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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02화 (102/110)

102화<쭈니>

“폭탄은?”

라토는 물었다.

“마티의 가슴에 폭탄이 있는 이상 탈출할 수 없어.”

“폭탄을 터뜨리지 못하게 하면 돼.”

캐시는 간단하게 말했다. 너무 간단하게.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지금까지….”

“영원교를 이용하는 거야.”

캐시는 라토의 말을 잘랐다.

“영원교한테 가말 씨를 데리고 나가게 하는 거지. 영원교까지 다 날려버릴 셈이 아니라면 대공은 그걸 터뜨릴 수 없을 테니까.”

라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영원교를 방패로 삼겠다는 거잖아.”

“맞아.”

캐시는 지극히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은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테러단체와 손잡은 사이비 교도인들도 포용하는 인류애인지, 네 마티인지.”

과연… 비정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우선순위 하나는 정확히 알고 있는 여자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우선순위부터 지키는 점은 라토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점을 그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가말이 물었다. 아까 캐시는 드비나가 데려가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가지 않는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전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할 일?”

당연히 캐시도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라토가 물었다. 그러자 캐시는 무심히 대답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주기로 약속했어.”

“…….”

라토는 말문이 막힌 듯이 그녀를 보았다.

가말은, 이제 아들의 얼굴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토는 캐시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가말은 말했다.

“같이 가.”

라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마티를….”

“난 강해.”

가말은 그 말을 끊고 말했다.

“아이들은 강하지 않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그랬다. 그들의 마티는 강한 사람이었다. 육체의 파워만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부탁해도 될까?”

사실 혼자의 힘에는 부쳤기 때문에 캐시는 뱀의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가말은 드비나를 보고 물었다.

“지금 가면 돼?”

“네. 옷은 제가 꺼내드릴게요.”

그러고 드비나는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 건네주었다. 원래 하던 일이라 익숙해 보였다.

“고마워.”

그리고 가말은 라토를 보고 그를 가볍게 포옹했다.

“조심해, 라토.”

“마티도.”

라토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는 캐시는 기분이 이상했다. 누누이 봐왔지만 그녀가 아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가 흐르는 방향에 따른 철저한 서열 관계였지.

드비나가 바깥을 확인하고 가말과 함께 나갔다.

“우리도….”

바깥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캐시가 얼른 손짓했고 둘은 두툼한 커튼 뒤로 숨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기척이 느껴졌다.

캐시는 어깨 너머로 그쪽을 보고 있다가 제게 맞닿아있는 몸을 깨달았다. 무릎에서부터 굴곡을 타고 퍼즐이 맞듯이 딱 밀착해있는.

바로 코앞에 있는 근육질의 가슴에서 눈을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라토는 그 깊고 짙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캐시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살짝 물러난 순간 좁은 공간 때문에 라토가 팔을 잡았다.

“넘어져.”

그러면서 강하게 팔을 잡아, 단단한 손가락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라토와 이렇게 조용히, 오랜 시간 몸을 맞대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조금….”

떨어지라고 말하려는데 라토가 오히려 더 밀착하면서 낮게 말했다.

“쉿.”

캐시는 이제야 거의 헐벗고 있는 제 상태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토를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녀는 라헬이었고 지금은 캐시였다.

하지만 뭐라고도 할 수 없는 게, 라토는 심각한 얼굴로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맞닿아있어 마치 진동처럼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주변을 맴돌던 기척이 사라졌다. 그러자마자 캐시는 얼른 몸을 떼고 커튼을 젖히고 나갔다.

“가자고.”

캐시가 하도 커튼을 억세게 젖히고 나가서 다시 돌아온 커튼을 밀어내고 나오며 라토는 대놓고 어색해하는 캐시가 귀여워서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놀랐다.

라헬-라토는 아직 캐시의 본명을 몰랐다.-을 대할 때 이렇게 가벼운 마음일 수 있다니.

“뭐해? 이투하.”

라토가 오지 않고 있자 캐시가 거의 한심하단 투로 말했다. 저럴 때는 라헬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어디 있어?”

복도를 지나가면서 라토는 물었다.

“탈출해야 할 상황이 오면 아이들끼리 드비나의 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해놨다고 들었어.”

드비나 외에는 아이들도 캐시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똑똑.

방에 도착하자 캐시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캐시와 라토는 시선을 교환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캐시는 문을 열었다.

끼익.

방은 어두웠다. 새어 들어오는 달빛으로만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얼굴 한쪽에 음영이 드리워진 영원교 여자의 모습이 유난히 음산해 보였다.

여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있었다.

“오셨군요.”

지하실에 들어섰을 때 발목을 휘감는 한기처럼 서늘한 목소리였다.

“배신자가 라헬 대장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누군가 아이들을 데리러 오긴 올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이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선으로 칭칭 휘감긴 채. 그리고 선은 저마다 들고 있는, 기폭 장치로 보이는 물건에 연결되어있었다.

누가 진짜 기폭 장치를 누가 들고 있는 건지 모르게 하려는 셈이었다. 보통 상황에서는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역시 기폭 장치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는 여자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 아이들은 메시아의 군대가 될 아이들입니다.”

캐시는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못할 바에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메시아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연신 표정이 없던 여자는 웃는 법을 모르는 듯이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라토는 정말로, 역겨웠다. 이 사이비 교도들이 한다는 짓이.

“교주가 이러라고 했나?”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하지만 여자는 일체의 미동이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 아이들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진정한 신앙을 배신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정화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헛소리를 잘도…!”

뚜벅.

갑자기 캐시가 걸음을 내디뎠다.

“잘못 건드리면 터질 겁니다.”

여자는 경고했다.

“그렇겠지.”

“……?”

여자도, 라토도 그게 어떤 종류의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캐시가 여자가 들고 있는 장치를 뺏으면서 목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컥….”

그리고 캐시는 말했다.

“모두 손에 든 걸 내려놔.”

아이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전부 가짜니까.”

그제야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진저리치듯이 기폭 장치로 보이는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정말로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어떻게….”

여자는 목이 졸려 숨을 쉴 수 없으면서도 물었다. 이렇게 쉽게 들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네가 진짜를 들고 있을 줄 알았어.”

캐시는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난 너희들을 잘 알아. 제 영생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도 용광로에 던져 넣을 더러운 욕망덩어리들.”

그러고는 말을 거칠게 갈아 내뱉었다.

“누군가 실수해서 네가 죽을지 모르는 위험 같은 건 감수할 생각도 없고 감수할 배짱도 없어.”

그리고 여자의 이마에 총구를 갖다 댔다. 여자는 숨이 막혀 얼굴에 핏줄이 돋아난 채 푸르르 떨었다.

캐시의 손을 긁으며 떼어내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음은 당연했다.

캐시는 이를 드러냈다.

“내가 널 찢어발겨 죽이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런 노력조차 아까워서야. 이 쓰레기야.”

탕.

몸이 풀썩 쓰러졌다.

캐시는 그야말로 얼음에 다름없는 시선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에 감겨있는 줄을 풀기 시작했다. 라토가 와서 도왔다.

“대단하네.”

“괜히 10년이나 테러리스트 노릇을 하고 살았던 게 아니니까. 이런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훤해.”

줄을 전부 풀어내고 말했다.

“가자.”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라토는 당장 긴장했다.

라토는 일행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하고 모퉁이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묵직해서 인간인지 뱀파이어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건 셋뿐이었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소리가 멈추었다.

‘눈치챘다.’

낭패였다. 상대가 이쪽이 숨어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대로 대치한 채 몇 초가 지났다.

서로 홱 총을 겨누었다.

라토는 상대를 알아보았다.

“토라.”

MCTC의 대원처럼 검은 전투복을 입고 있는 토라와 이투하 둘이었다.

“라토.”

둘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시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캐시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둘이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별 의미는 없었어.”

라토는 말했다.

“동족한테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캐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편이 자지 않아도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 척했을 뿐이다. 임무에 필요하다면 잘 수도 있지만 이 녀석 저 녀석 들락날락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어.”

갑자기 토라가 캐시를 가리켰다.

“사드 백작이 울고 갈 여자 사이코패스 또라이?”

하지만 누군가가 대답하기 전에 토라는 판데르발트가 잡혀있는 모습을 보고 뭔가 깨달았다. 그리고 캐시를 가리킨 손을 내리지 않고 라토를 보았다.

“그럼 레기온 내부에 있다는 스파이가…?”

“그렇다는군.”

라토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라는 감탄하는 얼굴로 캐시를 보았다.

“놀랄 노 자네. 타와가 엄청 학을 떼던데.”

캐시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흥미롭네요. 사드 백작이 울고 갈 여자 사이코패스 또라이라는 건 드페르 소령님이 한 말이에요?”

토라는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타와도 그쪽이 아군이라는 건 몰랐으니까.”

그러고는 토라는 캐시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럼 이 아이들은?”

“영원교의 아이들이야. 탈출하길 원해.”

토라는 무전을 보냈다.

“여덟.”

그런데 무전이 되질 않았다.

“요즘 같은 때에 무전이 먹통이야?”

토라는 기가 차다는 투로 말했다.

“허용된 채널 외에는 모두 차단하고 있으니까요.”

자유를 위한 기술이 발전할수록 통제를 위한 기술은 더 발전한다고 하는 유명한 말처럼, 대테러 기술이 발전할수록 테러 기술은 더 발전하는 법이었다.

캐시는 말했다.

“어쨌든 가죠. 갈 길이 머니까요.”

***

어느 순간이었다. 토라가 팔꿈치로 라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에 라토가 돌아보자 토라는 슬쩍 물었다.

“저쪽 궁에 잡혀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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