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쭈니>
가말은 잠깐 교주를 보다가 말했다.
「예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여럿 만나왔어. 네가 진짜 예언자라는 증거가 있어?」
요즘에는 좀 드물지만 옛날에는 길가다 차이는 게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가말이 만나본 사람들 중에 진짜 예언자는 없었다, 단 한 명도.
교주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사도님께서 저희에게 오셨으니까요.」
「미안한데 난 납치당했어.」
역시 기민한 교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필연의 끈은 어떻게든 맺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도께서 오셨고 저희가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예언이 이뤄졌음을 의미하죠.」
뒤에서 영원교 여자들은 교주의 말이 거의 복음이라도 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동해서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울 것 같았다.
가말은 교주를 보다가 물었다.
「그럼 내가 뭘 해주길 바라?」
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그저 메시아를 건강하게 낳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저희는 그분의 충실한 종이자 영원한 벗, 믿음직한 군대가 될 것입니다.」
교주는 우아한 몸짓으로 일어나 가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말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테렌티, 아세 수에이 에우스타키스.(보라, 메시아께서 오신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 소테르(구원자)를 보듯이 경외심에 넘치는 눈동자였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인데.」
「신께서 저희에게만 주신 언어니까요.」
에스페란토처럼 그들이 직접 만들어낸 인공어인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레기온의 대원이 들어와 말했다.
“시간이 끝났습니다.”
가말은 대원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레기온 대원들이 그녀를 따라다니긴 하지만 직접 말을 걸거나 나서는 법은 없었다. 가말의 행동반경을 제약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서서 교주와 만나는 시간을 정확히 제약한다는 건, 확실히 레기온과 영원교가 단순한 협력관계가 아닌 긴장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가말이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즐거웠어.」
가말은 말했다. 교주는 묵례했다.
「오히려 제가 더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봐.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가말은 안으로 사라졌다. 교주는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영원교 신도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교주도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고 계속 걸어갔다.
구름다리를 통해 다른 건물로 건너가 중앙계단으로 여러 층 올라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탁.
문이 닫혔다.
마침내 혼자가 된 교주가 쥐고 있는 손을 살짝 펴자 사등분으로 접은 쪽지가 있었다.
교주는 방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쪽지를 펼쳐보았다.
- 밤에 아무도 모르게 만나러 와.
***
달이 높이 떠있었다. 가말은 창가에 서서 달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끔은 폭탄이 정말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은 조용했다.
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도님.」
가말은 돌아보았다. 교주가 고개를 숙였다.
레기온과 영원교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 요새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영원교의 교주라면 어떤 식으로든 만나러 올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에게 자신은 ‘사도’였으니까.
교주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부디 제게 이토록 큰 위험을 감수하게 하신 충분한 이유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제게도 레기온의 눈을 따돌리는 일은 쉽지 않았던….」
「꿈속에서 아기 천사가 제게 왔습니다.」
가말은 바로 말했다. 교주는 눈을 크게 떴다.
가말이 서있는 자리에 달빛이 내리쬈다. 신비해 보이도록 일부러 고른 자리였다.
교주는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덥석 가말의 손을 잡았다.
「성령이 임하셨군요.」
가말은 순간 당황했지만 덩달아 교주의 손을 잡았다.
「아기 천사는 믿음이 있는 자들 가운데 절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줄 진짜 신도들을 찾으라 했습니다.」
사실 가말에게 연기하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인간인 척 연기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창 종교가 유행할 때는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들을 자주 봐와서 따라 하기 어렵지 않았다.
교주는 수태고지 그림 속에 나오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듣는 마리아처럼 감격에 찬 얼굴로 가말을 우러러보았다.
가말은 말했다.
「또한 아기 천사는 신도의 모습을 빌린 불신자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신도여, 진실의 눈을 뜨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의 준비가 미흡하였나이까?」
교주는 설사 그랬을까 싶어 극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가말은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방에 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렇게 견고한 요새에 사도님을 모시….」
가말은 교주의 손을 꽉 쥐어 말을 막았다.
「불신자들은 사도를 억압하고 메시아의 탄생을 저지할 적그리스도 같은 자들입니다. 보십시오. 메시아의 탄생이 가짜 신도들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교주는 눈을 부릅떴다.
「레기온은 가짜 신도들입니다.」
가말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가짜 신도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저지하여 진정한 신자들이 지복의 나라에 들어서는 일을 막기 위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상한 듯 교주는 희미하게 어깨를 떨었다.
가말은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사이비인지는 몰라도 교주가 제 신앙에 꽤 진심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 뱀 같은 혀로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가말은 교주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메시아는 제 태내에 임했습니다.」
그에 교주는 가말의 배를 보았다. 거의 충격을 받은 눈이었다.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눈을 가리던 미몽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처럼.
거기에 가말은 쐐기를 박았다.
「그대들이 믿어야 할 진정한 사도는 누구입니까?」
***
캐시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위험한 행동을 하시는군.”
눈빛만 봐도 가말이 보기보다 고집과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돌발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저번에 자신이 한마디 한 것 때문일까?
캐시는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라토가 이래저래 고생하는 걸 보니-비록 불가피하게 그 고생을 자신이 시키고 있어도- 마음이 아파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도….”
캐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도로 추앙받는 가말이니까 가능한 수였지만 그래도 그런 걸 생각했다는 자체가 꽤나 발칙하고 대범했다.
게다가 그런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다니.
캐시는 뒤에 서있는 영원교 복장을 한 젊은 여자를 보았다.
“고생했어. 그리고 저번에 소령님한테 말 전해준 것도. 위험했을 텐데.”
타이밍이 조금만 안 맞았더라면 도영뿐 아니라 경비병들도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밖에 없는 걸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빛은 맑았다.
***
가말은 식사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무화과 열매를 보았다. 몇 번 올라오는 걸 봤지만 여태 가말은 단 한 번도 집어먹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무화과 열매를 하나 집어 먹자 쿠니스는 놀랐다. 하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가말은 무심한 척하는 쿠니스를 보며 생각했다.
쿠니스는 자신이 얼마나 이 요새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각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가말은 말했다.
「네가 내게 도영을 보냈다고 생각했어.」
「로열 스타가 멋대로 한 짓이야.」
쿠니스는 같잖다는 투로 대답했다.
「내가 그런 녀석을 보낼 리 없잖아.」
그 말에 가말은 의아해졌다.
「그런 녀석?」
「네가 좋아하게 생긴 녀석. 넌 옛날부터 곱상하게 생긴 녀석들을 좋아했으니까. 란투나 아다위는 네 취향이 아니었지.」
가말은 입을 다물었다.
「아다위는 착했어.」
「착한 척한 거야. 그 녀석이 얼마나 난봉꾼이었는지는 알아? 그리고 순진한 널 골라 장가든 거야.」
그건, 확실히 삼천 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가말은 말했다.
「그게 죽어야 할 잘못은 아니었어.」
「맞아.」
의외로 쿠니스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난 죽였어.」
가말은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입덧할 시기도 지났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게 네겐 자랑할 일이야?」
가말은 거친 어조로 물었다. 더 이상 쿠니스에게 어떤 감정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 공포에 떨게 하고, 그게 너한테 주어진 어떤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그러면서 가말은 탁자를 짚고 일어났다. 경멸을 담은 눈이 쿠니스를 향했다.
「타와는 널 부끄럽게 여길 거야, 쿠니스.」
“네가 자랑스럽다, 쿠니스.”
타와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가말을 향한 욕망에 눈이 멀어 그가 죽인 아다위 때문에 그 부족에게 사타디 부족 전체가 몰살당하기 전까지.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울렸다.
쿠니스가 탁자를 내려치자 묵직한 마호가니 탁자가 반파되면서 바닥에 처박힌 소리였다. 엄청난 힘이었다.
「상관없어!」
쿠니스는 다시 만난 이래 처음으로 거친 목소리를 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로 가말을 보았다.
「어차피 같은 감염원 같은 거야, 가족은. 같은 피로 연결되었지만 결국은 그게 전부지. 이름을 갖다 붙인 거뿐이야.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처럼.」
가말은 겁먹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말은 몸을 돌렸다. 그 뒤에서 쿠니스는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기 서.」
하지만 가말은 한 번 쳐다보고는 보란 듯이 가버렸다. 쿠니스는 이를 악 물었다.
***
도영과 토라는 전투복을 입은 채로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각자 생각에 빠져 오랫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문득 도영이 토라를 빤히 보았다. 그에 시선을 느낀 토라가 돌아보고 물었다.
“왜?”
“너 가말을 닮았네.”
“그럴 리가….”
자신이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까먹은 것도 아닐 테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도영이 자신에게서라도 가말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토라는 말을 멈추었다.
도영은 피곤해하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쌌다. 토라는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안아줄까?”
“꺼져.”
그랬지만 토라는 옆으로 가서 도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의외로 도영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 언제야?”
“지금?”
살다가 남자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도영은 한숨을 내쉬고 토라가 제 어깨에 두른 팔을 치웠다.
“관두자.”
토라는 순순히 팔은 치웠지만 말했다.
“타와가 후회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 거 같아서 그래.”
“언제인데?”
“마티가 미끼 역할을 하는 데 동의한 순간이겠지.”
도영은 토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갑자기 눈이 섬뜩한 안광을 품었다.
“아니, 3년 전이야. 그 새끼가 처음 잡히던 순간에 가서 죽였어야 했어.”
하필 3년 전 MCTC가 대공을 잡을 때 그는 다른 현장에 파견되어서 그곳에 가지 못했었다.
도영은 고개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목 뒤를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