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쭈니>
“여기서 지내는 건 좀 어때?”
캐시는 정말 대화를 해보려는 것처럼 물었다.
“끔찍해.”
질문한 게 무안할 정도로 라토는 딱 잘랐다. 음식에는 죄는 없다고 생각해서 식사를 하긴 하지만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캐시는 조각이 세밀한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가락으로 턱을 괴었다.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불편한 점은 없을 텐데? 가말 씨와도 면회하게 해주고. 이 정도면 아주 너그러운 주인 아냐?”
“여왕 거미의 둥지에서 편할 거라는 기대 자체가 헛된 거지.”
캐시는 웃었다.
“여왕 거미라,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네.”
“다 생각만 했겠지.”
“다들 생각만 한 이유가 있을 텐데.”
캐시는 진하게 웃으며 말했고, 라토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이어서 두 번째 전식이 나오고, 캐시는 다시 물었다.
“이투하에 대한 아이디어는 누가 먼저 낸 거야? 너, 아니면 그 섹시한 쌍둥이 쪽?”
알다시피 캐시가 쌍둥이 중 먼저 만난 쪽은 토라였다. 그라는 존재에 눈이 확 뜨였지만 불행히도 이미 여자가 있었다.
자기들끼리만 모를 뿐이지.
최근에는 사귀게 된 것 같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말이다.
반면 라토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들어 캐시를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캐시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뭔가 파보려고 이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정보력을 무시하는 거야. 이투하에 대해서는 딱히 다른 정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누굴 보호하고 있는지는 몰랐지.”
가말을 의미했다.
캐시는 ‘흠’ 소리를 냈다.
“할 말이 없게 하네. 하지만 저녁 식사 중이잖아. 체하려고 하니까 그 비장한 얼굴 좀 어떡할 수 없어?”
“그럼 먼저 일어나지.”
라토는 정말 탁자를 짚으며 반쯤 일어났다. 그러자 캐시는 말했다.
“지금 네가 일어나면 누군가는 죽어.”
라토는 멈칫했다.
‘또 이런 데 약하고. 타고난 히어로네.’
이런 세상에서는 오래 살아남기 힘든 자질이었다.
캐시는 감탄하는 건지 안쓰러워하는 건지 본인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성급하지 굴지 마. 메인은 코치니요 아사도야. 스페인 세고비아의 통 새끼 돼지 요리지. 다른 데선 쉽게 맛볼 수 없는 거야.”
그때 하인들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금장이 둘러진 커다란 접시 위에는 노릇하게 구워졌지만 살아있을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기가 놓여있었다.
이쪽도 통째 구워진 요리를 보고 인상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순진한 문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이러는 것 같아서 라토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고기가 워낙 부드러워서 칼 대신 접시로 자른다는 전통대로 하인은 접시로 잘라 서빙해주었다.
캐시는 고기를 한입 맛보았다. 라토는 제 접시에 놓인 고기를 보다가 포크를 들었다. 캐시가 그 모습을 웃는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어때?”
라토는 시선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묻지 마. 좋은 대답 듣기 힘들 거 안다면.”
“음식은 죄가 없잖아?”
“이걸 어디서 누가 생산해서 어떻게 가져왔느냐가 중요하겠지.”
“신기하네. 흡혈귀가 이런 물렁한 성격을 하고 어떻게 여태까지 살아남았는지.”
이건 진짜 캐시 입장에서도 궁금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세상은 흡혈귀가 살기 열악한 곳이었다.
항상 정체를 감춰야 했고, 숨어야 했으며, 들키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수반했다. 흡혈귀들에게 어둠이 편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어둠이 그들을 감춰주기 때문이었다.
“공존했으니까.”
라토는 똑바로 캐시를 보았다.
“우리가 공존하길 선택한 순간 부족은 우릴 받아들여줬어. 그리고 외지인으로부터 오히려 우릴 보호해줬지. 우리는 거기에 대한 신의를 지켰고.”
뱀파이어가 된 순간 캐시는 혈혈단신의 뱀파이어로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과 손을 잡는 것.
그건 물론 합리적이고 유효한 판단이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한 철저한 비즈니스였다. ‘공존’은 밖에 이야기할 때나 멋들어진 기치일 뿐이었다.
촛불이 일렁였다.
캐시는 입을 닦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리고 갑자기 테이블을 밟고 올라섰다.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담긴 값비싼 그릇들을 전부 쳐내면서 테이블이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왔다.
챙, 차랑, 째쟁, 타라랑.
그릇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캐시는 라토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라토 사타디.”
캐시는 테이블을 짚고 엎드려 누웠다. 얼핏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정장 상의의 앞섶이 벌어지면서 유난히 화려한 검은 레이스 속옷이 드러났다.
캐시는 과일 그릇에서 포도 한 알을 떼와 여봐란듯이 붉은 입술 사이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기필코 너와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라토는 아무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여자는 그가 반응을 보이는 걸 즐길 뿐이었다.
캐시는 그나마 남은 그릇들까지 쳐내며 두 다리를 끌어와 하이힐 채로 라토의 다리를 밟았다.
“긴장하지 마. 처녀처럼 순진한 면이 있다는 거 아니까 처음에는 부드럽게 해줄게.”
그러면서 하이힐 앞굽으로 라토의 하반신을 지그시 눌렀다. 그걸 막기 위해 라토는 캐시의 다리를 잡았다. 하지만 캐시는 오히려 좀 더 힘을 주면서 싱긋 웃었다.
“그다음에도 부드럽게 대해준다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라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고는 캐시의 다리를 치우고 일어났다. 하지만 캐시가 양손으로 라토의 옷깃을 잡아 홱 끌어당겼다.
그 김에 라토가 끌려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끔찍한 여자 같으니.”
라토는 거칠게 뇌까렸다.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캐시의 얼굴을 움켜쥐며 키스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캐시는 놀랐다.
라토는 이 여자가 싫었다. 애초에 이런 여왕 거미는 그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인간적으로도 역겹고, 끔찍했다.
남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노예상 같은 여자에, 측은지심이라고는 없는 테러리스트였다.
이 여자에 비하면 니카는 차라리 애정을 갈구하는 귀여운 여동생에 불과했다.
그래서 라토는 자신이 라헬에게 느끼는 강렬한 충동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도발하듯 가까이 다가온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일부러 그에게 밀어붙인 육감적인 몸을 안고 싶다고 느꼈다.
향수로 목욕이라도 하는지 진한 향수 냄새와 섞인 체취가 그의 정욕을 들끓게 했다.
라헬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면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몸이 식었다.
하지만 이 향기를 맡고 이 몸을 느끼면 또 금세 이성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어쩌면, 이런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는 자신이 실은 그렇게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방증인지도 몰랐다.
와인 맛이 나는 입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
라토는 육중한 나무 테이블이 덜컹거릴 정도로 캐시를 밀어붙였다. 캐시는 반사적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쥐었다.
라토가 자신을 만지고 있었다. 자신이 MCTC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데도.
라토의 눈은 처음부터 그녀의 껍질을 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가 지그시 쳐다보는 앞에 캐시 브루어의 모습이 드러날 것만 같아 그녀는 감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캐시가 손을 옆으로 짚으면서 친 그릇이 떨어졌다.
쨍그랑.
파열음에 라토는 정신을 차렸다.
라토는 욕설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캐시를 밀치고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입구로 다가가자 문 앞에 있는 남자들이 막아섰다.
라토가 쳐다보았지만 남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켜서지 않았다.
그사이에 따라 온 캐시가 라토를 붙잡아, 부딪친 등이 아프도록 옆벽에 밀어붙였다.
쿵.
“오늘은 너와 할 거라고 했잖아.”
캐시는 라토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날 거스르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목을 따라 핥아 올라가면서 속삭임을 끼얹었다.
라토는 캐시를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들이 신경 쓰여?”
캐시는 짓궂은 미소를 짓고는 고갯짓했다. 그러자 남자들은 묵례하고 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하여간 처녀 같긴.”
그러고는 캐시는 라토의 멱살을 잡아 홱 소파로 넘어뜨리고 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옷깃을 열어젖혔다.
무늬가 섬세한 검은 레이스 속옷에 감싸인 가슴이 드러났다. 다리의 벌어진 슬릿 사이로는 브래지어와 세트인 팬티가 비쳤다.
캐시는 양손으로 라토의 목을 휘감아 쥐었다.
“이투하.”
손에 힘을 주어 꾸욱, 숨이 막혀오는 부분을 눌렀다. 하지만 라토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아름다운 피부야.”
캐시는 나직한 숨을 라토의 피부 위로 미끄러뜨리며 속삭였다.
“네 피부를 벗겨 잘 때 덮고 자고 싶어. 그럼 항상 이런 촉감을 느끼며 잘 수 있겠지.”
피부를 느끼듯이 가슴을 맞댄 채 몸을 위아래로 천천히 문질렀다. 여자 뱀처럼 야릇하고 음란한 몸짓이었다.
라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끔찍한 생각들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사실 가끔은 레퍼토리가 떨어져서 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변태성욕자 같을까 고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라토를 상대로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그가 주는 감각을 조금 부풀리기만 하면 됐다.
“순진한 척하지 마. 옛날에 어떤 부족들은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 두개골을 보관했다고 하던데. 사타디 부족은 어땠어? 식인 같은 건?”
“사타디는 식인종이 아냐.”
캐시는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반응하네.”
“여자가 그렇게 몸을 문질러대면 고자가 아닌 한 반응은 와.”
라토는 몸의 반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캐시는 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귀엽지 않아. 걱정 마. 아픈 것도 꽤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라토는 캐시의 두 팔을 잡아서 밀어냈다. 시선이 맞부딪쳤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캐시는 움찔했다.
***
“읏, 하….”
자신이 이렇게 제 진짜 반응을 내보일 정도로 어리숙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토가 애무하자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아앗…! 이투하….”
캐시는 제발이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라토는 중간 중간 나타나는 반응을 참을 수 없었다. 말은 무섭게 하지만 정작 몸의 반응은 그를 원하는 연인 같았다. 뜨겁고 달콤했다.
언젠가부터 뒷골을 섬뜩하게 만드는 말들도 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는지, 그러고 싶지 않은지.
하지만 겨우 캐시는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휩쓸려 제 본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제 뭘 좀 아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키스했다. 옷자락이 시끄럽게 바스락거리고 헐떡이는 숨이 뒤얽혔다.
“아아, 이투하… 널 내게 줘. 내 안에 들어와.”
이건 진심이었다, 너무나.
“이투하.”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라토는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잇새로 나직이 말했다. 캐시는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캐시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레기온의 라헬인지, MCTC의 캐시 브루어인지도 흐릿해졌다.
순간 무언가가 홱 목을 감았다.
캐시는 흠칫했다.
번뜩 쳐다본 창가에 라토가 그녀 뒤에서 얇은 끈을 휘감아 쥐고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