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90화 (90/110)

90화<쭈니>

라토는 살짝 인상을 썼다.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자른 걸로 꽤 유세를 떠는군.”

라헬은 빙긋이 웃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날 이길 거 같아서?”

“자신감이 대단하군.”

“마녀 리가.”

“……?”

라헬이 뜬금없는 이름을 말해서 라토는 의아하게 보았다. 그러자 라헬은 훗 웃었다.

“들어본 적 없어? 한때 클리엔테스가 열 명도 넘었던 리가 클랜의 수장이었지. 11세기에 태어나서 근 천 년을 살았어.”

라헬은 말하고 기둥에서 몸을 뗐다.

“내 어머니였어. 마녀라고 불렸고, 모두가 두려워했지. 어영부영 세월만 채운 네 파트로네스와는 질적으로 다르지.”

어쩌다 보니 라토의 주변에는 몇 천 년씩 산 유물급 뱀파이어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근 천 년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한 일이었다.

라토는 그를 지나쳐가는 라헬을 돌아보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라헬은 웃었다. 순간적으로 가볍고 경쾌하게 느껴질 만큼.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거 자체가 넌 틀렸어. 난 멋대로 구는 게 좋아. 군림하고 괴롭히는 게 내 천성이지. 네 그….”

그리고 손가락으로 라토를 향해 원형을 그리고 이죽거렸다.

“부족에선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난 시대에 여자는 착하고 조신한 게 미덕이었지. 하지만 난 이해가 되지 않았어. 난 전장에 나가고 싶은데 말이야. 적의 심장에 칼을 꽂고 머리통을 깨부숴버리는 게 꿈이었지.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도 있었고.”

라토는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라헬은 돌아서면서 그런 반응이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걸어갔다.

“난 도대체 너 같은 것들이 감염을 이기는 이유를 모르겠어. 흡혈귀는 흡혈귀다운 녀석들이 돼야지. 종의 수치야.”

라토는 그녀와 대화한 것만으로도 영혼이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저 여자는 희망이 없었다.

사실 남자 루아스들이 인간 여자와 관계할 때 더 조심해야 할 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동족 여자보다 인간 쪽을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동족 여자는 단순히 강한 걸 넘어서 대개 성향 자체가 저 여자 같았다.

성차별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본성을 가진 여성이 감염을 이기고 일어났을 때는, 시사하는 바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일단 루아스가 되면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도 사라지고, 루아스로서의 본능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인간일 때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달한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본성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뿐이지, 여자 루아스는 남자 루아스에게 이성이라기보다 동족이라는 인식이 더 컸다.

특히 저 여자는 경쟁자를 가차 없이 처리하면서 간부 자리까지 올라갔다. 피도, 눈물도 없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라헬 대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뱀파이어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 온 이후 라토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탈출 방법을 찾는 거였다.

곧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라헬이 가자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영원교 여자들이 분분히 흩어졌다.

라헬은 그들이 귀엽다는 듯이 훗 웃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러자 영원교 여자들이 다시 슬슬 원래 자리로 모여들었다.

‘저것도 문제고.’

영원교 여자들은 아직도 라토에게 뭔가 기대하고 있었다.

어떡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팍 쳤다. 돌아보자, 인상이 영 좋지 못한 레기온 대원 하나가 험악한 눈으로 그를 훑고 있었다.

“눈 뜨고 다녀, 이투하.”

그리고 누가 봐도 고의였던 게 분명한 말을 던지고 가버렸다.

그만이 아니라 주변에 호시탐탐 라토를 담가버리고 싶어 눈빛을 빛내는 레기온 대원들이 틈틈이 모습을 보였다.

무슨 발레 학교도 아니고 곧 있으면 신발에 압정이라도 넣을 기세였다.

***

“총수님.”

문이 열리고 라헬이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창가에 서있는 쿠니스는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라헬은 기다렸다. 총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쿠니스는 회색 바다를 지켜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가말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인간이었을 때는 없었던 깊은 분위기까지 있었지만, 오히려 옛날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성기능이 멈췄기 때문인지.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여자를 봐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성적인 충동이라든가 ‘살아있는 생물’로 여기는 어떤 마음도.

뱀파이어든 인간이든 그에게 타인이란 부릴 수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로 갈릴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점차 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얼어붙은 발끝에 불꽃을 되살릴 존재는 가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오직 그 기대만을 좇아 지금까지 버텼는데, 드디어 가말을 만났음에도 불꽃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말이 도영 드페르나 사타디 쌍둥이와 가진 연대감을 볼수록 몸이 얼어붙었다. 그건 자신과 가말이 가졌었고,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걸 목 졸라 죽인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가말을 죽인 직후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 그의 가슴속에 안도감이 싹텄다. 아무도 그날 밤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거라는 안도감.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졸렬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자신은 정말 가말을 사랑했을까?

3천 년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생각에 의문이 생겼다.

“‘널’ 보지 않았어?”

가말의 질문이 선득하게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쿠니스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동물을 죽이는 데 죄책감이 없었고, 교묘하게 남들을 제 뜻대로 조종하는 데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말은 정반대였다. 꼭 제게 어느 정도는 있었어야 할 선하고 착한 면을 모두 가지고 떨어져나간 덩어리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세상의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쿠니스는 스스로는 인간적인 측은지심은 추호도 느끼지 못하면서 가말이 그러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졌다. 마치 제 손이 그러는 걸 보는 것처럼.

결국 그는 가말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3천 년을 살면서 나름의 혜안을 얻은 가말이 본 게 정확했다. 그는 결국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결국 가말은 그의 일부라는 사실이었다.

가말이 원래 제 것이었던 무언가를 가져간 일부가 아니고서야, 그가 이렇게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듯이 부족함을 느낄 리 있겠는가?

가말을 대하는 감정이 남자로서의 순수한 애욕이 아니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하나였고, 끝까지 그럴 것이다.

“가말의 아이가 필요해.”

쿠니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라헬은 시선을 들었다.

“네, 로열 스타와 제대로 계약만 되면….”

“아니. 로열 스타에는 넘기지 않아.”

라헬은 의아하게 쿠니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키울 거야. 가말과 도영 드페르가 키우면 아이는 제 부모처럼 나약하고 공존이니 뭐니 하는 물러터진 뱀파이어가 되겠지. 내가 뱀파이어다운 뱀파이어로 키우면 되는 거야.”

쿠니스는 라헬을 돌아보았다.

“사타디와 이바노프 혈통의 순혈. 이보다 더 알맞은 레기온의 상징은 없지.”

조카.

맞는 말이었다. 가말의 배 속에 있는 건 자신의 조카였다. 클리엔테스 따위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혈통.

“가말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마. 아이를 낳을 때까지.”

“명심하겠습니다.”

쿠니스는 다시 몸을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승진 선물을 주지. 그 녀석.”

라토를 말한다는 건 바로 알아들었다.

“가져.”

라헬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몸을 숙여 깊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

“방을 옮기겠습니다.”

그건 통보였다.

“방을?”

라토는 물었다.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여자들은 그 어떤 감정의 실마리도 내보이지 않는 사무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네. 오늘부터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셨습니다.”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티는?”

“사도님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습니다.”

“그럼 내 대답은 알고 있겠군.”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총수님이 널 라헬 대장에게 줬어.”

판데르발트였다.

“여긴 프라이버시도 없나?”

그러고 라토는 물었다.

“줬다는 게 무슨 말이야?”

“라헬 대장의 하렘에 들어가게 된 거라고. 이번에는 목줄을 메서라도 데려갈 테니까 괜한 저항은 하지 마.”

“하렘?”

다른 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라토는 그 단어가 선뜻 와 닿지 않아 중얼거렸다. 그러자 판데르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투하의 대장으로서는 낯설겠지만 곧 적응될 거야. 그래도 라헬 대장의 하렘에 들어간 정도면 여기선 꽤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물론 살아있다면 말이야.”

그러더니 라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루아스니까 괜찮겠지. 인간은 거의 시신으로 실려나가니까.”

그러고는 돌아서 입구에 기다리고 있는 경비병들을 지나가면서 웃었다.

“진짜 사슬도 준비했어?”

라토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환장할 노릇이군.”

***

라헬 대장께서는 요새 내에 독립된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화려한 대문을 넘어가자 중정이 나오고 그 너머 복도를 따라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정말 옛 왕의 하렘에라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늬가 화려한 커튼이 한쪽으로 걷혀있는 너머에서 라헬이 가운인지 원피스인지 알 수 없는 흰 실크 옷을 입고 나왔다. 라헬이 이렇게 밝은색 옷을 입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어서 와. 이투하.”

라헬은 짙푸른 색의 벨벳 소파 쪽으로 고갯짓했다.

“앉아.”

라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 있는 남자들이 위협하듯이 다가섰다. 라토가 어깨너머로 뒤쪽을 보자 라헬이 말했다.

“앉는 게 좋을 거야.”

당장 다 때려 부수면서 뛰쳐나갈 게 아닌 한 라토는 쓸데없는 소란은 피우지 않기로 했다.

라토가 순순히 자리에 앉자 라헬이 물었다.

“마실 걸 줄까?”

“됐어.”

밖에 있는 경비병들이 들을 정도로 확실한 거절이었건만 라헬은 라토의 건너편에 앉아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 둘이 양쪽에서 같이 들어야 하는 거대한 은쟁반을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치 은으로 된 섬 같은 느낌이었다.

순은 쟁반 위에는 커다란 티 주전자, 세공이 섬세한 은으로 된 잔, 6단 트레이에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에게 진상되었을 법한 각종 쿠키와 과자들이 올려져있었다.

중동 계열 문화에서 손님을 위해 내놓는 웰컴 티도 이 정도면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인 하나가 티를 준비하는 동안 라헬은 말했다.

“들었겠지만 총수님께서 널 나한테 줬어. 넌 이제부터 내 하렘에서 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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