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99화 (99/110)

99화<쭈니>

캐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엿 먹어.”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몸이 돌려지며 퍽 소리가 울렸다.

캐시는 얼굴이 거의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먹으로 가격당한 얼굴이 터진 것처럼 얼얼했다.

이쪽도 쓸데없이 나이만 많이 먹어서 힘이 셌다.

캐시는 고개를 원위치 하고 웃었다.

“더 때려봐. 이 정도로 내가 흥분할 거 같아?”

판데르발트는 캐시의 머리채를 잡아서 뒤로 홱 젖혔다. 하지만 캐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싱그르 웃었다.

“어디 이투하의 반이라도 하나 볼까? 이투하는 정말 끝내줬지. 내 인생에 다시없을 남자였어. 이투하 이후로는 어떤 녀석도 성에 차지 않을 거 같아서 큰일이야.”

“난 네 성에 차지 않을 거야.”

판데르발트는 별로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레기온이 정말 또라이인 게, 노예가 되면 정말 고대 시대 노예 같은 온갖 일을 다 겪도록 내버려두면서 또 공을 세우면 간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충분히 열어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보통 간부까지 올라갈 정도로 흉악한 심성을 가진 녀석들은 노예에서 간부가 되자마자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게 레기온 내에 긴장감이 유지되는 이유였고, 갈수록 더 잔인한 간부진이 탄생하는 이유였다.

판데르발트가 캐시의 머리채를 더 휘어 감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심은 눈치채고 있었지? 네가 MCTC의 개라는 걸.”

캐시는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이 정도 이야기에 심장이 쿵쾅댈 정도면 애초에 스파이 노릇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도신문일 수도 있었다.

판데르발트는 훗 웃었다.

“그래서 급히 처리해버렸겠지. 총수님께서 MCTC의 개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 같아?”

캐시가 무어라 하려고 했지만 판데르발트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잘 숨겼더군. 그래서 좀 걸렸지. 하지만 하심을 죽인 데서 거의 확신했지. 하심은 배신자일 리 없었거든. 왜냐?”

판데르발트는 보란 듯이 말했다.

“하심한텐 병든 딸이 있거든. 총수님은 하심에게 루아스 바이러스를 약속하셨지. 하심은 제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할 녀석이야. 정부가 바이러스를 규제할 걸 아는데 정부 편을 들 리가 없지.”

“그거 감동적인 스토리네.”

캐시는 빈정거렸다.

“하지만 정부가 방법을 바꿨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일단 우리를 해체하는 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고.”

판데르발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캐시가 하는 말을 들었다.

캐시는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병든 여자아이 하나 루아스로 만드는 게 대수야? 하심을 포섭해서 우리 사이를 분탕질칠 수 있다면. 그리고 보라고. 정확히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과연 네가 괜히 간부 자리에까지 오른 건 아니겠지. 하지만 넌 이투하 대장을 놓아줬어.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하지.”

“죽이고 싶지 않았어.”

캐시는 순순히 말했다.

“그런 남자한테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잖아.”

“아, 그래? 그래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놓아줬다?”

“맞아.”

판데르발트는 캐시의 머리를 던지듯이 놓았다.

“신이 왜 여자한테 입을 주셨는지 모르겠어. 아래 구멍으로 충분했을 텐데 말이야.”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족히 수십 명은.

판데르발트는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는 웃음을 지었다. 푸른 눈에 번들거리는 윤기 같은 웃음기가 돌았다. 비정한 악어의 눈이었다.

“걸레짝이 된 네 시체를 MCTC의 함선에 던져주지.”

캐시는 떨리는 얼굴로 웃었다.

‘빌어먹을.’

***

급한 마음에 캐시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라토의 성격이었다.

라토는 죽으면 죽었지 성격상 가말을 이곳에 혼자 두고 먼저 탈출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라토는 다시 되돌아왔다.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기척이 들렸다. 라토는 재빨리 모퉁이 너머로 숨었다.

복도 너머에서 레기온 대원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쪽으로는 오지 않는 게, 그를 찾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두르긴 하는데 침입자가 있어서는 아닌 것 같고, 왠지 다들 좀 들뜬 얼굴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그에게도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라헬….”

“파티….”

“건방진 년이….”

얼핏 대화를 들어보니 라헬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토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가말을 찾아야 했다.

라토는 당장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만….

라토는 심각한 얼굴로 레기온 대원들이 간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쪽은 라헬의 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겨우 풀려난 곳을 제 발로 다시 찾아가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어디 있겠냐마는….

‘레기온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거기에 따라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라토는 은밀하게 라헬의 궁으로 갔다.

수풀 뒤에서 숨어서 보자니, 경비병들도 입구를 지키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바깥보다 안의 동향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안에서 무슨 일이 있기는 있나 보군.’

사방을 살피고 라토는 궁의 뒤쪽으로 갔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구조를 유심히 관찰했기에 어디가 어디로 통하는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박차고 올라 벽을 넘어갔다. 사실 경비병만 없으면 이 정도 벽은 일찍이 넘나들 수 있었다.

그런데 궁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원래 라헬이 번잡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이곳에는 다른 곳에 비해 사람이 적긴 했지만, 이건 기분이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둘러보다 보니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지긴 했다. 다른 데는 지나치게 조용한 데 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 같은.

그게 상당히 인위적이었기에 라토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갔다.

그러자 레기온 대원들이 라헬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꼭 제 방처럼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모습이 역시 보통 때 같진 않았다.

여러모로 무슨 일이 있는지 꼭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내부를 보지?’

라토는 고민하다가 문이 닫혀있는 옆방에 시선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옆방은 드레스룸을 통해 라헬의 방과 연결됐다.

하지만 왜인지 거의 비밀의 문처럼 숨겨져있었고-라토는 그 이유가 옆방이 원래는 하렘의 남자들이 대기하는 장소여서 그렇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궁에 대해 잘 모르는, 특히 남자들이 드레스룸까지 신경을 쓸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라토는 옆방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에 색색의 여자 옷들이 걸려있었다.

라헬의 방 쪽으로 다가가자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뱀파이어도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조심히 문을 살짝만 열어보았다.

그리고 얼이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작가가 제 세계에 심취한 작가주의적 아방가르드풍의 그림을 봤다 한들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

라헬 그 마녀 같은 여자가 입다 만 옷, 아니 차라리 안 입은 것보다 못한 옷을 입고 레기온의 경비병들에게 붙잡혀있었다.

아무래도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직전 같은데, 라헬이 당하는 모습도 상상이 안 되거니와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전후맥락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때 침대 아래 서있는 판데르발트가 말했다.

“넌 이투하 대장을 놓아줬어.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하지.”

그제야 라토는 좀 이해됐다. 아무래도 라헬이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는 자신을 놓아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 여자가 놓아준 거였나?’

그럼 그 정체 모를 영원교 여자는 라헬의 심부름꾼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런 남자한테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잖아.”

라헬의 말에 라토는 기가 찼다. 저건 어딜 봐도 거짓말이잖은가.

판데르발트도 빈정거리는 투로 되물었다.

“아, 그래? 그래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놓아줬다?”

“맞아.”

“신이 왜 여자한테 입을 주셨는지 모르겠어. 아래 구멍으로 충분했을 텐데 말이야.”

그때 문이 열리고 족히 수십 명은 되는 남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판데르발트는 즐거워하면서 말했다.

“당해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걸레짝이 된 네 시체를 MCTC의 함선에 던져주지.”

라토는 눈 밑이 움찔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이 나갈 뻔했지만, 라토는 애써 자신을 막았다.

이건 레기온 내부의 사정이었다.

라헬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자신을 놓아줘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몰라도, 라토에게는 최우선으로 할 일이 있었다. 가말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약한 여자도 아니니까 알아서 할 것이다.

라토는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서 궁에서 빠져나왔다.

***

쾅.

사슬이 당겨져 캐시는 뒷머리가 침대 프레임에 부딪쳤다. 목을 고정해놓고 아래쪽만 사용할 셈 같았다.

무슨 대단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장사진을 이룬 남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먼저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캐시의 다리를 끌어당겼다.

캐시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다른 남자가 한쪽 다리를 잡아 고정했다.

“그럼 내가….”

캐시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홱 다리를 끌어당겼다가 로켓처럼 다리를 쏘아 남자를 걷어찼다.

“힘을 못 쓸 줄 알아!”

캐시의 힘이 워낙 셌기에 뻑 소리가 나며 남자가 거의 공처럼 굴러갔다.

이어서 캐시는 멈추지 않고 자유로워진 다리를 휘둘러 다른 쪽 다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를 후려 찼다.

남자는 방어하기 위해 타이밍에 맞게 손을 올렸지만 그 힘을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 침대 아래에 내리꽂히다시피 떨어졌다.

캐시는 얼른 몸을 일으켜 침대 프레임을 잡고 뛰어, 제 목에 걸린 사슬의 끝을 잡고 있는 남자의 목을 다리로 감아 뒤집었다.

그리고 판데르발트를 보며 보란 듯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침대로 뒤집어진 남자의 목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총수님과 직접 대화하겠어.”

제 쪽이 밀리고 있었지만 판데르발트는 연극 관람이라도 온 듯이 느긋하게 앉아 말했다.

“총수님이 너와 이야기할 생각이 있었다면 내게 던져줬을까?”

그리고 남자들에게 말했다.

“잡아.”

캐시는 먼저 덤벼드는 루아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드는 루아스를 팔꿈치로 찍고 지지대 삼아 다른 루아스를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한쪽 팔이 억류되어있어서 금방 제압당했다. 남자들은 침대 매트리스에 캐시의 모양을 찍듯이 억세게 내리눌렀다.

“흐아아….”

캐시가 일어나려는 것처럼 기합을 모으자 남자들이 혼비백산해서 외쳤다.

“더 눌러!”

등에 바위산을 올려놓은 것 같았지만 캐시는 침대를 짚은 팔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부르르 떨리면서 천천히 침대에서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놀라서 거의 그녀 위에 올라타면서 내리눌렀다.

다시 말해두지만 캐시는 혼자 힘으로 밑바닥에서 간부 자리까지 올라왔다.

캐시는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젖혀 남자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남자들은 엉성하게 얽혀있던 공처럼 풀어지며 우르르 넘어지고 날아갔다.

그 틈에 캐시는 사슬을 잡았다. 팔에 근육이 넘실거렸다.

우득, 우드드득.

벽이 깨지면서 사슬이 뽑혀 나왔다. 캐시는 그걸 휘둘러 막 일어나는 루아스 네댓을 후려쳤다. 피와 살점이 터지며 남자들이 날아갔다.

이 상황에도 판데르발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개가 따로 없군.”

캐시는 사방에 빼곡한 남자들을 보았다.

“전부 상대해준다고? 덤벼봐, 어디!”

크게 외치는 것도 아닌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사방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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