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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88화 (88/110)

88화<쭈니>

갑자기 소리도 없이 적군의 머리가 날아갔다.

홱-

모두가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요새 동쪽 건물 옥상에서 저격 소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가말로서는 낯선 얼굴이었다. 스코프 뒤에 얼굴이 가려져 정확하게 보이진 않아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었다.

적의 요새라는 특성상 저격수를 심기가 어려웠을 텐데…. 라고 가말이 생각하는데, 팀원들 모두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함께 온 팀원들도 그 존재를 몰랐던 모양이다.

저격수는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 대전차용으로도 쓸 수 있는 배럿 M82 계열 저격 소총의 총구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난사하기 시작했다. 레기온 대원들을 향해.

전차도 날려버리는 대구경 탄환들이 쏟아지자 레기온 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격수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비처럼 쏟아지는 총격 속에서 도영은 외쳤다.

“가죠!”

팀은 당장 달리기 시작했다. 저격수는 귀신같이 도영의 팀을 피해 적군들만 저격했다. 확실히 가공할 만한 실력이었다.

팀은 신속하게 아치를 지나 바깥으로 나섰다. 가말은 그제야 팀이 향하는 곳을 깨달았다.

‘이쪽은….’

절벽이었다. 하지만 요새 뒤쪽 절벽은 너무 높아서 루아스들도 뛰어내릴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가말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폭탄이 있을까?

이대로 도영을 따라가면 실제로 폭발할까?

절벽이 가까워질수록 폭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듯이 심장이 점점 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사실 쿠니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마침내 절벽 끝에 다다랐다.

대원들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가말은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어 멈추었다.

“난 같이 갈 수 없어.”

도영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가말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가슴에 있어, 폭탄이.”

“뭐?”

도영은 번뜩 가말의 가슴을 보았다. 남아있는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라토는 일부러 아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처 가말의 가슴에 있는 폭탄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구출하러 온 팀을 탈출시키기 위해.

단번에 도영의 눈이 사납게 일렁였다.

“그 녀석 짓이야?”

가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 가슴에 똑같은 게 있어. 하나가 폭발하면 나머지도 폭발해.”

MCTC는 적진에서 기폭 장치를 가진 폭탄이 영내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공 녀석이 가말의 몸속에 있는 폭탄을 섣불리 터뜨리진 않겠지만 MCTC는 그런 안일한 믿음을 가지지 않을 터였다.

가말은 도영을 밀면서 말했다.

“가. 난 안전해.”

도영은 아프도록 가말의 손목을 잡았다. 잿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가슴에 폭탄을 심어놨는데 안전하다고?”

“쿠… 옆에 있는 한 폭발하지 않아.”

“일곱! 가야 합니다!”

휴 대위가 외쳤다. 가말은 재차 도영을 밀었다.

“도영을 잡으면 죽일 거야. 제발 가.”

“일곱! 갑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휴 대위는 외치고 뛰었다.

가말은 라토를 돌아보고 말했다.

“라토, 너도 가.”

하지만 라토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를 여기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가.”

“시간 낭비하지 마. 난 마티 혼자 두고 가진 않으니까.”

도영은 라토에게 말했다.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도영은 타오르는 눈으로 가말을 보았다.

“내 아내와 아이를 이딴 곳에 두고 가야 하는 심정이 어떤지 알아?”

정말로, 가말을 미끼 역할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대공은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녀석이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가말은 애타는 눈빛으로 도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베이비는 내가 지킬게.”

도영은 가말의 얼굴을 감싸 쥐고 뜨겁게 키스했다.

돌아서며 그대로 다이빙했다. 가말은 다급하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영은 잿빛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이쪽으로 갔어!”

멀리서 레기온 대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영은 창틀에 걸쳐놓은 가방에 물건들을 재빨리 쑤셔 넣었다. 분해된 배럿 저격 소총과 흐물거리는 특수 분장 마스크였다.

눈까지 달린 모양새라 정말 사람의 얼굴 거죽을 벗겨놓은 것 같은 그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 스나이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익.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밖으로 밀었다. 가방은 절벽 아래로 추락해 물에 떨어졌다.

풍덩.

그리고 잠깐 물 위에서 흔들리다가 거품을 일으키며 잠겨 사라졌다.

타다닥.

때마침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어디야?!”

인영은 바다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모퉁이를 돌아가자마자 웅성거리는 인기척이 따라왔다.

인영은 모퉁이 너머에서 그 기척을 살피다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오직 요새의 그늘뿐이었다.

***

무리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파도가 절벽 밑동에 와서 부딪치는 소리가 철썩거리며 퍼졌다. 가말은 절벽에 뒤돌아 서있었다.

“가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가말은 돌아보았다.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무리의 선두에 서있는 쿠니스는 가말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가말은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쿠니스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넌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잖아. 이 녀석이 다른 건 뭐야?」

가말은 눈물이 윤기를 발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도영은 다정해. 날 죽이느니 자신이 죽을 거야.」

「그건 용서를 구했잖아.」

「난 널 용서했을 거야. 네가 죽인 게 나뿐이었다면.」

「그래.」

마침내 쿠니스는 불가피한 어떤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차분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이 갑자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꼭 죽여줄게.」

쿠니스가 고갯짓하자 레기온 대원들이 라토를 붙잡았다.

“라토!”

가말은 놀라서 당장 달려가려고 했지만 다른 대원들이 그녀를 잡았다. 가말은 쿠니스에게 외쳤다.

“라토를 놔줘!”

쿠니스는 가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라헬.”

라헬이 앞으로 나서면서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자 푸른 섬광이 퍼졌다. 불길해진 가말은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 마!”

쿠니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넌 내 룰을 어겼어.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지.”

라토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그 앞에 선 라헬은 회색 물보라 사이로 서늘하게 웃었다.

“비명을 질러도 돼.”

꼭 그러길 바란다는 투였다. 그렇지만 라토는 한쪽 입 끝을 끌어올려 웃었다.

“설마.”

라헬은 빙긋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고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만둬!”

가말은 목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하지만 라헬은 내려쳤다.

타악.

가말은 울부짖었다. 그 찰나에 지금까지 중 가장 센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다른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는 굉음을 퍼뜨렸다.

파도가 절벽 위에 비처럼 물을 흩뿌리고 바다로 돌아갔다. 그제야 대원들은 가말을 놓아주었다. 가말은 정신없이 달려갔다.

“라토! 라토-!”

라토는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붙잡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고통을 참는 턱에 근육이 넘실거렸다.

가말은 숨이 막혀왔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핏물이 흥건했다. 뱀파이어가 된 후로 피를 보고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진 적은 없었다.

어린 라토의 손끝에 박힌 가시에도 가슴이 아팠는데, 이건 실제로 누군가가 가슴을 할퀴어 찢어내는 것 같았다.

가말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피, 피를… 피를 마셔. 라토. 어서. 여기….”

“안 돼. 마티…. 아이가….”

라토가 만류했지만 가말이 정신없이 말하며 제 팔에 상처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레기온 대원들이 가말을 잡았다.

“놔!”

가말은 바로 노호를 터뜨렸다. 그 기세에 밀려 레기온 대원들이 놓으려는 듯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밀리지 마. 아니면 이 절벽에서 밀어버릴 테니까.”

쿠니스가 말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가말을 다시 붙잡았다. 가말은 쿠니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쿠니스는 별 변화가 없는 얼굴로 가말을 내려다보았다. 폭풍 같은 파도가 철썩 솟구쳐 올랐다.

「갈수록 날 잔인하게 만드는 건 너야.」

그러고는 라토를 보았다.

「남자들이 정말 널 좋아해. 안 그래? 네 말 한마디면 지옥의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것처럼 충성하지. 네 쌍둥이들도 단순히 네가 파트로네스여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닐 텐데, 확실히 너한테 남자를 홀리는 뭔가가 있기는 한가봐.」

그렇게 말하고 무심히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일종의 카리스마 같은 걸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쿠니스. 넌 이렇게까지 끔찍한 사람은 아니었어.」

가말은 말했다.

「네 안에 어떤 폭력성이 있었든 축제를 즐기고 아이들에게 웃어주던 네가 연기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3천 년이었어, 가말.」

쿠니스는 예전에 가말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어조에 변화는 없었다.

「3천 년이란 세월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 네가 그 섬에서 돌덩어리처럼 자고 있는 동안.」

가말은 떨리는 숨을 삼켰다.

“차라리 날 아프게 해. 라토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라토는 말할 것도 없었고, 가말도 그의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두 사람은 꼭 피의 진창에서 구른 것 같은 몰골이었다.

쿠니스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라토의 입가에 제 팔을 갖다 댔다. 라토는 바로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누가 네 피 따위를.”

피가 모자라 눈이 까맣게 패인 상태로도 라토는 가장 심한 저주를 내뱉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쿠니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네게 선택지가 있을 거 같아?”

“내 피를….”

가말이 나서려고 하자 쿠니스는 라토에게 말했다.

“배 속에 있는 이바노프만으로도 가말은 충분히 피가 모자라. 잘 알잖아?”

라토는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피가 모자란 뱀파이어는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어떤 것보다 피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마저 가말의 적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라토는 쿠니스의 손목을 깨물었다.

거의 짐승처럼 피를 빠는 모습을 쿠니스가 조용히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뱀파이어에게 피는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지.”

한참 뒤에 라토가 고개를 들자 눈에 선득거리는 빛이 지나갔다. 피부에도 기이한 광택이 흘렀고 입가에 핏자국이 번져있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살의와 범벅된 욕망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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