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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96화 (96/110)

96화<쭈니>

캐시는 가타부타 말없이 제 목 티를 끌어내렸다.

“이투하 대장의 솜씨죠.”

가말은 놀랐다. 진심으로 조른 듯이 상당히 아파 보이는 흔적이었다.

“그래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캐시는 무심히 말했다. 가말은 정신을 차리고 상처에서 시선을 뗐다.

“무슨 벌?”

“며칠간 가말 씨와 만날 수 없는 벌이죠.”

그건 분명히 벌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 라토를 다치게 하면.”

가말은 전에 없이 차갑게 말했다.

“넌 절대 곱게는 못 죽어.”

“조심하세요. 배 속의 소중한 분이 듣고 있지 않습니까?”

라헬인 척하느라 비꼬는 투로 말했지만 사실 캐시의 진심이었다. 이런 험한 말을 배 속의 아기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가말은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는 눈빛을 던지고 지나갔다. 캐시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묻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말은 멈칫하고 돌아보았다. 캐시는 물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신이 한 일은 뭐였죠? 숨고, 달아나는 거? 아들들 뒤에 숨어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 거?”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토록 충성스러운 아들들이 밖에 나가 싸우고 죽어가는 동안 말이죠.”

캐시는 라헬로 살면서 버릇이 된 비웃음을 짓고 갔다. 하지만 가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픈 곳을 찔렸다.

“마티, 우리가 쿠니스 녀석을 없앨게.”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혈기로 섬을 뛰쳐나가는 라토와 토라를 수없이 말렸다. 하지만 기운찬 성인 아들들은 가말의 생각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사타디 부족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라토와 토라를 따르며 이투하 같은 걸 만들어서 종내에는 MCTC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쿠니스는 국제 테러리스트 리더의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정의를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없애야 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말도 이투하의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었다고 하지만, 분명히 그건 비겁한 선택이었다. 다른 이들의 손에 제 업보를 떠넘긴 짝이었으니까.

가말은 방으로 돌아갔다.

탁.

생각에 빠져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도님.”

늘 그렇듯, 시중을 들어주는 영원교 여자였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여자였는데, 영원교 여자들은 늘 로테이션을 돌기 때문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꼭 누군가가 가말과 가까워지는 걸 경계하듯이.

가말은 여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물었다.

“왜 루아스를 좋아해?”

“루아스님들은 영생을 나누어주는 천사님들이니까요.”

여자는 부드럽게 웃고 말했다.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만 루아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은 목자가 되어 저희 신도들을 이끌어주죠, 메시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여자의 눈 깊은 곳에도 아까 아이와 같은 맹신의 빛이 있었다. 그건 자신이 믿는 진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신념의 빛이었다.

가말은 지나친 관심은 가지지 않은 듯 보이도록 노력하며 다시 물었다.

“메시아가 강림하면?”

“약속의 날이 도래하면 메시아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실 겁니다.”

꼭 뇌에 각인되어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 투였다.

결국 영원교의 생각은 제 베이비가 바이러스 그 자체라는 거였다. 100% 감염에 성공하는.

그러니까 믿는 것이다. 베이비가 물기만 하면 자신들은 마법처럼 뱀파이어가 될 거라고, 그렇게 영원히 살게 될 거라고.

라토는 영원교를 두고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건 가말도 알았다.

가말은 여자를 보았다.

“너희 교주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그건… 송구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고는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꼭 교주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기뻐 마지않아 하실 겁니다. 교주님께서도 사도님을 알현하고 싶어 하시는데 레기온의 총수님께서….”

옆에 있는 나이 든 여자가 마뜩잖은 듯 쉿 소리를 냈다. 그러자 여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다.

가말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요새 내에서 레기온이라고 우위에 서있는 게 아니고, 영원교라고 자유로운 게 아니었다. 섬세하고 복잡한 거미줄에 얽혀있는 것처럼 서로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 가보게.”

나이 든 여자가 말하자 여자는 일어나 물러났다. 가말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근데 있잖아. 지금은 21세기야.”

“네?”

역시 여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말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다 구식이면 안 돼.”

***

쿠니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영원교의 교주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보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봤지만 이 요새에서 쿠니스의 눈을 피해서 교주를 만날 방법은 없었다. 피해서 만났다가 들키면 또 라토에게 몹쓸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만나면 되는 것이다.

「네가 영원교의 교주는 왜?」

쿠니스는 크게 관심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가말이 그에게 뭔가 부탁하는 건 지난 몇 달간 처음이었기 때문에 살짝 고무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더 차갑게 말했다.

「여자들이 종교에 잘 빠지긴 하지만 영원교는 네게 위로가 될 만한 종교는 아니야. 폐쇄적인 자기들만의 집단이지.」

쿠니스가 청동 무기를 쓸 때 남자처럼 말했지만 가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영원교의 교주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어. 특히 비의와 밀교에 조예가 깊다고. 나도 그런 쪽으로는 꽤 대화할 거리가 있으니까.」

가말은 무심히 덧붙였다.

「옛날엔 널 피하느라 그쪽에 몸을 의탁한 적도 있었고.」

안 그래도 영원교의 교주가 계속 가말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해와서, 쿠니스로서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는 상태였다.

애초에 영원교는 쿠니스를 돕는 조건으로 가말 곁에 영원교 여자들을 붙여놓는 일과, 가말과의 주기적인 만남을 요구했다.

첫 번째 요구사항은 실행했지만 두 번째는 가능한 한 미루고 있었다.

사실 쿠니스라고 좋아서 그 사이비를 곁에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미치광이들이 필요할 정도로 세력이 많이 약해져서 억지로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년 전 그를 잡아넣은 뒤로 MCTC는 승승장구했고, SN의 수많은 협력체에 불과한 무기상이었던 로열 스타도 그새 세를 불렸다.

영원한 세월을 허락받은 뱀파이어들이 사는 세상이라지만 변화는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고작 3년 만에 게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기울어진 저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쿠니스는 모두가 쓰기 꺼려하는 위험한 패까지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원교처럼 목적과 욕망이 뚜렷한 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운 면이 있었다. 영원한 삶 같은, 기약은 없지만 곧 이루어지리라는 희망만 계속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좋아.」

쿠니스는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딱 한 시간이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스는 덧붙였다.

「혹시 싶어 말하지만 영원교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

「영원교는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어. 메시아를 통해 자기들이 영원히 살 생각뿐이지. 쓸데없는 기대는 버려.」

그러고 쿠니스는 일어났다. 그런데 문에 다 왔을 때쯤 뒤에서 가말이 말했다.

「혹시.」

쿠니스는 돌아보았다.

가말은 아름답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얼굴에 광채처럼 감도는 온화한 빛은 더 깊어져서, 마치 세상의 불같은 느낌이었다.

신이 세상에 영원히 아름다운 무언가를 가져다놓고 싶어서 가말을 가져다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러면서도 결연한 표정은 쿠니스가 알던 예전의 수줍고 우물쭈물하던 소녀가 아니었다.

저절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모습으로, 가말은 물었다.

「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걸 믿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야.」

쿠니스는 돌아섰다.

「그걸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각자 다르지만.」

***

다시 봐도, 영원교의 교주는 생각과 다른 얼굴이었다. 눈빛은 온화하고 얼굴에는 실제로 윤기처럼 건강한 빛이 흘렀다.

그리고 불러온 가말의 배를 보는 눈이 이채를 뗬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본다면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경외와 감탄을 담은 눈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찾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주는 유창한 라틴어로 말했다.

「아니면 아람어 쪽이 더 편하신가요?」

그러면서 역시 유창한 아람어로 물었다. 그 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라틴어가 나아.」

가말은 대답하고 교주를 훑어보았다.

「젊네.」

「감사합니다. 이래봬도 다음 달에 환갑입니다.」

그 대답에 가말은 교주를 의아하게 보았다.

「인간 아냐?」

환갑은커녕 사십 대도 갓 됐을까 싶어 보이는 얼굴로 교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인간이죠.」

「근데 왜 이렇게 젊어?」

「감히 신앙의 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겐 근심이 없죠. 걱정도 없습니다. 오로지 신을 경배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네 신이 누군데?」

「오직 한 분뿐입니다.」

교주는 신앙을 고백하듯이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국 단 하나뿐인 그분입니다. 심지어 바알이나 데미우르고스마저도 그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요.」

가말은 흥미로워 말했다.

「그런 해석이 이단인 건 알아?」

「저희를 이단이라고 하는 그자들이 저희에겐 이단입니다. 숫자가 많다는 게 꼭 옳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다수가 믿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교주는 온화하게 웃었다.

「저와 신학 논쟁을 하려고 보자 하시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음흉하거나 음침하단 느낌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기민해 보였다. 사이비 교주보다 정치인이었다면 어울렸을 것이다.

가말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영원교는 왜 ‘사도’가 있다고 믿는 거야?」

「신께서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교주는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가말은 정말 좀 흥미로워졌다.

「적어도 예언자들을 통해 이야기했다고 하긴 하지.」

교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끄럽습니다만… 전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팠습니다. 아무도 원인을 찾지 못하는 열병을 앓았죠. 사람들은 제가 미쳤다고 했고, 또는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내리깐 눈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전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죠. 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귀신 따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신이라면 필경 날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주는 가말을 지그시 보고 속삭였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습니다.」

가말은 잠깐 교주를 보다가 말했다.

「예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여럿 만나왔어. 네가 진짜 예언자라는 증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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