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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00화 (100/110)

100화<쭈니>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천천히 침대에서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놀라서 거의 캐시 위에 올라타면서 내리눌렀다.

하지만 다시 말해두지만, 캐시는 혼자 힘으로 밑바닥에서 간부 자리까지 올라왔다.

“하아!”

캐시는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젖혀 남자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남자들은 엉성하게 얽혀있던 공처럼 풀어지며 우르르 넘어지고 날아갔다.

그 틈에 캐시는 사슬을 잡았다. 팔에 근육이 넘실거렸다.

우득, 우드드득.

벽이 깨지면서 사슬이 뽑혀 나왔다. 캐시는 그걸 휘둘러 막 일어나는 루아스 네댓을 후려쳤다. 피와 살점이 터지며 남자들이 날아갔다.

이 상황에도 판데르발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개가 따로 없군.”

캐시는 사방에 빼곡한 남자들을 보았다.

“전부 상대해준다고? 덤벼봐, 어디!”

크게 외치는 것도 아닌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사방을 때렸다.

***

캐시는 고개를 들었다. 온몸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그럼에도 판데르발트는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서있었다.

“허투루 간부 자리까지 온 건 아니었군.”

캐시가 손을 놓자 의식이 없는 채로 멱살이 붙잡혀있던 남자가 쿵 하고 떨어졌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적어도 일대일로는. 넌 네 혈통의 이름을 모르니까.”

판데르발트가 간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 잔악함 때문이었다. 사실 라헬은 갖다 댈 수도 없을 만큼 이 뱀파이어는 사악하고 잔인했다.

“걱정 마. 난 너와 싸울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판데르발트는 무심히 말했다. 캐시는 비웃었다.

“그래? 그럼 순순히 죽어주려고?”

그 타이밍에 문이 열렸다. 그런 데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캐시는 이상해서 문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방 안 풍경에 놀란 얼굴이었다.

영원교 신도의 자식들이었다.

판데르발트는 말했다.

“넌 절대 어린애들은 가지고 놀지 않지. ‘가지고 놀 게 없다’는 이유로.”

“오래 버티지 못하는 장난감은 재미없어.”

캐시가 그러거나 말거나 판데르발트는 뚜벅뚜벅 걸어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한때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지. 강한 건 무엇인가? 대답할 필요는 없어. 난 이미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거든.”

“…….”

캐시는 아무 말하지 않고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판데르발트는 계속 말했다.

“진짜 강하다는 건 약점이 없는 거야. 하심에겐 딸이 있고 너에겐 어린애들이 있지. 외람되지만 총수님께도 가말 님이 있고. 하지만 내겐 그런 게 없어.”

그러면서 판데르발트는 아이들 옆에 섰다.

“그래서 내가 여기 서있는 거야.”

그리고 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몇 살이지?”

태어나면서부터 뱀파이어를 보고 살아온 아이는 뱀파이어를 특별히 두려워하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 압도되어 주저주저 말했다.

“여, 열넷…이요.”

“충분하군.”

판데르발트는 캐시를 보았다.

“네가 저항하면 이 아이가 대신 당할 거야.”

“영원교의 아이잖아. 영원교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부모가 직접 건네줬어. ‘축복’을 달라고.”

캐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축복 좋아하는군. 내가 직접 죽여버릴 거야.”

캐시의 상사는 스파이 노릇을 하기에 그녀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격’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스파이라면 당장 눈앞에 일어나는 불의는 보고도 참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잘 참아냈는데 이 결정적인 순간 일을 치르고 말았다.

작전은 날아갔지만 속은 백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판데르발트는 피식 웃었다.

“너야 전부 상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이 아이들은 한 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그제야 남자들이 다가서도 캐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판데르발트는 진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한 남자가 캐시가 입고 있는 얇은 드레스의 앞섶을 잡아 힘들일 것도 없이 죽 찢어냈다. 옷이 벌어지면서 크고 둥그런 맨가슴이 드러났다.

이어서 캐시는 힘에 떠밀려 침대로 넘어졌다.

다가온 판데르발트는 캐시의 얼굴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네가 MCTC의 개인 걸 몰랐을 때도 왠지 날 자극하는 게 있었지. 우리 중 하나인 척하지만….”

그러면서 침대에 팔을 대고 턱을 받치고는 연인에게 하듯이 속삭였다.

“괴롭히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보통 그런 느낌은 틀리지 않아.”

그 눈 속에 있는 건 욕망이었다. 단순한 성욕을 넘어 가학적인 지배욕, 소유욕, 쾌감이 뒤섞여 기이한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고는 판데르발트는 일어나 더 본격적으로 구경하려는 듯이 아래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때 분위기에 압도된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

캐시는 자신을 점령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별거 아니니까.”

그 난리 통에도 사수했던 팬티가 찢겨져나갔다. 한 남자가 캐시의 허벅지를 끌어내렸다.

스파이 노릇을 하면서 온갖 볼꼴, 못 볼꼴을 보아왔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어차피 뱀파이어인 데 대한 이점이라고는 이런 거 외에 또 있겠는가?

그러니까 캐시는 최대한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판데르발트가 원하는 건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일 테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냥 고문을 받고 말지, 이건 진짜 거지 같네.’

왜 여자 거기엔 뚜껑이 없단 말인가? 마음 내키는 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였다면 애초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 중 80%는 해결되었을 텐데.

캐시는 이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멀어지기 위해서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래서 통증이 느껴졌다.

캐시는 욕설을 내뱉었다.

“좀 살살 못해?”

남자는 순간 움찔하더니만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캐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인상을 썼다. 미간에 긴 주름이 점차 깊어졌다.

갑자기 캐시가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판데르발트는 훗 웃고는 말했다.

“그래. 차라리 받아들이는 게 덜 고통스러울 거야.”

남자가 허리를 들썩이는 몸짓을 취했다. 캐시는 고통스러운 듯 남자의 옷을 꽉 말아 쥐었다.

“흣….”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푸르르 떨었다.

그리고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손이 가슴을 뚫고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판데르발트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스르르 옆으로 넘어가고, 그 너머로 똑바로 판데르발트를 쳐다보는 캐시의 붉은 눈이 이글거렸다.

“다음은 네 차례야.”

퍽.

갑자기 판데르발트 뒤에 있던 경호원이 날아갔다. 판데르발트가 놀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타난 라토가 그의 목을 팔뚝으로 휘감아, 공격하려고 자세를 잡는 왼쪽 경호원을 후려쳤다.

그러자마자 덤벼오는 다른 남자를 걷어찼다. 남자는 엄청난 거리를 날아서 굴러갔다.

판데르발트가 으르르 울부짖으면서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사이, 남자들을 제압하는 라토는 압도적이었다.

캐시는 오히려 라토가 저번에 자신을 봐주었다는 걸 알았다. 라토는 그녀를 죽일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라헬을 죽이면 일이 복잡해질 테니.

쾅.

라토는 쿵이 아니라 그런 소리가 나도록 판데르발트를 바닥에 내리눌렀다.

마침내 사방이 정리되고 침묵이 감돌았다.

“왜 요새를 빠져나가지 않고…!”

캐시가 발작적으로 말하려는데 라토가 말했다.

“묶을 거 줘.”

일단 캐시는 그녀를 묶는 데 썼던 사슬을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판데르발트는 와락 외치려고 했다.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줄…!”

“진부한 대사는 하지도 마.”

그러면서 라토는 이불을 찢어 뭉쳐서 입에 집어넣고 재갈을 채웠다. 판데르발트는 잔뜩 성이 나서 웁웁거렸다.

사슬로 판데르발트를 묶고 난 라토는 캐시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MCTC의 스파이라고?”

결국, 라토는 그냥 가지 못했다. 그는 그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가버리기에는 라헬에게는 석연찮은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스파이라니, 그건 상상 밖이었다.

“내 방으로 가야 해.”

캐시는 대답하지 않고 문으로 가서 바깥의 소리를 살폈다. 그런데 라토가 뒤에 오더니 전혀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물었다.

“뭐해?”

“쉿.”

캐시는 당장 조용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라토는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문고리를 잡고 활짝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어.”

과연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탈출하려는 걸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은.

경비병들이 모두 바닥에 의식을 잃고 기절해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처리했는지는 분명했기에, 캐시는 기가 차서 라토를 보았다.

“지금까지 샌드백 노릇만 하고 있어서 이렇게 강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네.”

라토는 판데르발트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나오면서 한쪽 어깨만 으쓱였다.

처음 그들 쌍둥이가 섬 밖으로 나갈 때 가말은 누가 둘을 괴롭히진 않을지 때리진 않을지 속이진 않을지 전전긍긍했다.

둘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깥세상에 대한 상식이 없다는 데 유난히 불안해했고, 사실 본인들도 그게 핸디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바깥에 나와보니, 주먹이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 감히 그들 쌍둥이를 속이고 괴롭힐 수 있는 존재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캐시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밖으로 나갔다. 라토는 힘 좋은 마당쇠가 쌀부대를 들듯이 판데르발트를 어깨에 들쳐 업고 따라왔다.

둘은 캐시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님!”

갑자기 뒤에서 집사장이 놀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캐시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판데르발트가 붙인 녀석답게 워낙 인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라토가 보이지 않아, 캐시는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어느새?’

그사이에 집사장이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 무사하셨군요. 다행….”

캐시는 고갯짓했다.

“잡아. 그 녀석 끄나풀이야.”

“네?”

집사장이 어리둥절해하며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퍽 소리가 나면서 집사장이 족히 30m는 날아가 데굴데굴데굴 굴렀다.

캐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감정이 담긴 거 아냐?”

여전히 판데르발트를 어깨에 얹은 채로 나타나있는 라토는 주먹을 내리고 무심하게 말했다.

“성가시게 구는 게 짜증났거든.”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캐시는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받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집사장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자 라토가 남은 손으로 집사장의 목덜미를 잡아서 질질 끌고 따라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캐시는 찬장을 열어 틈새에 끼어있는 얇고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서 스티커처럼 얇은 무전기를 꺼내 귀 뒤에 붙이고 말했다.

“오로라는 남쪽에서 뜨지 않는다. SAZ07183입니다. 커버가 날아갔습니다. 플랜 B, 프린스 작전을 실행합니다.”

바깥을 살피고 캐시를 본 라토가 말했다.

“정말 놀랄 노 자군. 대공이 MCTC의 비밀요원인 한이 있어도 그쪽은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캐시는 책상 아래로 몸을 숙이고 뭔가 챙기면서 말했다.

“안타깝게도 대공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만약 잡히면 우리는 두 팔다리와 혀가 잘린 채 돼지우리에 던져 넣어지는 꼴이 차라리 나은 경우가 될 거란 의미지.”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런 끔찍한 상상력은 어디서 오는 거야?”

캐시는 책상 아래서 고개를 빼고 코웃음을 쳤다.

“척 부인의 고사 몰라? 아무리 착한 뱀파이어의 입장에서 봐도 그쪽은 너무 순진해 빠졌어.”

“착한 뱀파이어? 이봐,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 안 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비는 대주나?”

“널 죽였어야 했어.”

책상을 돌아 나온 캐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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