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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92화 (92/110)

92화<쭈니>

캐시는 SN 내에 알력 다툼이 심하다는 점을 이용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척하면서 수많은 HVT(High Value Target, 고가치 표적. 즉 적군의 중요인물)들을 처리해왔다.

어찌나 열심히 일했는지, 어느새 간부 자리까지 올라왔다.

원래 총사령부는 캐시가 이렇게까지 높이 올라가길 바라지 않았다. 간부가 된다는 건 필연적으로 눈에 띈다는 의미고, 타국 정부들이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일이 끝나고 한동안은 스파이 일을 쉬어야 할 정도였다.

‘레기온이 생각보다 인력난을 겪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캐시는 기가 막혀 생각했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부르고뉴의 와인을 닮은, 묵직한 버건디색 벨벳 커튼이 걸려있는 창 너머로 중정이 보였다. 무장한 병력들이 무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애초에 스파이로 잠입할 때 캐시의 역할은 최대한 많은 HVT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심을 처리한 것처럼.

하지만 생각보다 캐시가 실적을 내자 상부는 계획을 바꾸었다.

“총사령부는 자네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네. ‘파로스의 등대’, 할 수 있겠나?”

작전명 ‘파로스의 등대’, 그리고 작전의 목표는 ‘레기온의 완전한 해체’였다. 그 수괴인 대공을 암살함으로써.

캐시는 할 수 있었다. 아니, 해내고야 말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런데 갑자기 라토가 등장한 것이다.

라토를 여느 인질들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이투하의 대장이라는 위치 때문만이 아니라, 캐시는 그를 꽤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라토를 직접 대면한 건 그가 가말과 함께 미스터 리를 만나러 왔을 때가 처음이었다.

차려입은 가말을 에스코트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라토를 보는 순간 캐시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내불 뻔했다.

짙은 피부, 짙은 눈동자, 짙은 분위기.

아니, 어느 여자가 이런 존재를 넋을 놓고 보지 않을까?

하지만 캐시에겐 라토를 괴롭히는 역할만 주어졌고, 그의 팔을 잘라야 했을 때는 정말 마뜩잖았다.

‘마뜩잖다’라는 표현은 캐시가 한 행동에 비해 다소 약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10년간 이 복마전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 레기온의 해체를 위해서.

예전에 토라와 자인이 붙잡혔다가 탈출할 때 레기온 대원들의 무전이 먹통이 되도록 만든 사람?

당연히 캐시였다.

며칠 전 도영과 그 팀을 도와준 스나이퍼?

그녀 외에 누가 있었겠는가?

특히 도영의 팀을 도와준 일은 정말 라헬 역할을 걸고 한 도박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상부에서 훈장이라도 줘야 하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자칫했으면 정체가 들킬 뻔했다.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때 바깥에서 집사장이 라토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캐시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라토는 변수였다. 그 변수가 본의 아니게 작전을 망치는 일이 없기를, 캐시는 바랄 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라토는 식당에 앉아있었다.

하인들이-캐시 본인으로서는 이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청동기 시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는 당연한 호칭이었다.- 깨워서 그녀가 나오기 전에 준비시켜뒀을 것이다.

“잘 잤어?”

캐시는 라헬의 가면을 쓰고 특유의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라토는 예상대로 차갑게 반응했다.

“잘 자길 바랐다는 게 놀랍군.”

라토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아아, 라토는 정말 아름다웠다.

뱀파이어 특유의 얼음장 같은 아름다움에 숲의 정령 같은 느낌이 섞여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원교 사제들의 아름답지만 박제처럼 차갑게 응고된 느낌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사실 라헬 역할을 하면서 남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실제로 즐거운 적은 없었지만, 라토만큼은 제게 배당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귀여워해주는 일만은 꽤 즐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인질로서 라토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사이코 변태성욕자 테러리스트 뱀파이어 역할을 하면서 그런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견디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라토가 단순한 ‘귀요미’가 아니라는 건 캐시도 잘 알고 있었다.

캐시는 라토를 존경했다. 역경을 견디는 태도, 적들에게 숙이지 않는 용기, 제 파트로네스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좋은 뱀파이어나 좋은 인간을 떠나서, 좋은 사람이었다.

“자네.”

그때 라토 뒤에 서있는 집사장이 그의 어깨를 지그시 쥐었다.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캐시는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버려둬. 이투하는 팔딱팔딱한 맛이니까.”

“내 이름은 이투하가 아냐.”

라토의 말에 캐시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름으로 불러줄까, 다정하게? 라토?”

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치워.”

캐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라토는 불쾌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아침은 따로 주고 굳이 여기에 앉혀둔 이유가 뭐야?”

“그거야 당연하지. 노예는 주인의 즐거움이 돼야 하니까. 영광으로 여겨. 그것도 감상하는 맛이 있는 녀석들이나 그렇게 하니까.”

“그 ‘녀석들’ 자체가 보이지 않는데?”

캐시는 차갑게 웃었다.

“난 같은 노예들을 오래 하렘에 두지 않아.”

모두 바깥으로 빼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한 녀석이라도 놔뒀다가 라토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내보냈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라토는 대왕지네라도 본 표정이었다.

캐시는 귀요미에게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한다는 게 슬펐지만 오해를 사는 데는 이골이 났다. 스파이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일이 있어. 늦게 올 거야.”

일부러 애써 일을 잡았다. 라토를 오래 마주 보고 있는 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롭다고 혼자 하는 건 안 돼.”

“미쳤군.”

캐시는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라토도 그만 가보려고 일어나자 집사장이 말했다.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야. 주인님 말씀에 복종하는 게 좋아.”

라토는 집사장을 보았다.

“이투하는 아무한테도 복종하지 않아.”

마치 정언 명령처럼 뿜어져 나오는 말에 집사장은 순간 압도된 얼굴이었다. 그러자 라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굽히지 않는 뒷모습을 보면서 집사장은 혀를 내찼다.

“저 친구 죽어나가겠군.”

멀어지면서 캐시는 그 말을 들었다.

집사장은 판데르발트가 심어놓은 녀석이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밖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라토를 어떤 식으로든 하지 않으면 바로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안 그래도 회랑을 걸어가는데 간부 하나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이투하의 대장을 선물로 받았다면서? 하필 너한테 가다니 불쌍하게 됐군.”

그리고 회의에 들어가자 쿠니스가 물었다.

“어때? 그 녀석은.”

“자기 입장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말 씨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용한 편입니다.”

캐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뺀질거리는 나머지 쌍둥이 녀석보다 이쪽이 더 골치 아파. 말이 통하질 않거든.”

‘토라 사타디도 혀가 유연할 뿐 이쪽 말이 통할 거 같진 않은데.’

당연히 캐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얌전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다고 했지?”

쿠니스는 물었다.

“네.”

쿠니스는 캐시를 보았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비해 삼천 년이나 묵은 뱀파이어답게 눈빛에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광채가 있었다.

“기대하지.”

***

라토는 중정의 연못가에 서있었다. 그를 보면서 캐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사랑하게 됐다는 설정으로 갈까?’

그렇다면 라토를 심하게 대하지 않는 것도 이해될 테니까. 사이코 뱀파이어의 가슴에도 순정 하나쯤은 남아있는 설정도 괜찮을 것이다.

다음 순간 캐시는 한숨을 삼켰다.

‘아니, 그럼 일을 맡길 간부로는 믿지 않겠지.’

나약한 여성성을 보여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물고 뜯을 것이다.

라헬은 잔인한 흡혈귀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테러리스트였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무자비한 존재였다. 그래서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목표는 대공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쩌면 대공은 라헬을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성경에 나오는 뱀보다도 기민하고 영악한 녀석이니까, 그녀가 라토를 데리고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셈인지도 몰랐다.

“뭐야?”

저도 모르게 생각하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라토가 어느새 돌아보고 마뜩찮게 물었다.

캐시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얼른 라헬의 가면을 쓰고 하이힐을 부딪치며 다가갔다.

“누가 널 중정까지 나오도록 허락했어?”

“개도 그 정도 자유는 있을 텐데.”

“넌 개가 아냐. 노예지.”

라토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 싶어 캐시를 경멸하는 시선을 쏘고 돌아섰다.

“실례했군.”

캐시는 멀어지는 등을 보다가 말했다.

“이투하,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거절할 수는 있는 건가?”

캐시는 빙긋이 웃었다.

“네가 뭔지 자각하게 되는 날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지?”

라토는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아 돌아 걸어갔다. 캐시는 담배를 꺼내 물면서 생각했다.

‘미안, 대장님.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해줄게.’

결국 라토가 약간 희생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이 끝나고 나면 MCTC에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와 정신 상담은 지원해줄 테니까.

갑자기 캐시는 자신이 버릇처럼 피우고 있는 담배를 보고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난 나중에 금연클리닉이나 가야겠군.’

***

“주인님.”

집사장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식당으로 안내받아 온 라토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저녁 식사라니 무슨 속셈이지?”

라토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물었다. 캐시는 피식 웃었다.

“긴장하지 마. 누구에게나 저녁 식사를 같이할 사람은 필요하잖아?”

옛날 영주들이 쓸 법한 긴 테이블 옆에 서있는 캐시는 와인 병의 아래쪽을 잡고 직접 와인을 따랐다.

오늘 그녀는 검은 정장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마 가운데 긴 슬릿이 들어가 다리의 노출도는 짧은 치마에 못지않았지만 그나마 위쪽은 얌전했다.

묵직한 윤기가 도는 최고급 흑단나무 테이블에는 그 테이블에 어울리는 만찬이 차려져있었고, 메노라(정금 촛대. 이스라엘의 상징)보다 가지 숫자가 많은 금 촛대들 위에 촛불들이 조용히 타올랐다.

캐시는 와인 병의 입구를 흰 천으로 닦아 내려놓았다.

역시 강철 느낌이 나는 흑단나무로 만들어졌고 푹신한 벨벳 쿠션이 놓인, 등받이가 높아 왕좌 같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라토도 별말 없이 앉았다.

곧 제복을 입은 남자가 대구로 요리한 전식을 가져다주었다. 금장이 둘러진 식기 위에 고급 레스토랑에서처럼 예술적인 플레이팅이 되어있었다.

두 번째 전식이 나올 때쯤 캐시는 오크 향이 진하게 감도는 라리오하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여기서 지내는 건 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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