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쭈니>
그는 라토 사타디였다.
“‘난’ 널 원하지 않아.”
몸은 몰라도 그의 이성은 결코 이 메데이아의 현신을 원하지 않았다.
캐시는 일부러 차갑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차르르륵.
사슬이 다시 당겨지며 라토는 원래 자리로 끌려갔다. 캐시는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대장님. 당신은 죽게 될 거야. 모두가 시선을 돌리는 죽음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사람이거든. 지나가는 죽음도 불러들일 테지.”
그러면서 캐시는 돌아섰다.
“뱀파이어가 되면서 어떻게 한 번은 피해갔는지 몰라도 말이야.”
또각. 또각.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울렸다.
라토는 눈을 감았다.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반면 캐시는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온몸이 축축했다.
캐시는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정원을 보면서 하얀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정원은 이곳이 사막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푸르고 물이 넘쳤다.
라토가 라헬에게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런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그 욕망이 대단하든 간에 라헬 같은 여자는 그의 신념과 정의에 정면으로 위배될 테니까.
그리고 라토가 이쪽이 생각한 남자 그대로였다는 점에서 캐시는 유혹을 견딘 그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공은 라토를 회유할 수 없다면 죽일 셈이었다.
대공으로서도 라토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슬슬 그도 라토를 제 편으로 만들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궁극적인 단계에서 라토는 대공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다.
***
“소령.”
부르는 소리에 도영은 고개를 돌렸다. 렉스가 그가 서있는 활주로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평선에 해가 근근이 떠오르는 시간이라 활주로에는 묽은 일출 빛이 퍼져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흩날렸다.
도영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UFD(연합 사막 연방)가 우리 쪽 작전을 허가하지 않겠다는군요. 그 요새에 민간인이 인질로 많이 잡혀있다는 이유로.”
그 요새에 있는 민간인이라면….
도영은 기가 찼다.
“영원교 그 사이비들이요? 오히려 적극적인 공범이겠죠.”
하지만 렉스는 사무적인 얼굴로 사실을 적시했다.
“영원교는 한 번도 공공에 테러를 가한 적은 없습니다.”
보통 그들이 노린 건 여자 뱀파이어뿐이었기 때문이다.
“가하고 나면 늦는 겁니다.”
“예방이라는 건 그쪽 사전에 없는 단어니까요.”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말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까?”
레기온 내부에 정보원이 있었다. 도영도 그게 하심 말루프라고 생각했지만 하심은 아니었다. 그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멀쩡히 활동하면서 정보를 보내오는 걸 보면.
렉스는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왕처럼 극진히 대한다더군요. 아이도 잘 자라고 있답니다.”
도영은 활주로를 보았다. 활주로 끝에는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가말은 계속 저 해를 지켜봐왔겠죠. 수없이 뜨고 지는 걸.”
가말이 몇 번이나 혼자서 저 해를 봤을까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고마워지기도 했다. 그 시간을 버텨준 게.
그리고 지금도 가말은 혼자 버티고 있었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렉스는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오셨군요.”
도영도 돌아보았다. 격납고에서 전투복을 입은 대원들이 양복을 입은 한 남자를 위시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가봅시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뭐라고 할지.”
***
황토색 바람이 불어왔다.
이동해온 곳은 사방으로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가까운 공터였다. 거의 수평선 가까운 곳에 흐릿하게 기지가 보였다.
황야 가운데 접이식 책상이 펼쳐져있었고, 그 위에 장비들이 세팅되어있었다.
도영을 포함한 사람들은 거기서도 한참 떨어진 자리에 모여 서있었다. 그 가운데 있는 양복을 입은 박사는 전용 핀셋으로 칩 같은 걸 들고 말했다.
“기밀이지만 얼마 전 저희 연구소에서 이걸 탈취당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팔짱을 끼고 말을 듣던 맥코이 하사가 물었다. 그러자 박사는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고 묻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게 기밀인 이유니까요.”
맥코이 하사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도영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박사가 계속 말했다.
“중요한 건, 얼마 전 UFD의 군사 연구 시설에서 이걸로 만든 무기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레기온이 탈취해간 게 말이죠.”
휴 대위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도영은 허리에 손을 짚었다.
“UFD와 레기온 사이에 암묵적인 계약이 있다는 의미군요.”
“어쨌든 UFD는 내전으로 시끄러우니까요. 자기들 땅 한구석을 쓰려고 하는 뱀파이어들보다 그 뱀파이어들이 제공하는 무기로 다른 파벌을 얼마나 때려잡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할 테니까요.”
이교도보다 이단이 더 밉다는 논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모양이었다.
“추측하건대 이게 가말 씨의 가슴에 들어간 폭탄의 원료가 된 거 같습니다. 이게 혈관 내부를 타고 흐를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가 가능하거든요. 그럼 모두 헤드폰을 쓰시고 물러나주십시오. 더요.”
박사 말에 따라 모두 멀찍이 물러났다. 물건을 올려놓은 테이블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의 거리까지 갔을 때였다.
“폭파합니다.”
박사가 말하고 장비를 모두 세팅해놓은 박사 팀의 프로그래머가 키보드를 누르자, 뻑 소리가 났다.
그리고 테이블로부터 폭발이 일었다.
공기를 빨아들여 일순 공기가 흐르는 방향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다. 사방에 뿌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파스스 연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침내 연기가 모두 걷힌 자리에, 운석이 와 부딪친 것처럼 크레이터 같은 거대한 구멍이 나타나있었다.
맥코이 하사가 기겁했다.
“이런 게 가말 씨의 가슴에 들어있다고요?”
박사는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똑같은 제품은 아니니까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주로 플러스죠.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녀석들이니까요.”
“이 정도면 만 년을 산 뱀파이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을….”
말하다가 도영이 듣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흘긋 보았다.
도영은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하지만 도영은 더는 밖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더 큰 핵폭발을 위해 우라늄을 응축시키듯이 모든 에너지를 속에 단단히 쌓아갈 뿐이었다.
가말을 구하기 전까진 어떤 것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이.
도영은 헤드폰을 벗어 던지고 걸어갔다. 팀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교환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가던 도영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쩌면 가슴 밑에서는 믿고 싶었습니다. 대공 녀석 나름대로는 가말한테 속죄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도영은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 쌍둥이 몸에 이런 걸 심는 녀석이 어떻게 제대로 됐을 수가 있습니까?”
***
가말은 회랑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열기가 느껴졌다. 섬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멀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라토는 정해진 시간에 라헬 그 여자의 궁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라토에게 특별히 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만나는 동안에는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숨만 다르게 쉬어도 눈치챌 수 있는 거리에서.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기둥 뒤에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인간 아이가 기웃거리고 있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었는데 큰 눈에 호기심과 겁먹은 빛이 섞여있었다.
이곳에 있을 만한 인간 아이라면 영원교 신도의 자식일 것이다.
가말은 아이를 쳐다보다가 손짓했다.
“이리 와.”
아이는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자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가말은 조용히 기다렸다. 햇빛이 내려 가말이 입은, 기하학적인 꽃무늬가 금수로 사금 가루처럼 박힌 비단 드레스 자락을 비추었다.
아이의 눈에 점차 두려움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차올랐다.
아이는 비단 드레스에 감싸인 둥그런 가말의 배를 보고 물었다.
“있어요?”
“만져볼래?”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는지 아이는 놀랐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긴장감에 손을 쥐었다 펴고 살며시 가말의 배에 올렸다.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폭발할 듯이 반짝거렸다.
가말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가 느껴져?”
아이는 가말을 올려다보았다.
“메시아님이요.”
가말은 움찔했다.
“저희를 영원한 지복의 나라로 이끌어주실 메시아님께서 계세요.”
그 눈동자에 미처 보지 못했던 광신의 빛이 일렁였다. 가말은 흠칫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이도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저리 가.”
가말은 신음처럼 말했다.
“사도님.”
가말이 갑자기 그러자 아이는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가말은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저리 가!”
아이는 달아났다.
가말은 배를 감쌌다.
“미안해, 베이비.”
쿠니스가 알려주지 않아서 성별은 알지 못했지만 베이비는 착했다.
거의 투정을 부리지 않아서 때로는 있는지 없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가끔 발차기하는 게 아니면 하도 조용해서 안에서 잘못되진 않았는지 걱정이 될 때도 있었다.
가말은 다시 정원을 보았다.
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화려하고 이국적인 식물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베이비를 낳을 순 없었다.
이곳의 공기 중에는 이상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비정하고 잔혹한 광신의 공기가.
‘도영, 보고 싶어.’
도영을 떠올렸다. 눈빛, 입매, 턱….
어제 본 사람도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상하게 도영은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인간이었을 때 모습이든 지금 모습이든.
‘이대로는 안 돼.’
가말은 배를 본 채로 생각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도영에게 돌아가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말은 시계를 보았다. 일단은 라토를 만날 시간이었다. 그래서 방을 나와 라헬의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입구에서 경비병들이 가말을 막아섰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가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한다면 이 궁에 와서는 라토를 만날 수 있다고 했어.”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 여자를 불러와줘.”
“부재중이십니다. 다음에 와주십시오.”
경비병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문짝을 뜯고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저편에서 라헬이, 즉 캐시가 걸어오고 있었다.
캐시도 가말을 발견했다. 가말은 그녀에게 다가가 들이받을 듯이 물었다.
“라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왜 만날 수 없다는 거야?”
캐시는 가타부타 말없이 제 목 티를 끌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