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쭈니>
쿠니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에 한 사제가 가말을 안아들고 있었다. 정말 다리쯤은 잘라내도 개의치 않을 것 같던 태도에 비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휠체어를 끌고 나타났다.
영원교 신도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쿠니스를 죄수인 양 끌어다가 거칠게 휠체어에 앉혔다. 그러자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조심해. 가슴에 폭탄이 있으니까.”
그러고는 휠체어를 밀어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군.’
쿠니스는 흐린 시야 사이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으로 폭탄을 심은 건 아닌데 어쨌든 그 덕분에 당장은 살게 됐으니.
이쪽 가슴에 폭탄이 없었더라면 바로 이 자리에서 그를 죽였을 것이다.
사제가 안고 가는 가말이 보였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
“쿨리시다이닌의 화학식을 기반으로 한 물질이라고?”
서재에 서있는 이반은 되물었다.
쿨리시다이닌은 피를 대체한 플로스의 기초 성분이었다, 블란두스 박사가 ‘꽃’에서 추출해낸.
소식을 가져온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루아스 체내에 흡수된다는 군요.”
그 말인 즉, 루아스 체내에 흡수되는 모든 약물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예전에 드페르 소령의 팀이 레기온의 캠프를 습격했을 때 찾아낸 하얀 가루의 정체가 이거였습니다.”
이반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보통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주 위험한 물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일단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반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물었다.
“렉스는?”
“총사령부를 설득하는 중입니다. 그쪽에서 출격을 허락하지 않는다는군요.”
비서가 말하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하가 나섰다.
“UFD(연합 사막 연방)와의 이해관계 때문일 거예요.”
이번 일은 무서울 정도로 3년 전 형제단 사건과 닮은 점이 있었다. 결국 MCTC의 지도 세력이 형제단 사건 때 배운 점이 그다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반. 그 아이도 이바노프예요.”
연하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도영의 아이 역시 엄연히 이바노프 클랜원이었고, 클랜원을 건드린다는 건 그 클랜에 대한 전쟁 선포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러면서 이반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이미 화는 충분히 났어.”
나직한 목소리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느낌에 가말은 얼핏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들고 있었다.
“깨셨습니까?”
내려다보면서 묻는 건,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는 영원교의 사제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온통 흰 옷을 입은 영원교도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걷고 있었다.
“속이… 나빠.”
가말은 웅얼거렸다.
“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흡입하신 게 치명적인 양은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
“베이비는….”
가말은 납을 마신 것처럼 무겁고 차가운 손끝으로 배를 더듬어 감쌌다. 다행히 아직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존재가 느껴졌다.
“영향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그 말에는 안심이 되었지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가말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때 천장의 아치를 넘어 어딘가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닫아!”
행동대장이 말하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지렛대를 끼워 문을 닫고 고정했다.
흐릿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는 가말은 놀랐다. 그곳에 하나같이 흰옷을 갖춰 입은 영원교인들이 모두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라고 알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모이지 않고서는 이런 인파를 만들어낼 수 없을 테니까.
가말을 안은 사제가 사람들 사이로 나아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를 하거나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광경이 현실 같지 않은 면이 있어서 가말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사제가 가말을 제단에 내려놓고, 이어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가말이 흐릿한 눈을 떠보자, 도영이었다. 그에 가말은 웃었다.
“도영….”
그리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마침내 도영이 온 것이다.
꼭 다시 태어나서 만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느낌이었다.
그런데 점차 도영이 흰 주교복을 입은 교주로 바뀌어, 가말은 멈칫했다.
교주 옆에는 여자 넷이 서있었는데, 마치 중세의 수도자 같은 흰 수도복을 입고 베일처럼 보이는 마스크를 써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개중 둘이 다가와 가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니 제단에 박힌 고리에 연결했다.
반면 나머지 여자들이 황금색 향로를 흔들자, 진자처럼 움직이는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나며 기묘한 향이 퍼졌다.
그럴수록 가말은 더 정신이 몽롱해졌다.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갑을 채우고 난 여자 하나가 가위로 가말의 옷을 자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가슴 밑까지 갈라진 옷자락 사이로 알처럼 둥그런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교주는 이상한 안광이 선득거리는 눈으로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다른 여자가 칼을 건네주었다.
메스처럼 둔탁하면서 기이한 날카로움을 빛내는 칼이었다.
이어서 교주는 꼭 주술을 행하듯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가말의 명치에 손을 얹었다.
제단 위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흣…!”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울렸다.
가말의 손이 한 여자의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베이비를… 건들지 마….”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고통에 찬 기괴한 신음을 터뜨렸다. 반면 교주는 어느새 물러섰는지 몇 걸음 뒤에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신도들 사이에 앉아있는 드비나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가말을 돕고 싶었지만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고마워.”
드비나는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서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가말이 막 그녀가 갖다 준 찻잔을 들어보였다.
여태까지 여러 ‘사도’를 만났지만 드비나에게 감사 인사를 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강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고, 그들에게 그녀는 인간이자 사이비 교도, 어린애에 불과하니까.
“제게 하신 말씀이세요?”
그 말에 가말은 오히려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고맙다는 말 처음 듣는 사람이야?”
가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해, 드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들어요, 뱀파이어한테는.”
“나쁜 뱀파이어만 만나서 그래.”
천진한 말투에 드비나는 웃어버렸다.
이번 사도가 좀 특이한 건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더 이야기해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럼 사도님은 착한 뱀파이어예요?”
“응. 난 착해.”
“드비나.”
그때 같이 일하는 여자가 사도와 대화하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불렀다. 그에 드비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물러서.”
교주가 말하자 여자는 물러서다가 바닥에 넘어져 신음했다.
그러자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 데려갔다. 하지만 걱정해서라기보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치우는 느낌에 가까웠다.
“괜찮습니다.”
교주는 속삭였다.
“두려워하실 거 없습니다.”
가말은 기진맥진했다.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저항하기가 힘들었다.
“움직이지 마.”
그때 쿠니스가 말했다.
교주가 멈칫하고 돌아보자, 쿠니스는 어느새 채워져있던 족쇄를 풀어내고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이 광신도들도 그가 충분히 폭탄을 터뜨릴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 것이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걸 터뜨리면 사도님도 위험해집니다.”
교주는 천천히 말했다.
“네 녀석들이 몹쓸 짓을 하게 두는 거보다는 낫지.”
그러면서 쿠니스는 로열 스타의 정보원을 흘긋 보았다.
지금은 조용히 서있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혼란을 틈타 데리고 도망갈 것이다.
그때 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걸 터뜨리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칼을 꾹 눌렀다. 칼끝에 맞닿은 살에서 핏물이 배어났다.
쿠니스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기민한 녀석이라 사람을 읽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생각하고 있는 찰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메시아를 가진 진짜 사도가 누구입니까?”
모두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들이 향해간 끝에, 드비나가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그러나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비나는 영원교가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 집단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배교자라는 게 들켰을 때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목격하고 밖으로 나가 멀쩡히 살 수 있을지가 더 두렵고 무서울 때가 있었다.
여기서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은 만약 이 지옥을 혼자 살아나간다 하더라도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도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어선 안 된다고 걱정해준 게 가말이었다.
가말의 다정함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드비나는 말했다.
“교주야말로 가짜 사도입니다.”
“드비나!”
한 여자가 경악해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드비나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메시아를 가진 진짜 사도 대신 가짜 사도를 따르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이 지옥 같은 현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 겁니다.”
어차피 영원교인들에게 메시아가 없다거나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 사이에 있었던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지금은 그저 교주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님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영원교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그 가운데서 드비나는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교주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역시 교주는 쉬운 자가 아니었다.
“난 그대들을 이 천국의 문 앞까지 이끌었습니다. 지복의 나라로 향하는 문 바로 앞에서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 모든 일을 수포로 만들 셈입니까?”
신도들은 다시 웅성이며, 감히 그들을 유혹하려고 했던 사탄에 대한 적의감에 찬 눈으로 드비나를 보았다.
드비나는 몸이 떨려왔다. 당장에라도 신도들이 그녀를 덮쳐서 맨손으로 찢어죽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두려울수록 그녀는 고개를 더 꼿꼿하게 들었다.
“모든 건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누가 메시아를 품고 있고, 누가 감언이설로 그대들을 유혹하고 있습니까?”
정적이 내려앉았다.
교주는 드비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드비나는 이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겼다는 게 교주를 막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걸, 다음 순간 알았다.
“메시아께서 모든 걸 대답해주실 겁니다!”
교주는 칼을 든 손을 높이 쳐들고, 그대로 가말의 가슴을 향해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