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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09화 (109/110)

109화<쭈니>

[벌처(Vulture), 전원 탈출 완료.]

무전이 울렸다.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AC-130B 1번기, 출격을 허가합니다.”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있는 대령이 성호를 긋고 곁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죄인들의 죄를 주님께서 판단하시길.”

렉스는 대령을 보고 물었다.

“종교가 있습니까?”

대령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근엄한, 그러나 언뜻 분노가 엿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가톨릭입니다.”

그 말로 충분해서 렉스는 더 묻지 않았다.

쾅!

그때였다. 모니터 안에서 소리가 났다. 실제로 현장에서 소리가 난 것처럼 거대한 소리에 다들 놀라 돌아보았다.

화면 안에, 요새가 말 그대로 하늘까지 치솟는 화염에 휩싸여있었다.

***

쾅!

철제문이 폭발하듯이 문이 열리면서 로열 스타의 용병들이 밀고 들어왔다. 대부분은 경계하면서 안을 살피고, 몇은 소리치면서 쿠니스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때 용병들이 어지러운 제단과 바닥에 내려져있는, 액체질소로 얼어있는 BCC 특수 가방을 보았다.

그리고 뭔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소리치며 후퇴하라는 손짓을 했다.

로열 스타의 용병들은 들어온 만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쿠니스는 허공을 보았다.

쿵, 쿠구궁…. 타다다….

멀리서 어렴풋이 소리가 들려왔다.

로열 스타는 여기에 꽤 많은 병력을 보냈을 것이다. 그 말인즉, 다른 건 몰라도 여기가 날아가면 로열 스타는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귓가에 어렸을 때 마티가 엄하게 말하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쿠니스, 가말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니.”

그럼 그는 항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진심도 아닌 말을 하고는 했다.

그 말을, 쿠니스는 처음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마티, 미안해요. 다신 가말을 괴롭히지 않을게요.”

쿠니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슴이 번쩍이며 터져 오르는 순간, 특수 가방 또한 빛을 뿜어내며 터져 올랐다.

폭탄 두 개가 동시에 폭발했다.

그리고 폭음이 모든 걸 삼켜버렸다.

***

리는 말문이 막혀 불을 뿜듯이 빛나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망연히 있다가 낭패감에 젖어 혀를 내찼다.

“이런, 이런…. ‘바루스여, 내 군단을 돌려다오.’ 총독 바루스가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게르만족에게 대패하고 세 개 군단을 잃었을 때 아우구스투스가 그렇게 울었던 심정이 이해되는군요.”

사단 급 병력을 전부 잃다니.

리는 손자국을 남길 듯이 깊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대공은 제 목숨을 대가로 그를 엿 먹인 것이다.

‘역시 그런 또라이를 막다른 길까지 몰아넣는 게 아닌데.’

이쪽한테 너무 화가 나서 자폭한 건지, 어떡해도 제 목적을 이룰 수 없자 다 파투 놓아버린 건지.

리는 대공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대공처럼 제 욕망에 솔직한 녀석들은 살고 싶다는 욕망에도 충실하게 반응하는 편이어서, 제 목숨을 거는 일 따위 절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내적 동력이 그를 삼천 년이나 살아남게 했을 테고.

그렇기에 요새를 날려버릴 거라는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삼천 년을 살아남은 지독한 노인네가 하필 오늘 제 목숨과 함께 요새를 날려버릴 줄이야?

리는 입가를 짚고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가말이군.’

대공에겐 제 쌍둥이가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참회를 한다든가 용서를 구한다든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이었으면 삼천 년이나 집착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냥 이제 아무래도 좋아졌을 테지.’

단순히 살기를 그만둔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골치가 아파졌다.

리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손실을 메꿔야 할지 감도 안 오는군.”

그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 말했다.

“이동하셔야 합니다. 이바노프의 ISLE 쪽에서 냄새를 맡았습니다. 병력이 오고 있습니다.”

“역시 너무 깊이 개입했던 거 같군요. 욕심이 나서 좀 밀어붙였더니.”

리는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폭발의 여파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요새가 거의 흔적도 남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었다.

제 병력을 포함해 요새를 시원하게 날려버린 저 물건을 레기온에 판 게 자신이었으니 그 효력은 잘 알았다.

끽.

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방법밖에 남지 않았군요.”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화면을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다시 오겠습니다, 곧.”

***

바위 틈새를 깎아 만든 듯이 좁고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가자 해변이 나타났다.

아니, 해변이라기보다 절벽 바로 아래 세 명이나 발을 디디고 설까 한 좁은 공간이었다. 거기에 고속정 한 척이 밧줄에 묶여서 출렁거리는 물 위에 떠있었다.

이투하들이 먼저 가슴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들어가서 배를 뭍으로 끌고 왔다.

“어서.”

캐시는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아이들은 배에 하나둘 올라갔다. 이어서 토라와 이투하들이 올라가고 라토가 따랐다. 그리고 라토가 돌아서서 캐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캐시는 그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동을 걸고, 배가 호선을 그리며 돌아서 매끄럽게 강을 횡단해 나아갔다.

어두운 강물에 일그러지는 달이 비치고, 배가 물을 가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요새가 눈을 내리깔아 내려다보듯이 우뚝 서있는 절벽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절벽 위에 그림자가 아른거리나 싶더니, 레기온 대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쪽을 가리키며 서로 무어라 다급하게 대화했다.

이어서 잠깐 사라졌다가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사제 폭탄이었다.

레기온 대원이 그걸 크게 휘둘러서 던지는 모습을 본 캐시는 눈을 크게 떴다.

끝까지 곱게 보내지는 않겠다는 생각 같았다.

캐시는 소리쳤다.

“뛰어!”

그리고 세 뱀파이어와 이투하 둘은 각기 아이들을 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마자 허공에서 폭발음이 울리면서 어두운 바다 속이 순간 불을 밝힌 듯이 밝아졌다.

폭발의 순간 아이들을 제 몸을 감싼 라토는 등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품속에 있는 한 아이가 더 숨을 참지 못하고 거품을 토해내며 괴로워했다. 라토는 어쩔 수 없이 물을 박차고 수면으로 솟구쳐 올랐다.

지옥의 열탕처럼 불에 타는 잔해들이 떠다니는 수면에 토라가 물을 뚫고 나타났다.

“나머지는?”

라토는 물었다.

“모르겠어.”

“일단 해변으로 가자.”

두 남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헤엄쳐서 해변으로 올라섰다. 저편에서 캐시와 이투하들이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섰다.

“전부 다 있어?”

아이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토라가 무전을 보냈다.

“웨일 아홉,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벌처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전을 듣고는 토라는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좌표를 보내죠.”

“마티는?”

라토가 묻자 토라는 고갯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미 기지로 가는 중.”

그리고 돌아보는데, 캐시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살색 드레스가 물에 젖어 휘감겨있어서 정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우아한 굴곡을 드러낸 몸이 비쳤다.

라토는 물었다.

“어디 가?”

캐시는 라토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질문을 한 것처럼 돌아보고 말했다.

“갈 길. 설마 미아보호소까지 데려다줘야 해?”

그러고 캐시는 걸어갔다. 토라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멋진 여자네.”

“저 여잔 안 돼.”

라토는 딱 잘라 말했다. 철썩, 그런 라토의 어깨에 젖은 장갑이 날아와 부딪쳤다.

“행여 자인이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말라고. 객관적인 평가였어.”

“왜, 서머 중위가 화낼까봐?”

“아니, 총 맞을까봐.”

그러고는 토라는 엄지손가락을 젖혀 캐시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연락처라도 물어보지?”

“괜찮아. 또 만날 거야.”

라토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디선가.”

***

도영은 요새가 폭발하는 불길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았다.

“워우….”

팀 모두 얼이 빠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휴 대위가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소형화된 폭탄이 이 정도 폭발력이라니….”

아무리 두 개가 동시에 터진 위력이라고 해도 레기온은 대체 뭘 만들어낸 건지 섬뜩할 정도였다.

“소령님!”

그때였다. 의료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돌아보자, 의료진 사이로 누워있는 가말이 얼핏 눈을 뜨고 있었다.

“가말.”

도영은 당장 다가갔다.

가말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이 몽롱했다.

인간이었다면 며칠간 아예 눈을 뜰 수 없었겠지만 루아스의 육체가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리게 한 것 같았다.

가말은 도영을 발견했다. 눈이 일렁였다.

도영은 애써 웃으며 땀에 젖은 가말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꼭 한 생을 건너 만난 것같이 느껴졌다.

가말의 눈에 뭉클 고인 눈물이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디어 안도하는 그녀를 보며 도영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마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영은 가말의 손에 꾹 제 입술을 눌렀다. 가말은 눈물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산소마스크 너머로 입술을 달싹였다. ‘쿠’라고 말하는 입 모양이었다. 그에 도영은 속삭였다.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라고 했어.”

물론 대공은 그런 말 따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말이 더 이상 그 녀석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도영은 그런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의사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할 거 같습니다.”

그에 가말의 눈빛이 흔들리자 도영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베이비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가말은 애써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판데르발트는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물을 헤치고 뭍으로 올라섰다. 그 뒤를 그의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혼란한 와중에 바다에 뛰어들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쿵.

갑자기 만 건너에 서있는 요새가 불길에 사로잡혔다. 이쪽 뭍에 닿는 물까지 파동을 일으키며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판데르발트는 중얼거렸다.

“결국 다 날려버렸군.”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삼천 년이나 산 탓인지 쿠니스는 어딘지 아슬아슬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놈의 제 쌍둥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해서 무슨 일을 벌여도 벌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옆에 있으면서 챙길 건 모두 챙겼기 때문에, 그 옆에 붙어있었던 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결국 뱀파이어들을 움직이는 것도 돈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따지고 보면 뱀파이어란 오래 사는 인간에 불과할 뿐이니까.

욕망의 크기나 종류는 다를 수 있어도 재질은 같을 수밖에 없었다.

“가자.”

판데르발트는 제 부하들에게 말하고, 불타오르는 요새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파사삭.

그때 수풀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에 판데르발트는 흠칫 긴장하며 돌아보았다.

설마 벌써 쫓아온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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