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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94화 (94/110)

94화<쭈니>

순간 무언가가 홱 목을 감았다.

캐시는 흠칫했다.

번뜩 쳐다본 창가에 라토가 그녀 뒤에서 얇은 끈을 휘감아 쥐고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라토는 진심으로 힘을 주었다. 캐시가 다급히 입을 벌렸지만 숨이 빨려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캐시는 온힘을 다해 라토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 김에 테이블에 놓인 화병이 떨어져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콰장창.

그때 충격으로 조르는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캐시는 팔꿈치로 라토의 명치를 가격했다. 라토는 끈을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훅 숨을 들이켰다.

탁.

그 찰나에 캐시는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위쪽 벽을 짚었다가 라토의 목에 다리를 걸었다.

라토는 그런 캐시를 잡아서 내려쳤다. 하지만 캐시는 포기하지 않고 라토를 붙잡고 같이 굴러갔다.

우당탕.

루아스 둘분의 무게에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두 사람은 바닥에 굴러 흩어졌다.

“하….”

캐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고 했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가 거칠게 미끄러졌다.

하지만 뒤에서 라토가 캐시를 덮쳐 제 몸으로 억누르고 두꺼운 팔로 목을 휘감았다.

“허억…!”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빚은 듯한 팔에 혈관과 근육이 꿈틀거렸다.

루아스는 성별에 따른 힘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라토가 훨씬 더 강한 사타디 혈통에 개인적으로도 캐시보다 오래 살았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눈에 물씬 눈물이 고였다.

캐시는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라토, 난…!”

하지만 라토는 힘을 풀지 않았다. 캐시는 알았다. 곧 목뼈가 부러질 것이다.

이제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눈앞이 부옇게 되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눈알이 뒤로 넘어갔다.

쾅!!

“물러서!”

고함이 들리고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놓고 물러서!”

경비병들은 소리치면서 라토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라토는 그것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경비병들은 순간 압도되었지만 라토를 걷어찼다.

퍽!

하지만 라토 쪽에서 더 이상 저항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비켜났다.

“콜록! 콜록, 콜록!”

캐시는 목을 잡고 기침을 토해냈다. 목에 불을 놓은 것 같았다.

정말로 요단강 너머로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손짓하는 모습을 봤다.

10년간 라헬로 살면서 이런저런 목숨의 위기를 겪었지만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간 건 처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들어와봤더니….”

옆에서 집사장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천천히 기침이 잦아들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

캐시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끼익, 구두가 긁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대로 다리를 휘둘러, 경비병들이 붙잡고 있는 라토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소리가 울렸다.

라토는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숙였다. 캐시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으켜.”

경비병들이 라토를 일으키자마자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볼을 후려쳤다. 인간이었으면 몸이 반은 날아갔을 강도였다.

하지만 라토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캐시는 눈 밑을 떨면서 웃었다. 놀란 탓에 눈 밑이 저절로 푸르르 떨려왔다.

“이투하. 난 널 죽이지 않아. 오히려 네가 살아있다는 게 손끝, 발끝까지 아주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실감하게 만들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자신이 라헬 캐릭터대로 잘 말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라토는 훗 웃었다.

“네 스스로 계속 말하고 있잖아? 난 이투하야. 이투하는 아무한테도 복종하지 않아.”

붉은 눈동자가 묵직한 빛깔로 타올랐다. 목청은 낮았지만 귓가에서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전율이 등허리를 훑었다.

하지만 캐시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에 사슬을 메서 묶어놔. 날 화나게 만든 대가를 받게 될 거야.”

***

목을 두른, 끈으로 졸린 상처가 선명했다. 거의 검붉은 피멍처럼 보였다. 루아스로서도 며칠은 갈 상처였다.

옷으로 가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소문은 다 퍼졌을 테고 가리는 게 더 비웃음을 살 일이라 그냥 놔두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쳐다볼 줄은 몰랐다.

역시 인간적인 예의라는 걸 기대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간부회의 자리에 먼저 와있는 판데르발트가 물었다.

“어제 198세의 일기로 사망할 뻔했다지?”

“사고가 좀 있었을 뿐이야.”

캐시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쿠니스가 말했다.

“너도 그 녀석은 다루기 힘든가 보군.”

“시행착오가 있지만 곧 얌전해질 겁니다.”

“힘들면 말해. 이투하에게 죽은 녀석이 한둘이어야지. 그 녀석을 손봐주고 싶어서 모두 안달 나있으니까.”

그러면서 판데르발트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판데르발트는 클리엔테스 중 둘을 이투하 대원에게 잃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그와 고대 그리스적인 동성애 관계에 있던 상대였다.

대공이 라토를 죽이지 않는다면 판데르발트가 죽일 것이다.

캐시는 이건 단순히 라토를 라헬의 명성에 맞게 대하는 것 이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라토, 난…!”

라토는 어제 기억을 곱씹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라헬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어제는 다급한 김에 아무 말이나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그때 그녀는 죽음의 목전에서 꼭 뭔가 고백하려던 사람 같았다. 눈빛도 다른 사람 같았고….

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으니 눈빛 정도는 얼마든지 달라 보였을 수 있었다.

생각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는.

목에는 쇠목걸이가 둘러져있고, 양 팔목에는 수갑이 채워져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이어진 사슬은 천장으로 연결되어 도르래에 감겨있었다.

인생은 살아봐야 한다더니 여자 집에-정확하게는 지하 감옥- 개처럼 목줄에 메여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바닥에 앉아있는 라토는 한숨을 삼키고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참 여자 운은 지지리도 없지. 하나는 날 찌르더니 하나는 날 개 취급이군.’

그것도 웃통은 왜 벗겨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뱀파이어가 주변 온도 변화에 덜 민감하다고 해도 이런 지하에 반쯤 벗고 계속 앉아있으면 한기가 들었다.

그 여자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면 한기가 드는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그 여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간부를 죽이면 일이 더 복잡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 오만한 여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제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라는.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하이힐 소리….

이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라토는 정말 꼭 개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지만 잘 알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희미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림자가 잦아들고 투 버튼의 흰 바지 정장을 입은 캐시가 나타났다.

옷차림도 화장도 완벽했지만 목에는 검붉게 피가 터지고 멍이 든 상처가 선명했다.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처럼 얇은 시가릴로를 들고 있었다. 그녀 뒤를 따라 옅은 연기와 시가향이 퍼졌다.

오는 순간부터 때로는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무서운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빈정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오히려 침착해 보였다.

라토 앞에 와 선 캐시는 시가릴로를 한 모금 빨았다.

“안녕, 이투하.”

라토는 캐시를 올려다볼 뿐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캐시는 시가릴로를 한 번 털고 말했다.

“오늘 네 덕분에 좀 웃음거리가 됐어.”

시가릴로에서 무심히 연기가 피워 올랐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 널 어떡할까.”

사실 말로 겁주고 모욕하는 건 할 수 있지만 라토를 아프게 할 수가 없었다.

절벽에서 명령에 따라 라토의 팔을 자를 때까지만 해도 그를 잘 모를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캐시는 대공이 라토를 일부러 자신에게 보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공은 그녀를 믿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빈 소년 합창단 출신 같은 어린 외모로 온갖 흉악한 녀석들이 모이는 루아스 테러리스트 네트워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어쩌면 자만하고 있었던 건 캐시 자신이었는지도 몰랐다. 녀석을 처치하는 게 바로 자신이 될 거라는 자만.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이번 고비를 잘 넘기면 대공은 마침내 라헬을 믿게 될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는 일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캐시는 바닥에 시가릴로를 던져 발로 비벼 껐다.

“그럼 시작해볼까?”

***

철컹.

사슬이 당겨졌다.

라토의 몸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이글거리는 불빛이 물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피부에 비쳤다.

캐시는 라토의 목에 걸린 사슬을 잡아 뒤로 당겼다. 라토는 고개가 젖혀져 캐시를 마주 보게 되었다.

“이투하.”

캐시는 달콤한 숨결을 끼얹었다.

“날 원하지?”

라토의 눈동자 깊은 곳이 떨려왔다.

그 눈 속에 그녀를 향한 욕망이 있었다. 뛰어난 오감은 그가 내쉬는 숨, 그녀의 옷자락을 따라오는 눈빛에 묻어나는 욕망을 눈치챘다.

캐시는 동공의 주름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알아. 나 같은 여자를 원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겠지. 하지만 욕망은 이성과는 다른 존재야.”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소름이 올라왔다.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욕망 자체에는 선도, 악도 없어. 그저 뜨겁게 원할 뿐이지. 그 목소리를 들어봐. 자유로워질 거야.”

라토는 실제로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고통스럽고 갑갑한 억압을 벗어버리고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 여자가 싫었다. 악의 화신 같은, 모든 게 제 뜻대로 될 거라고 믿고 있는, 그리고 이토록 그를 흔드는 여자가.

“이투하는 자유를 원하잖아?”

어둡고 뜨거운 공간에서 감각이 극대화되어 그에게 속삭이는 붉은 입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성경에 나오는 뱀이 여자였다면 과연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라토가 이 여자에게 느끼는 욕망은 강렬했다. 그를 ‘라토 사타디’라는 남자로 만드는 신념이나 이성, 규칙 모두 아무래도 좋아질 만큼 이 여자를 원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떤 배우자를 만나서 그 강렬한 악에 매혹되어 타락해버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쿵. 차르륵.

팽팽하던 사슬이 갑자기 풀어져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울렸다.

캐시는 바닥에 넘어졌다. 위를 점령한 라토의 키스는 뜨거웠다. 사방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그들의 입안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세워놓은 무릎에서 옷자락이 흘러내려 드러난 허벅지에 불길이 끼얹은 윤기가 흘렀다. 그 너머로 남체가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 불과 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땅속 마그마에 덥혀진 것처럼 뜨겁고 습한 공기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청동 빛으로 빛나는 짙은 갈색 피부를 타고 윤기를 발하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라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라토 사타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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