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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01화 (101/110)

101화<쭈니>

“널 죽였어야 했어.”

책상을 돌아 나온 캐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내 임무는 단 하나였어. 레기온의 완전한 해체. 그래서 난 조직 내부에서 HVT(고가치 표적)들을 경쟁자를 제거한다는 명목이나 온갖 사고사로 위장해서 처리해왔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적의 타이밍에 대공을 제거할 예정이었지.”

그러고는 캐시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실패했지. 그걸 위해서 지난 10년간 불사조 타령을 하는 사이코 파시스트 미친년 노릇을 했는데 말이야.”

그 어조가 하도 신랄해서 라토는 진심으로 유감을 느꼈다.

“그럼 죽이지 그랬어.”

라토가 캐시를 응시하며 말하자 캐시도 그를 보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공기가 흘렀다.

“괜찮아?”

갑자기 라토가 물었다.

“뭘….”

캐시는 어리둥절해서 묻다가 아까 당할 뻔했던 일을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기 들어올 때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각오 정도는 했어.”

그리고 건 홀스터를 집어 들었다.

“아무튼 지금쯤이면 드페르 소령님의 팀이 요새에 들어왔을 거야.”

***

“소령님.”

도영은 돌아보았다.

한 중사였다.

하수구의 어둠 속에 모두 검은색 전투복으로 무장하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지만, 팀원들은 몸집만 보고도 각자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번 작전에는 인간인 대원들도 다수 참여했고, 한 중사도 그중 하나였다.

콜사인은 벌처(Vulture), 가말이 이 요새에 인질로 잡힌 지 반년 만에 드디어 성사된, 전방위적으로 팀들을 투입한 거대한 작전이었다.

“아뇨, 됐습니다. 무전에서 잡음이 들려서요.”

한 중사는 귀 뒤를 두드리며 말했다. 드래건이라도 살 것처럼 커다란 동굴에 목소리가 울렸다.

“가죠.”

도영은 말하고 하수구의 물을 헤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를 무장한 팀이 따랐다.

***

캐시는 건 홀스터를 차면서 창밖을 살폈다.

“하지만 소령님의 팀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그리고 그들은 당장 탈출해야 했다. 지금쯤이면 캐시가 MCTC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쿠니스가 눈치챘을 테니까.

“그러니까 중간까지 가말 씨를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러고는 캐시는 문으로 가서 살짝 열고 바깥을 살폈다. 라토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옷을 갈아입는 게 낫지 않아?”

캐시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라토를 돌아봤다가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그리고 기가 차단 표정을 지었다.

“지금 옷이 중요해?”

“뭐.”

라토는 그답지 않게 어물쩍 대답했다. 캐시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어 입매를 휘며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남자네. 이 상황에도 내 엉덩이가 눈에 들어오는 거 보면.”

라토는 바로 불편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뛰다가 걸려 넘어질까봐 그런 거야.”

“솔직히 말해도 돼. 남자가 여자 엉덩이 보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라토는 갑자기 이상한 생물을 보듯이 캐시를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모르겠군.”

“진짜도 가짜도 없어.”

난데없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아보자, 어느새 재갈이 풀어져서 판데르발트가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한테 진짜나 가짜가 있을 거 같아? 하이퍼리얼리즘. 원본은 한참 전에 없어지고 오로지 가짜가 가짜를 복제한다. 오래된 철학은 여전히 유효한 거지.”

캐시가 조용히 판데르발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라헬이 아니라고 해서 아예 다른 사람일 거 같아? 난 남자들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아주.”

그러면서 꽉 쥐는 주먹에, 밤길의 치한이 오히려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 것 같은 혈관이 꿈틀거렸다. 판데르발트도 상황 판단이 되는지 입을 다물었다.

캐시는 재갈을 다시 제대로 씌우고 그를 묶고 있는 사슬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풀어질까봐.

사슬이 풀어져서 판데르발트가 그들에게 덤비는 일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러면 정말 그를 죽여버릴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판데르발트는 만약 대공을 붙잡지 못할 경우 재판정에 세울 수 있는 가장 큰 공범이었다. 최대한 살려서 데려가야 했다.

이 요새를 훤히 알고 있는 캐시 덕분에 가말의 방까지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방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문제였다.

모퉁이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색을 살피던 판데르발트가 뒷머리를 벽에 쳐서 소리를 냈다.

“너 이…!”

캐시가 돌아보고 이를 가는데 바로 경비병이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거기 누구야?”

갑자기 캐시가 뒤로 풀썩 쓰러졌다. 끈이 떨어진 인형인 양.

하도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라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채 캐시는 파르르 떨면서 더듬거렸다.

“도와….”

이런 진부한 수법에 속는 녀석이 있을까 싶은데, 그라도 속을 것 같았다. 연기력이 하도 뛰어나서.

“무슨 일….”

경비병이 경계하면서 다가왔을 때였다. 캐시는 전광석화의 속도로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목에 팔을 감아 기절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경비병이 무전을 치려고 하는 순간 어느새 그 앞에 나타난 라토가 경비병을 걷어찼다.

쿵!

엄청난 파워에 경비병은 반대쪽 벽에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캐시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인간이었으면 즉사야.”

“인간이 아니니까 됐잖아.”

라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뻗었다. 캐시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퉁이에서 판데르발트를 끌고 나왔다. 머리가 헝클어진 판데르발트는 시선으로 그녀를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라토는 문으로 가서 살짝 문을 두드렸다.

“마티.”

***

달이 비친 연못처럼 둥그런 기름 램프에 성냥불이 닿았다. 그리고 심지에 가분히 불이 타올랐다. 실크 침구에 그 빛이 비쳐 윤기가 미끄러져 내렸다.

푹신한 침대에 앉아있는 가말은 영원교 여자가 램프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자가 돌아보고 말했다.

“주무세요.”

“그래.”

가말이 대답하고 누우려고 하자 여자가 베개를 내려주었다.

그때였다.

쿵.

밖에서 평소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귀에도 들릴 정도라, 여자가 문을 돌아보고 뭐라고 하려고 했다.

“쉿.”

하지만 가말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가로 다가갔다.

똑똑.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마티.”

그리고 들려오는 건 라토의 목소리였다. 가말은 당장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라토가 보였다.

“라….”

그가 무사한 걸 보고 말하려는데 라토가 먼저 문틈으로, 놀랍게도 묶여있는 판데르발트를 끌고 들어왔다.

“잠깐 들어갈게.”

그리고 캐시가 문을 닫고 따라 들어왔다. 가말은 한 걸음 물러나면서 놀란 눈으로 캐시를 보았다.

“왜 이 여자랑….”

말하다가 캐시가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옷은 왜 이래?”

캐시는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내밀고 말했다.

“전 MCTC의 정보원입니다.”

가말은 미간을 찌푸리고 라토를 보았다.

“이건 무슨 장난이야?”

“장난이 아냐.”

라토가 말하자마자 캐시가 끼어들었다.

“드페르 소령님의 팀이 요새에 들어왔을 겁니다.”

도영 이야기가 나오자 가말의 눈이 흔들렸다.

‘도영이….’

오고 있다, 그녀에게.

캐시가 덧붙였다.

“하지만 팀이 들어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 가말 씨가 중간까지 나가셔야 합니다.”

가말은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일단 라토가 믿는다면 그럴 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을 테고, 달라진 말투가 설득력이 있기는 했다.

게다가 묶여있는 판데르발트를 보고서는,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판데르발트는 오만한 뱀파이어였다. 그녀를 속이겠다고 이런 연극에 동참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치욕스러운 몰골로.

여태까지 라헬이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녀가 실은 아군이라는 데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래도 어떤 건 너무 심했었다고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캐시는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는 가말 씨를 탈출시키는 데 가용 가능한 병력이 없습니다.”

“혼자서도 빠져나갈 수 있어.”

가말이 말했지만 캐시는 고개를 저었다.

“레기온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그러고는 캐시는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드비나라고 합니다.”

그녀가 쳐다보는 방향을 따라 가말도 돌아보았다. 잠자리를 봐주던 영원교 여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넌….”

라토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를 지하 감옥에서 빼내준 여자였다.

드비나는 라토를 보고 쓰게 웃었다.

“나가지 않으셨더군요.”

라토의 성격을 좀 더 생각했더라면 그런 수는 쓰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제 실책이었다고 생각하며 캐시가 말했다.

“드비나가 가말 씨를 모시고 갈 겁니다.”

가말은 드비나를 보면서 말했다.

“이 아이는 영원교잖아.”

“정확하게는, 2세입니다.”

캐시는 정정했다.

“2세?”

“부모가 영원교인인 아이들이죠.”

그 말에 가말과 라토는 드비나를 보았다. 그녀는 표정이 담담하고 눈빛이 맑았다.

캐시는 말했다.

“대개 영원교 안에서 태어났고 이 밖의 세상은 모르죠.”

“가말 님 전에 ‘사도’라고 데려왔던 여자 뱀파이어가 있었어요.”

드비나가 갑자기 말했다.

“자진해서 온 거 같았죠. 우린 정말 극진하게 사도를 모셨어요. 저도 그 여자가 정말 메시아를 낳을 위대한 사도라고 믿었죠, 어느 날 그 방에 불려간 제 동생이 돌아오지 않기 전까지는.”

드비나의 눈이 슬퍼졌다.

“전 부모님한테 물었어요. 왜 제나가 돌아오지 않느냐고. 어머니는 저한테 그랬죠. ‘사도께 선택받아 그분의 일부가 되었다’고.”

자극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라토는 역겨움이 치솟았다. 바깥에선 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영원교 내부에서는 인신공양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미친 눈을 보면서 난 꿈에서 깨어났어요.”

그건 정말 미몽에서 깨어난 자의 명현한 눈빛이었다.

“슬펐겠구나.”

라토가 저도 모르게 말하자 드비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뻤어요,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점에서는.”

“…….”

“꿈에서 깨어나기 전엔 뭔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조차 느끼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정신이 드니 한 가지는 알겠더군요. 만약 신이 있다면 저희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바라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드비나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만약 그런 신이라면, 난 필요 없다고.”

그러고는 드비나는 애정이 담겨있는 눈으로 캐시를 보았다.

“라헬 대장님께서 사실 그 여자 뱀파이어는 임신할 수 없다는 걸 밝혀주셔서 쫓겨났죠.”

그때 라토와 캐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왜인지, 라토는 캐시가 그 여자 뱀파이어를 죽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마신 죄 없는 피만큼 죄 많은 피를 흘리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드비나에게는 일부러 그 사실을 숨긴 것 같았다.

라토는 가말을 데리러 오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폭탄은?”

아까 라토는 물었다.

“마티의 가슴에 폭탄이 있는 이상 탈출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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