온 대원을 벽으로 밀치고 가슴을 칼로 찔렀다.
다른 레기온 대원들은 반응할 수 없었다. 연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남자들이 단숨에 처치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남자들은 대체로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맥코이 하사, 휴 대위…. 모두 루아스 대원들이었지만 도영이 작전을 함께하던 TF 팀원들이었다.
벽에 박혀있는 레기온 대원은 부릅뜬 눈으로 상대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영이었다.
도영은 쓰러지는 레기온 대원을 무심하게 보았다. 가말으로서는 도영이 그런 차가운 눈으로 사물을 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말을 보는 눈은 그녀가 아는 도영이었다.
가말은 놀랐다.
“도…!”
하지만 도영은 어떤 감정을 보이기 전에 가말의 손을 잡았다.
“가자.”
도영은 일부러 라헬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그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 수 없으니까 자신을 바깥으로 나오게 하려고.
깨달은 가말은 울컥했다. 진짜로 도영이 눈앞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타다닥.
그때 이쪽으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팀원들은 바로 각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영도 물 흐르듯 가말을 끌고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깥 동향을 살폈다.
탁탁탁.
곧 바깥으로 지나가는 여러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맞닿아있는 도영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수많은 말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쳤지만 감정에 압도되어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키스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도영은 나직이 말했다.
“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가말은 목이 메어와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은 그대로 도영은 참담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가말은 도영을 살짝 떼어내고 올려다보았다.
“난 기뻐. 도영의 베이비가 여기 있어.”
도영은 얼굴이 흐려졌다.
“세상에, 가말. 미쳐버릴 거 같았어. 네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베이비 생긴 거 싫어?”
“그런 이야기겠어?”
도영이 기가 차단 듯이 말하자 가말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베이비가 생긴 건 기쁜 일이야. 난 베이비를 가질 수 없는 줄 알았어. 하지만 베이비가 찾아와줬어.”
도영도 아이가 생긴 게 왜 기쁘지 않았겠느냐마는, 왜 하필 지금이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가말이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데, 그가 지옥에 제 발로 뛰어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가말을 다시 만난 상황에서 문제는 오로지 이 순간 둘이 느긋하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도영은 가말의 볼을 감싸고 속삭였다.
“아까 섹시했어. 그 여자한테 한 방 날리는데.”
“정말?”
“응. 여왕님 같았어.”
“도영이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해.”
“나도 가끔은 해.”
가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지만 도영에게 키스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둘은 헤어져있는 동안 애타고 힘들었던 마음을 서로에게 토해내듯이 재차 입술을 겹쳤다.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말로 하지 않아도 숨으로, 서로를 만지는 뜨거운 손짓으로 정신없이 뿜어냈다.
도영이 입은 신부복의 옷깃이 풀려있어 어지럽게 얽히는 와중에 가말의 손이 거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옷깃이 더 풀어졌지만 둘은 그것도 모르고 멈추지 않았다.
겨우 둘은 떨어졌다. 숨이 거칠었다.
그때 살짝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따로 몸을 숨겼던 맥코이 하사가 말했다.
“재회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지옥에서 다시 재회하고 싶지 않으시면 어서 가시죠.”
사방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들킨 모양이었다.
“가자.”
도영이 다시 가말을 끌었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었다. 도영과 함께 있는 ‘집’에.
가말은 기쁨에 차 걸음을 내딛다가 깨달았다. 자신을 이 요새에 붙잡고 있는 검은 손의 존재를.
가슴에 있는 폭탄.
“잠깐….”
가말이 말하려고 했지만 모두 급박한 가운데 듣지 못했다.
“어느 쪽입니까?”
“동쪽입니다.”
팀원들은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
가말은 다시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복도 끝에 적들이 나타났다.
“이동합니다!”
휴 대위가 외쳤다.
팀원들은 쫓아오는 적들을 물리치며 달려갔다. 요새의 구조를 철저하게 숙지하고 온 듯이 길을 전혀 막힘없이 알고 있었다.
그때 모퉁이 너머로 기척이 났다. 그리고 라토와 다른 팀원들이 나타났다.
가말이 외쳤다.
“라토!”
“시간에 맞췄군.”
도영이 말했다.
도영이 가말을 구하는 사이에 다른 팀원들이 라토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소령님은 너무 늦었습니다.”
라토는 차갑게 말했다.
“미안하군.”
이쪽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지만 도영은 순순히 사과했다.
“저쪽이다!”
외치는 소리가 나면서 적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맥코이 하사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그래서 이제는?”
라토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옆에 봐.”
그러면서 도영은 옆으로 고갯짓했다. 창문 없이 뚫려있는 창이 보였다. 너머로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라토는 황당하단 듯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옆으로 도영이 가말의 손목을 잡고 지나갔다. 가말이 놀란 듯이 끌려가면서 뭐라고 하려고 했다.
“도영….”
지익.
도영이 허리에서 레펠을 잡아당겨 창틀에 걸었다.
“안 뛰고 뭐해?”
그러고는 가말의 허리를 낚아채자마자 뛰어내리기까지, 미처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가말은 눈을 크게 떴다. 허공에 내던져진 것 같은 순간, 울퉁불퉁한 돌 모양 그대로 경사진 절벽과 출렁이는 회색 바다가 단숨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레펠이 빠르게 늘어지면서 지이이이익 끌리는 소리가 나고, 가말의 드레스 자락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거세게 펄럭거렸다.
위에서 연이어 팀원들과 라토가 뛰어내렸다. 여러 개의 레펠이 늘어지며 긁히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찰나, 꼭 하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레펠에서 불길한 진동이 전해지면서 몸이 훅 꺼졌다. 위에서 레펠을 잘라버린 것이다.
발이 경사로에 닿을 때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왔지만 도영은 몸을 돌려 손으로 경사로를 긁으면서 미끄러져 내렸다. 돌들이 패여서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탁.
드디어 평평한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뛰어나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몰려온 적군들이 그들을 크게 반원형으로 감쌌다. 그리고 단숨에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도영의 팀은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어떡하죠?”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휴 대위가 물었다. 도영은 가말을 제 뒤로 감추며 말했다.
“기다리세요.”
“기다리라고요?”
휴 대위는 세상 황당한 소리를 들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 상황에요?”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서 도영도 한 걸음 물러나서, 살짝 설득력이 떨어졌다.
“기다려선 안 될 거 같은데요.”
맥코이 하사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도 없이 적군의 머리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