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쭈니>
도영은 고개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목 뒤를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말을 알기 전후로 그의 세상은 달라졌다.
가말이 가진 따듯한 마음이 그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가말을 만나기 전에 도영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군인적인 심성에 젖어있었다. 겉으로의 그는 유쾌하고 즐거웠지만 점차 내부가 굳어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손에 묻히는 피는 테러리스트와 악당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피는 이상한 성질이 있어서, 손에 묻을수록 가슴 한구석을 마비시켰다.
반면 가말은 뱀파이어가 되고도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평화로운 영혼은 우유부단하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으로 살았다면 그게 당연했고, 더 존중받는 가치였음이 분명했다.
가말을 만나고 싶었다. 가말을 이 품에 안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따듯하다는 걸 실감하고 싶었다.
가말의 머리카락, 웃는 얼굴, 입술, 모든 게 생생한데 정작 가말만 제 품에 없었다. 그리움에 애가 끓는다는 심정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도영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
가말은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햇빛이 얼굴에 와 닿아,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햇빛이 아른거렸다.
어느 순간 얼핏 잠이 들었던가, 도영이 볼을 감싸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말.”
도영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영혼으로부터 베어져 나오는 것 같은 깊은 목소리였다.
온통 단단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몸에 비해 녹을 듯이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스치는 햇빛에 어렴풋이 벗은 상체가 스쳤다. 뼈대와 핏줄이 두드러지는 목에 기하학적인 문신이 감겨있었다.
가말은 번쩍 눈을 떴다.
소름 같은 감각이 올라와 몸을 흔들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이 거칠었다. 도영이 주었던 감각 하나까지도 전부 기억이 났다.
그때 쿠니스는 막 중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말과 잘 이야기해볼 셈이었다.
식물이 무성한 중정에 빛이 내려 기하학적인 무늬의 바닥 타일이 오후의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식물 너머로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가말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가말.”
가말은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흠칫 돌아보았다. 볼이 붉고 눈이 그렁거렸다.
그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음란한 모습이었다.
“나가.”
가말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그리고 가말은 차갑게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이 드리워진 안으로 사라졌다. 무엇 하나 널 위한 게 아니라고 말하듯이.
쿠니스는 돌아섰다.
새삼 상처받을 게 있겠는가?
가말은 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앉아있는 쿠니스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간부가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글라디에이터를 데려가.”
글라디에이터는 처형자였다. 즉, 그를 누군가에게 데려가라는 의미는….
“그 녀석을 끝내고 와.”
그 녀석, 라토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 듯 간부는 무심히 되물었다.
“라헬 대장의 소행으로 꾸밀까요?”
“그럴 필요 없어.”
간부는 소름이 돋았다. 총수의 눈에 스치는 이채에 광기가 비쳤다.
하지만 그건 정신을 놓은 광인의 광기라기보다, 말이 될진 모르지만 지극히 이성적인 광기였다. 자신이 무얼 하고,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냥 죽여.”
***
“글라디에이터를 불렀다고?”
캐시는 되물었다.
“네.”
소식을 가져온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쿠니스가 처형자 글라디에이터를 불렀다는 의미는 한 가지뿐이었다.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준비는 계속해왔지만 이 타이밍에 쿠니스가 라토를 처리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뭔가 심사가 수틀린 모양이었다.
조금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강철 같은 몸이라고 하지만 돌바닥에 누워 잔 탓에 몸이 뻐근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토는 긴장했다. 사슬에 묶여 지하에 갇혀있는 한 발소리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벽에 비치는 그림자가 점차 작아지며….
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대장님.”
모르는 여자였다.
이십 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자였는데, 영원교 여신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영원교 여자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무엇보다 눈빛이 ‘정상인’이었다.
다만 아무리 봐도 낯선 얼굴이었다.
라토가 경계하는 눈빛을 읽은 여자는 경찰 앞에서처럼 두 손을 들고 말했다.
“그거, 풀어드려도 괜찮을까요?”
여자의 손가락에 열쇠고리가 끼워져있고 거기서 열쇠가 늘어졌다.
라토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자 여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라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여자도 바로 멈추었다.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그에 라토가 별말하지 않자 여자는 조금씩 다가와서 그의 목에 둘러진 쇠목걸이의 잠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들 수가 없어서….”
라토는 직접 목걸이를 풀어냈다.
“일어나세요.”
여자는 라토를 일으켜주려고 했다.
“와, 엄청 무겁네요.”
라토는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러자 여자는 새것으로 보이는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이거요. 입으세요.”
라토는 티셔츠를 입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이즈가 딱 맞았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어서 기척을 확인하고 라토로서는 다시 되짚어갈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한 길을 갔다. 복도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방 사이를 지나가기도 하면서.
신기한 건 여자는 언제, 누가, 어떻게 지나갈지 다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꼭 이 요새가 의인화된 존재 같았다.
마침내 라토로서는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자 바깥이 나왔다.
여자가 말했다.
“총수는 대장님을 죽일 거예요. 사도님이 보고 있는 이상 직접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라헬 대장한테 넘긴 거죠. 적당한 때에 처리하고 ‘라헬 대장이 했다.’고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여자는 라토를 살짝 밀었다.
“하지만 총수는 사도님은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이대로라면 대장님이 사도님의 발목을 잡으시겠죠. 걱정이 되시겠지만 제발 가세요. 저희가 반드시 사도님을 탈출시키겠습니다.”
그러고는 여자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라토는 물었다.
“넌 누구야?”
여자는 반쯤 돌아서서, 총명한 눈으로 라토를 쳐다보았다.
“이투하. 자유를 원하는 모두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우리도 이투하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
“이투하의 대장이 달아났다고.”
쿠니스는 억양의 높낮이가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 앞에 서있는 캐시는 짐짓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파이가 있는 거 같습니다. 색출 중에 있습니다.”
쿠니스는 남들보다 시간의 흐름이 느린 것처럼 천천히 손을 들어 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괴었다.
“이상한 일이지. 하심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네가 이투하의 대장을 탈출시킬 만한 스파이가 있는지 몰랐다고?”
캐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쿠니스는 손가락을 내렸다.
“실망이군. 라토 사타디가 얼마나 중요한 인질인지 알고 있으면서 놓쳐버리다니. 널 믿고 맡겼는데.”
“송구합니다.”
쿠니스는 일어났다.
“대가는 알고 있겠지.”
물론, 이곳의 룰은 잘 알고 있었다.
“이투하의 대장을 잡아오지 못하면 네가 노예가 되는 거야.”
캐시는 묵례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쿠니스는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캐시는 좀 더 있다가 허리를 들었다. 주변은 쿠니스가 나간 그대로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캐시는 옆에 서있는 부관에게 말했다.
“준비해. 내가 직접 쫓을 테니.”
***
캐시는 바지의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몇 달 전 도영의 팀이 뛰어내렸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라토는 붙잡지 못했다. 붙잡을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 지금쯤이면 무사히 요새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직 멀었군, 나도.’
임무 중에 마주친 남자 때문에 흔들려서 계획을 그르칠 수도 있는 선택을 하다니 말이다.
유일한 위안은 그 남자가 공적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투하의 대장 라토 사타디는 죽은 상태보다 살아있는 편이 더 공공의 이익일 테니까.
탁탁탁탁.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다른 간부의 부대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개중 얼굴이 낯익은 십인대장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무기를 주십시오.”
캐시는 허리에 패용하고 있는 검을 뽑아 던졌다.
철컹.
검이 돌바닥에 부딪혀 금속성을 울렸다.
***
복도에 서있는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로 판데르발트가 거침없이 걸어갔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뒤따르는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장식품 하나도 사치스러운 방 가운데 하인들이 소파를 중심으로 서있었다.
그리고 소파 가운데 캐시는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마치 주인처럼.
캐시가 입고 있는, 유두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얇은 살구 색 실크 원피스는 그가 직접 골라 준비시키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도를 보면 누구도 그녀가 노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판데르발트가 굳이 원래는 라헬의 궁이었던 데서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주인이었던 곳에서 노예로 떨어진 데에 대한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캐시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발정 난 비버처럼 찍찍거리는 게 나랑 하고 싶어서 안달 난 건 줄 알았지.”
그녀는 아직 라헬이었고, 라헬이라면 위치가 바뀌는 정도에는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
판데르발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들이 다가와 캐시를 붙잡았다.
그리고 판데르발트가 그녀의 볼을 후려쳤다.
하지만 캐시가 볼 앞에서 그 손을 잡아 막았다. 손을 잡아당기는 힘에 남자들이 우르르 끌려온 상태였다.
캐시는 여봐란듯이 빈정거렸다.
“내 직급이 좀 바뀌었다고 네 거기를 핥아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
순간 경비병들이 그녀를 붙잡아서 소파 바닥에 무릎 꿇렸다.
판데르발트는 코웃음을 쳤다.
“물어뜯길 걸 아는데 미쳤다고?”
경비병들이 캐시를 소파에 억눌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 거기엔 이가 달려있지 않지?”
판데르발트는 뒤로 다가서며 말했다.
“루아스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다는 헛소리들을 하지만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지.”
판데르발트는 정말 역겹다는 투였다.
캐시는 소파에 억눌린 채로 웅얼거렸다.
“나 목이 결리는데 자세 좀 바꿔줄 수 있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상황에 닥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로 하기 싫었다.
그녀가 특별히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런 남성우월주의 파시스트에게 당하는 일은, 차라리 사지 어딘가가 잘리는 쪽이 더 나았다.
“목이 부러져도 노예한테는 요구할 권리 따윈 없지.”
캐시는 최대한 고개를 돌려 눈 끝으로 판데르발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주인님의 자비에 부탁하는 거라면?”
“그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부탁해야겠지.”
캐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엿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