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91화 (91/110)

91화<쭈니>

하인 하나가 티를 준비하는 동안 라헬은 말했다.

“들었겠지만 총수님께서 널 나한테 줬어. 넌 이제부터 내 하렘에서 살게 될 거야.”

하인이 찻잔을 각자 앞에 내려놓자 라토는 그걸 무심히 봤다가 라헬을 보았다.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누구도 날 누구한테 줄 순 없어.”

“미안하지만 여기선 가능해. 모두 누군가의 소유지. 그러지 않으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야. 네 스스로 간부가 되는 거.”

그러면서 라헬은 뻐기듯이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꽤 힘들었지.”

그 자랑스러운 말투에는 미안하게도 라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깨끗하군. 소돔과 고모라 같을 줄 알았는데.”

어떤 걸 봐도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데 평범한 방 같았다. 적어도 벌거벗은 남자들이 목줄에 메여있진 않다는 의미에서.

“치웠어. 새 선물을 받은 기념으로.”

라헬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리고 싱긋 웃고는 발을 내리고 일어섰다.

“곧 다시 더럽혀지겠지.”

그러더니 라토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티를 마시고 싶지 않다면 바로 시작하자고.”

라토는 티가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 싶었다. 지금이라도 마신다고 하면 안 될까 생각하는데 라헬이 앞에 와 섰다.

“이투하. 네 명성만큼 날 상대로도 오래 버티나 볼까?”

라헬은 가운을 잡아 벌렸다. 풀세트 속옷을 입은 몸이 드러났다. 순결해 보이는 흰색이었지만 가터벨트까지 한, 지나치게 제대로 된 차림이라 오히려 무서웠다.

원피스지만 허리 부분이 다 드러나는 정교한 레이스였고 그나마도 가슴 가운데가 거의 배까지 V자로 깊이 패여있었다.

몇 걸음 물러나 있는 하인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을 포함해 보고 있는 눈이 많았다. 하지만 라헬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무대 위에 선 란제리 모델처럼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라토는 순간 물러날 뻔했던 자신을 다잡고-앉아있어서 물러날 곳도 없었지만- 태연히 말했다.

“바깥 기준으로 이건 강간이야.”

“여기선 내가 법이야. 심지어 총수님도 하렘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지.”

라헬이 팔을 내리자 매끄러운 가운이 미끄러져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서워?”

라헬은 바닥에 고인 가운을 넘어 하이힐을 부딪치며 다가왔다.

“이런 차림을 한 여자가 무섭기는 쉽지 않은데.”

하지만 불행히도 그랬다.

그 말에 라헬은 가볍게 웃고는 라토의 무릎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마치 스트립쇼 쇼걸이 총각 파티를 하는 남자의 무릎에 앉듯이 가볍게, 흥에 겨워.

“동족 남자와 하는 건 오랜만인데 얼마나 할 수 있어?”

그러면서 라토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날 만족시켜줘야 할 거야. 동족 남자와 할 때 유일한 장점은 그런 거뿐이니까.”

“30초면 끝나.”

라토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하지만 라헬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의외로 웃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그래서 오히려 무서웠지만.

“그럼 아예 못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라토는 미간을 얼핏 찡그렸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라헬이 눈을 내리깔며 다가왔다. 라토는 본능적으로 라헬의 팔뚝을 잡아 막았다.

라헬은 눈을 치켜뜨며 라토를 보았다. 그리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 입술로 나직이 속삭였다.

“이투하.”

라토는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됐다.

가말의 가슴에 폭탄이 있는 한 그들은 탈출할 수 없었다.

이 여자 옆이라면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 발로 순순히 온 거였다. 하지만 혹을 떼려다 붙인 짝이었다.

쾅.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잠깐, 갑자기 이러시면….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에 라헬은 아치 너머를 쳐다보았다.

“주인님.”

그때 하인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두려워하며 입구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라헬은 라토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물었다. 하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겨우 말했다.

“가말 님께서….”

라헬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라토는 속으로 안도했다.

하인들의 만류에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말은 라헬이 가운만 걸친 속옷 차림으로 나오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라토를 놔줘.”

라헬은 그 차림 그대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투하는 제가 받은 선물입니다.”

가말은 애써 화를 참고 말했다.

“아무도 라토를 선물로 줄 순 없어.”

“이곳의 왕은 할 수 있죠.”

“쿠니스는 왕이 아니야.”

가말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왕은 네 눈앞에 있어.”

라헬은 저도 모르게 가말의 배를 보았다.

“그분은 사타디의 왕이죠. 저희들의 왕이 되려면 배 속에서 나와 모두를 굴복시키고 자신이 알파임을 스스로 입증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타디와 이바노프 혈통이 굳이 입증을 해야 해?”

가말은 지지 않았다.

“그분은 저희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태어나는 분이니까요.”

라헬은 예의는 잃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그 말에는 일말의 예의도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가말도 알고, 듣는 사람도 모두 알았다.

두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라토는 내 아들이야.”

“소령과 이투하 중에 하나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욕심이 많으시군요.”

그때 아까 라헬이 들어왔던 입구 너머로 라토가 나타났다.

“마티.”

“라토!”

가말은 라토에게 달려갔다. 라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마티. 이런 곳엔 오지 마.”

“이런 곳이라니….”

뒤에서 라헬이 기가 차 말했지만 라토와 가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안 다쳤어?”

가말은 다급히 라토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아직 두 발로 서있긴 해.”

가말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고 라토는 농담할 타이밍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말은 눈물을 흘렸다.

“마티.”

라토가 애끓는 목소리로 부르며 가말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울어.”

“나빠.”

가말은 라헬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너무 나빠.”

라헬은 뭔가 심사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꽤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했는데요.”

가말은 울컥해 외쳤다.

“넌 라토를 아프게 했어. 도영한테도 접접거리고…!”

“마티, 집적.”

라토가 작게 말을 고쳐주었다. 가말은 ‘응?’ 하고 물으며 라토를 보았다. 라헬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일 기분 나쁜 건 머리까지 근육으로 된 동족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징징거리는 동족 여자가 있었군요.”

라헬은 들으란 듯이 말하고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가말은 징징거린다는 단어가 기막혔지만 라헬이 바로 이어 말했기 때문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어쨌든 저는 공식적으로 이투하를 받았고 더 할 말은 없습니다. 항의할 게 있다면 찾아올 곳을 잘못 찾으셨군요. 나가는 길은 하인들이 안내해줄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고는 라헬은 서늘하게 라토를 보았다.

“기분 잡쳤군. 오늘은 아무 데나 가서 자도록 해.”

그리고 가운을 흩날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라토는 가말을 돌아보았다.

“마티, 괜찮아. 일단 가.”

“하지만….”

“나한텐 오히려 여기가 안전할 수도 있어. 적어도 저 여자 궁이라고 하는 여기 있으면 다른 녀석들은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호시탐탐 라토를 노리는 녀석들이 많은 건 가말도 알았다.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라토와 토라가 이투하 같은 걸 만들었고, 레기온 내에 적이 많아졌으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그런 거 아니니까.”

가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라토는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아?”

“알아.”

가말은 주저하다가 물었다.

“정말 괜찮아?”

“괜찮아. 어서.”

“저 여자가 뭐 하려고 하면 바로 달려와. 알았지?”

결국 가말은 신신당부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가말은 돌아서려다가 다시 라토를 보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라토는 의아했다.

“그런 얼굴?”

“너한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는 얼굴.”

가말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라토의 뺨을 감쌌다.

“너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살 수 없어.”

라토는 다정한 손을 잡았다.

“그런 생각 안 해.”

***

‘큰일이다.’

캐시는 생각했다.

캐시 브루어. 그녀는 MCTC 내 정보활동국 산하 SAU 소속의 대위이자 특수공작원으로, 최근 불리는 이름은 라헬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매우.

‘이투하 대장을 진짜 나한테 주면 어떡해?’

대공이 정말 라헬에게 라토를 주는 시나리오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물론 제게 주면 얌전하게 만들어주겠노라 떵떵거리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오히려 이투하의 대장처럼 이용 가치가 있는 인질을 간부의 노리개 따위로 주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허세를 부린 거였다.

하지만 라토를 받은 한 그를 어떻게든 라헬의 ‘명성’에 맞도록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의심을 살 테니까.

지금까지 캐시는 인질들을 장난감이라는 명목으로 데려와 놀다가 죽여버린 척하면서 바깥으로 빼냈다.

하심은 그런 제 행적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도영이 좋은 기회를 준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떨어지는 건 캐시 자신이 됐을 것이다.

제 방에 돌아온 캐시는 여전히 풀세트 속옷을 입은 채로 골치가 아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지만 이투하 대장님은 그런 식으로 빼낼 수도 없잖아.’

라토는 워낙 중요한 인질이라서 혹시 죽는다 해도 시신도 바깥으로 버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시신을 박제해서 어딘가에 써먹어도 써먹으려 할 것이다.

“주인님.”

그때 집사장이 황금 장식이 화려한 입구에 나타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야?”

캐시는 얼른 라헬의 가면을 쓰고 불쾌하단 얼굴로 돌아보았다. 집사장은 고개를 조아리고 물었다.

“이투하의 대장을 준비해둔 방으로 안내할까요?”

“그러려고 준비해둔 거 아냐?”

집사장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 사라졌다. 캐시는 집사장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소파에 앉았다.

방은 숨 막히도록 사치스러웠다. 이 요새는 이 지방의 모든 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캐시는 금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도로 테이블 위에 던졌다.

“버릇 됐잖아.”

개인적으로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라헬 역할을 하면서부터 캐릭터 설정상 피우기 시작했지만.

작전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레기온의 전신인 SN이 존재할 때부터.

외부에서 암살자를 들여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MCTC는 아예 암살자를 내부에서 키우자는 작전을 짰다.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아예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캐시는 자신이 MCTC의 특수공작원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테러리스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숨 쉬었다.

10년이 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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