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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03화 (103/110)

103화<쭈니>

어느 순간이었다. 토라가 팔꿈치로 라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에 라토가 돌아보자 토라는 슬쩍 물었다.

“저쪽 궁에 잡혀있었다며?”

“그게 왜?”

“상상력을 자극하네.”

라토는 토라의 머리를 툭 쳤다.

“정신없는 녀석.”

“솔직히 말해. 좀 즐겼지?”

“그럴 정신이 있었을 거 같아?”

라토는 시치미를 뚝 뗐다. 즐긴 건 아니지만, 토라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 천년짜리 놀림감이 분명했다. 절대 모르게 해야 했다.

그때 캐시가 돌아보고 쉿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해요.”

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캐시는 다시 앞을 보았다.

이 많은 녀석들을 따돌리고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없네.”

캐시는 중얼거렸다.

“방법은 있어.”

뒤에 다가온 라토가 말했다. 희소식에 캐시는 돌아보았다.

“그래? 어떤….”

그런데 생각보다 라토가 가까이 다가와있어 시선이 마주쳤다.

라토는 기분이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 그를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그토록 괴롭게 만들던 얼굴이 맞는데, 표정이 달라서 다른 사람 같았다.

라헬은 눈빛이 차갑고 늘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눈이 또렷하고 결연한 얼굴이, 이런 차림을 하고 있어도 꼭 군인다웠다.

캐시와 라토는 몰랐지만 뒤에 있는 토라가 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캐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떤 방법?”

라토도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냥 뚫고 가는 거야.”

캐시는 라토를 쳐다보았다. 하나는 알 것 같았다. 그가 장난하는 건 아니라는 점. 기가 차 말했다.

“지금 그걸 방법이라고 내놓은 거야?”

“다른 방법 있어?”

“다른 방법은 없지만 그건 더 아니지. 레기온이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인간 사회의 단맛에 취해 사냥 본능도 잃어버린 일반 루아스들과 달리 이 녀석들은 진성 사이코패스 집단이야. 이 녀석만 봐도….”

판데르발트를 가리키며 말하려는데 라토가 일어섰다.

“말 많은 건 연기가 아니었네.”

“잠깐….”

캐시가 다급히 라토를 잡으려고 했지만 뒤에서 토라가 툭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지나갔다.

‘잘 봐.’라고 말하듯이.

***

쿵.

마지막 레기온 대원이 쓰러졌다.

캐시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두 남자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시의 숲을 뛰어다니면서 쌓은 순수한 피지컬 파워로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최상위 티어가 아닌가 싶었다.

과연 이투하의 명성이 이해됐다.

캐시가 그쪽을 보느라 뒤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판데르발트는 조용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 여자가 한눈이 팔려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판데르발트는 포박을 떨치고 벌떡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캐시가 흠칫 돌아보았다.

“저 자식이!”

캐시가 외치면서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본 라토가 당장 그녀를 붙잡았다.

“탈출하는 게 먼저야.”

캐시는 판데르발트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10년간 하는 짓들을 지켜보면서 저 녀석만은 꼭 법정에 세우겠다고 결심했건만.

그게 안 되면 혼란을 틈타 목이라도 따주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캐시는 혀를 내차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긴장하고, 모두 당장 아이들을 제 뒤로 감추었다.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묵직해서 인간인지 뱀파이어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라토는 총을 꾹 쥐었다.

그런데 나타나는 건, 익숙한 인영이었다.

순간 토라가 말했다.

“타와.”

무장한 남자들 중 하나가 헬멧의 버튼을 눌러 앞 유리를 열었다. 도영이었다.

토라는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왔어? 호언장담하면서 갈 땐 언제고?”

덩달아 도영도 기가 차단 얼굴이 되었다.

“어디서 놀다 왔을까봐?”

그때 도영이 캐시를 발견했다. 그에 도영이 공격이라도 할까봐 라토가 말하려고 하는데, 도영이 먼저 말했다.

“연기를 잘하더군요. 스파이가 아니라고 믿을 뻔했습니다.”

“알고 있었어?”

토라가 놀라 묻자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잠입했을 때 죽은 하심의 주머니에서 수갑 열쇠가 나왔어. 스파이가 자신이 스파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수갑 열쇠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러면서 캐시를 고갯짓했다.

“이쪽뿐이었지. 저번에 잠입했을 때 너무 타이밍 좋게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고.”

당시 라헬은 너무 쉽게 자리를 떴다. 그것도 가말과 도영을 같이 두고.

아무리 타이밍을 노려 팀원들이 일부러 요새에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렸다고 해도 그 정도로 탈출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건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영은 캐시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그쪽을 만났을 때는 항상 이상하게 운이 좋았죠. 붙잡혀서 끌려가고 있는데 때마침 적기가 나타나서 비행기를 공격해준다던가.”

토라가 덧붙였다.

“하긴, 나도 라토를 구하러 갔을 때 갑자기 테러리스트 녀석들 무전이 고장 났지. 탈출할 때도 녀석들이 공격하는 타이밍이 한 박자씩 늦었고.”

아주 미묘해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뒤에서 캐시가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캐시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을 짚고 서있었다.

도영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라토 네가 이쪽 궁에 잡혀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을 때 정보원이라는 걸 확신했지.”

“생각보다 유능하네요.”

캐시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도영은 기가 차 되물었다. 하지만 급한 건 그게 아니니 더 묻지 않고 토라와 라토를 보고 말했다.

“어쨌든 너흰 요새를 나가.”

그리고 도영은 팀에게 이동 수신호를 보냈다. 팀이 먼저 움직이고 마지막으로 옆을 지나가는 도영에게 라토는 말했다.

“만약 마티를 제때 구해 나오지 못한다면….”

아직 안에 있는 가말을 생각하면 그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이쪽엔 아이들이 있었다. 비전투원이 더 많은 이 그룹의 특성상 더 많은 전투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건 명색이 ‘작전’이라서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들어가면서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걸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팀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라토는 기가 차서 도영이 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인간이었을 때부터 저랬어?”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마티를 사로잡은 비결이지.”

***

가말은 드비나를 따라, 평소 요새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다니는 것 같은 부엌 뒤 작은 골목을 따라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저 멀리 마치 뒤척이는 검은 짐승 같은 바다가 파도쳤다. 거센 바닷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렸다.

계단 끝에서 이어지는 어두운 회랑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 교주는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교주님.”

교주는 은밀하게 다가오는 드비나를 보고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무사했군.”

그리고 가말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걱정했습니다, 사도님.”

교주와 함께 있는 신자들이 가말을 보고 작게 웅성거렸다. 신자들 중에서는 가말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꽤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조용.”

소리가 커지려고 하자 교주가 말했다. 그러자 신기할 만큼 모두가 한 번에 조용해졌다.

교주는 다급하게 말했다.

“사도님을 모셔. 어서.”

정말 자기 목숨이 걸린 것처럼.

“가시죠, 사도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손에 인류의 운명이 놓여있다는 사명감을 가진 양 비장하게 말을 따랐다.

가말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쨌든 영원교가 레기온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진심을 다해 그녀를 보호해주려는 모습을 보자… 뭐라고 해야 할지,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오로지 이들을 이용하려고 했을 뿐인데.

“뭐야?”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경비병들이 있었던 것이다.

영원교인들은 당황했다.

경비병들은 가운데 있는 가말을 보고는 흠칫했다가 주변에 포진해있는 영원교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끝낸 것 같았다.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으르렁거렸다.

“영원교 인간들 아냐? 이 조막만 한 것들이 미쳤나?”

무시하는 말이 적대감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영원교인들이 갑자기 막아서면서 외쳤다.

“가십시오, 사도님!”

“저희가 막겠습니다!”

교주는 신속하게 가말을 안내하며 말했다.

“가시죠.”

가면서 가말은 뒤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인간인 영원교인들은 루아스인 레기온 대원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교인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

소식을 들었지만 쿠니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물었다.

“판데르발트는?”

“인질로 붙잡힌 거 같습니다.”

책상 앞에 서있는, 소식을 가져온 레기온 대원이 대답했다.

사실 판데르발트는 잔인하기만 하지 큰 능력은 없는 녀석이었다.

그나마 라헬이 믿을 만했지만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티가 났거나 라헬이 일을 못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어떤 사실이 밝혀지고 났을 때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납득되는 ‘직감’ 같은 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스파이라면 제 목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쪽의 목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쿠니스는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MCTC의 팀도 어딘가에는 있겠군.”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로열 스타나 MCTC 둘 중 하나는 한쪽이 작전을 수행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가말을 데려가기 전에 재빨리 행동에 나섰으리라.

아마 MCTC의 작전 소식을 듣고 로열 스타가 따라 나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인질과 상황의 동향에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행동할 MCTC에 비해, 로열 스타의 그 사람 좋은 척하는 소시오패스 리 녀석의 떨거지들은 무슨 짓을 할지 그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가말을 찾아. 당장.”

쿠니스는 말했다.

“가말은 영원교가 얼마나 위험한 녀석들인지 몰라.”

그가 세운 모래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한쪽이 우르르 무너지면 다른 쪽이 와르르.

하지만 쿠니스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모래성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

가말은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그녀가 그러자 다들 돌아보았다.

“사도님?”

이들은 사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사람들이었다.

속이는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속아 목숨을 내버리게 하는 일은 없게 해야 했다.

가말은 말했다.

“난 사도가 아냐.”

신도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사도님, 그게 무슨….”

“베이비는 메시아도 아니고.”

드비나는 움찔했다. 하필 지금 그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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