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89화 (89/110)

89화<쭈니>

라토가 고개를 들자 눈에 선득거리는 빛이 지나갔다. 피부에도 기이한 광택이 흘렀고 입가에 핏자국이 번져있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살의와 범벅된 욕망이 휘몰아쳤다.

그런 짐승 같은 눈을 한 주제에, 라토는 쿠니스의 팔을 집어 던지듯이 놓고 말했다.

“마티는 동물의 피를 마시면서도 미안하다고 우는 사람이야. 넌 마티의 쌍둥이가 아냐. 마티가 벗어버린 죄고, 더러운 피지.”

쿠니스는 일어섰다. 그러자 라헬이 손수건으로 상처가 난 팔을 지혈해주었다.

“라토…. 미안해. 마티가 미안해.”

가말은 눈물을 글썽이며 라토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라토는 다른 손으로 가말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괜찮아, 마티. 이런 건 아프지 않아.”

가말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꼭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쿠니스는 고갯짓했다.

“데려가.”

루아스들이 라토를 데려갔다.

“네가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어떤 걸 먼저 이용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야.”

쿠니스는 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아치를 통해 요새로 돌아가 복도를 걸어갔다.

타일에 구두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하심 녀석이 MCTC의 스파이였다고.”

어느 순간 쿠니스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네. 드페르 소령의 팀을 요새 내에 들였습니다.”

라헬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이래저래 믿을 녀석이 없군.”

쿠니스는 중얼거렸다.

***

도영을 선두로 팀이 헬기에서 내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작전을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은 늘 그랬지만 오늘은 유난히 공기가 무거웠다. 하지만 도영은 오히려 무심해 보일 정도로 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렉스는 말했다.

“생각보다 침착하군요.”

“이게 침착한 걸로 보인다면 너무 오래 사신 겁니다.”

돌아보는 눈에 살의가 번뜩였다. 뱀파이어의 눈빛이었다.

평소라면 상관모독죄로 영창이라도 보내졌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렉스는 이해했다. 그라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영은 꾹 이를 물었다. 턱에 근육이 넘실거렸다.

“가말의 손을 잡았는데, 제가 놓고 와야 했습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직접 겪지 않는 한 절대 모르실 겁니다.”

토라 역시 얼굴이 좋지 않았다.

“라토한테 심한 짓을 할 거야. 녀석들은 일부러 라토를 데리고 있는 거라고.”

분위기가 침울했다.

“머리를 썼군요. 가말과 한 몸으로 묶이면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일부러 폭탄을 심은 겁니다.”

렉스는 말했다.

“한동안 레기온의 감시가 심해져서 정보원 측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새 폭탄을 심은 거 같군요.”

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대공이 자신과 제 쌍둥이 가슴에 폭탄을 심는 상식 밖의 행동까지 할 거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심 말루프를 죽였습니다.”

그가 진짜 스파이 중 하나였는지 아니었는지 도영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심이 죽은 상황에서도 스파이 관련 정보는 특정 서클 밖으로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부인 그의 죽음은 상황을 재편할 것이다. 그건 여태까지 모은 정보들로 세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그쪽 일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렉스는 의외라는 눈으로 물었다.

“근데 저격수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한동안 정보원과 연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건 렉스로서도 알 수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도영은 알고 있었다.

도영은 라헬이 팀을 잡으러 나가고 가말까지 경비병들에게 끌려 나간 직후의 상황을 떠올렸다.

***

문이 열리고 레기온 대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들어왔다.

도영은 긴장했다. 하지만 레기온 대원 둘은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하심의 시신을 들어 밖으로 내갔다.

이어서 청소 도구를 든 여자 넷이 들어왔다. 모두 영원교인지 중세풍 옷을 입고 흰 두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저쪽부터 닦아.”

한 중년 여자의 진두지휘 아래 여자들은 대걸레로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기 시작했다.

정말 여기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과학 기술을 거부하는 러다이트들인 양 신식 기계는 전혀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깥과 연결되는 무전기를 빼고는.

여자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능숙한 손길로 바닥을 닦았다.

스윽, 스윽. 철퍽. 측, 츠즉.

공간에 그들이 대걸레질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도영은 시선으로 그 움직임을 따랐다.

한 젊은 여자가 도영 옆쪽으로 대걸레를 밀어오자 멀리 있는 중년 여자가 말했다.

“그쪽으로는 가지 마.”

그에 젊은 여자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나직한 속삭임이 도영의 귓가를 스쳤다.

“절벽에서 기다리세요. 도와드릴 겁니다.”

굳이 도영의 귓가에 다가오지 않고 입술도 달싹이지 않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기에 뱀파이어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 방에 뱀파이어는, 도영이 유일했다.

도영은 당장 여자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 젊은 여자는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들 속에 섞여 이미 방을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뒷모습이라서 누가 누구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넷이 거의 비슷해서 처음 들어왔을 때 얼굴을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탁.

여자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어딜 봐도 이 요새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도영을 절벽으로 보내려는 게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미 붙잡혀있는 그를 굳이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없었다.

사실 가말을 찾기 위해 일부러 붙잡혀있기는 해도, 레기온 측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그의 목을 벨 수도 있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요새 내에 MCTC의 정보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

“팀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정보원이 움직였나보군요.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렉스는 여전히 침울한 기색이 도는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대공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략가에 가깝죠. 그리고 아주 대범하죠.”

만약 MCTC에서 가말의 신병을 확보하게 되면 그 폭탄을 역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내한 것이다.

“가말을 무사히 구출하려면 대공을 생포해야 합니다.”

도영이 말하자 렉스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

쨍그랑.

금 그릇들이 날아가 굴렀다. 그리고 거기에 담겨있는 음식들도 엉망으로 흩어졌다. 딱 한입밖에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조리 내친 가말은 차갑게 말했다.

“맛없어.”

쿠니스는 숟가락을 든 자세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음식들을 보았다가 가말을 보았다. 같이 자리한 판데르발트도 숟가락을 들고 멈춘 채로 그녀를 보았다.

쿠니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떤 셰프들이 네 저녁을 만드는 줄 알아? 네가 섬에서 먹던 음식들에 비하면 이게 맛이 없을 수는 없어.”

“네 기준을 강요하지 마.”

둘은 매일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아닐 텐데 쿠니스는 낮이면 어딘가로 사라졌고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가말을 식사 자리에 앉혔다.

이제 가말의 배는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그녀의 외모 나이는 현대 기준으로는 아이를 가지기엔 어린 편이어서, 산모치고 앳된 얼굴로 만삭 직전의 배를 한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금수가 놓인 비단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꼭 아이를 가진 옛 콘스탄티노플의 황녀를 떠올리게 했다.

“라토를 불러줘.”

가말은 버릇없는 아가씨처럼 말했다. 그러자 쿠니스는 한숨을 삼키고 손짓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토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를 발견하자 가말은 얼굴이 밝아졌다.

“라토.”

다행히 잘렸던 라토의 팔은 재생이 된 상태였다. 그가 루아스여서 가장 다행인 점은 이럴 때일 것이다.

라토는 조용히 다가와 가말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말에게 팔을 내밀었다. 가말은 그 팔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임신을 한 뱀파이어는 피가 많이 필요했다. 아주 많이. 배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에게 영양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량으로서 피를 대체한 플로스도 태아가 자라기에 필요로 하는 피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더는 뱀파이어들이 피를 마시지 않는 세상에서도 임산부 뱀파이어만은 ‘진짜’ 피를 마셔야만 했다.

보통은 사냥을 하기 힘든 여자를 대신해서 그 피를 제공하는 건 파트너, 도영이어야 했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에 의해 헤어져있는 그들의 사정상 그 역할을 라토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가말은 고개를 들었다. 피를 마시고 황홀경에 젖은 눈동자가 무지갯빛으로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쿠니스는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왔다. 판데르발트가 무릎 위에서 천 냅킨을 집어 탁자에 내려놓고 따랐다.

영원교 신자들이 쿠니스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 요새에서 그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제 쌍둥이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판데르발트는 말했다.

“듣던 바와는 좀 다르시군요.”

“일부러 저러는 거야.”

1, 2년만 지나도 사람이 바뀌는데 아무리 세월의 흐름에 무던한 뱀파이어라고 해도 3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판데르발트로서는 이 정도면 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게 오히려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이만한 집착은 판데르발트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총수가 열여덟에서 나이를 먹는 게 멈췄어도 이 정도 얼굴에 이 권력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3천 년 전에는 그나마 근친상간에 대한 경계수위가 낮았을지도 모르지만, 현대에 와서는 단순한 터부를 넘어서 오랫동안 거부감이 축적되어 거의 밈(Meme)이 되었다.

총수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가말을 쫓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쉽게 인정할 수 없을 뿐.

하지만 판데르발트는 현명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쿠니스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가말이 그의 팔을 놓자 라토는 물었다.

“이러는 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뭐라도 해봐야지.”

그러더니 가말은 라토를 보고 얼굴이 흐려졌다.

“미안해.”

“괜찮아. 가끔 저 여자가 날 살찐 쥐처럼 쳐다보는 거만 참으면.”

“무서워. 너한테 무슨 짓을 하지 않을지.”

라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말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었다.

“탈출 방법을 찾고 있어.”

벌써 이곳에서 지낸 지 4개월이었다. 그리고 MCTC는 조용했다. 가끔은 그들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가말은 알 수 있었다. 해결 방법을 찾고 있는 거라고. 제 가슴에 있는 물건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구출하러 와봤자 예전과 같은 결과가 나올 뿐이었다.

가말은 라토를 보았다.

“조심해. 네가 안전한 게 가장 중요해.”

“응.”

그러고는 라토는 가말의 배를 보았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팔 할은 내가 자기를 키웠다는 건 알까?”

“알 거야.”

가말은 웃었다. 그나마 라토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다.

***

라토는 걸음을 멈추었다. 중정을 지나가는데 라헬이 기둥에 기대서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라헬이 고개를 돌려 라토를 발견하고는 서늘하게 웃었다.

“팔 하나로는 부족해?”

라토는 살짝 인상을 썼다.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자른 걸로 꽤 유세를 떠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