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쭈니>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판데르발트는 흠칫 긴장하며 돌아보았다.
설마 벌써 쫓아온 건….
그런데 수풀 사이로 나타나는 건, 교주였다. 치렁거리는 옷은 벗어던지고 까만 전투복을 입고 있어 얼핏 보면 교주인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로열 스타의 용병들과 있는 건 그가 맞았다.
“이쪽이 맞는 거야?”
교주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교주가 수풀 사이에 우뚝 서있는 판데르발트와 일행을 보았다. 그리고 멈칫했다.
“판데르발트 씨.”
하지만 거의 본능인 듯 바로 눈매를 휘며 웃었다.
“무사히 탈출하셨군요.”
쿠니스 그 늙은이는 애초에 총수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 미치광이의 놀음에 놀아나 자신이 이 꼴이 됐다고 생각하니 판데르발트는 가슴속에서 살의가 왁다글 끓었다.
그래서 한껏 이를 드러냈다.
“간만에 사냥이다. 쫓아.”
로열 스타의 용병들은 총을 난사하고 교주와 함께 탈출한 영원교인들은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판데르발트와 그 무리는 사냥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다들 뛰어나가는 서슬에 교주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무리 군인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다. 제 마음처럼 달려 도망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 잠깐…!”
교주가 다급히 외쳤다.
“메시아는 어디 있지?”
그 말을 끊고, 판데르발트는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교주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판데르발트는 나직이 말을 갈아 내뱉었다.
“널 영원히 살게 해줄 메시아는 어디 있냐고?”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진 달을 등지고 있는 판데르발트를 올려다보는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깨달음을 얻은 듯이.
교주는 희열에 차 외쳤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건 바로…!”
이건 또 뭔가 싶어서 판데르발트는 기가 찼다가, 피식 웃었다.
“적어도 일관성은 있군.”
그리고 짐승이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두 흉기가 붉게 웃는 입술 사이에서 빛났다.
놀란 교주는 다급하게 가슴을 더듬어 권총을 꺼내들었다.
탕!
하지만 판데르발트는 당연히 손쉽게 피하고 고개를 내렸다.
와직.
“……!”
쉽게 포기하지 않을 셈인지 교주는 어디선가 단검을 꺼내 마구 그를 찍어댔다.
하지만 피부의 결이 맞지 않아서 철에 단검을 찔러대듯 자꾸 미끄러져 튕겨나갔다.
그래도 교주는 피가 빨리는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렀다.
“ㄴ… 놔! 이, 이 괴물…!”
메시아 타령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겠다고 교주가 악을 쓰며 다시 한번 단검을 찔렀다.
그 손을, 판데르발트가 덥석 붙잡았다.
우드득.
그리고 불길한 소리가 났다. 교주는 듣기에도 고통스러운 소리를 끊길 듯이 내질렀다.
“끄아아….”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잘게 펄떡거렸다.
제법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판데르발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턱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이 윤광을 머금어 깨질 듯이 청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목에서 나직한 울음이 올라왔다.
풀 위에 누운 교주는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상태였다.
악인에게도 악인의 피가 더 맛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으며 세상이 제 것인 양 뻐기던 녀석이 제 이빨 아래 벌벌 떨며 죽어가는 감각이 순간적으로 최고의 쾌락을 선사했다.
숲 속으로 달아난 사냥감들을 더 쫓고 싶었지만 마냥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판데르발트는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무리에게 말했다.
“가자.”
파사삭.
수풀이 또 흔들렸다.
“넌 이쪽이야.”
그리고 나타나는 건 아까 그대로 찢어진 드레스 차림을 한 라헬, 캐시였다.
판데르발트는 직감했다, 자신이 여기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음을.
캐시 뒤로 총구를 거느린 MCTC의 군인들이 빼곡히 나타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총구가 먹잇감, 판데르발트를 향했다.
그 가운데서 캐시는 입매를 늘어뜨리며 진한 웃음을 지었다. 눈이 퍼렇게 빛났다.
“내가 남자한테 집착하는 편이거든.”
***
가말은 눈을 떴다.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반은 저택 같고 반은 병원 같았다. 고풍스러운 커다란 방 가운데 침대 주변으로 온갖 기계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로부터 선들이 그녀에게 연결되어있었다.
정신이 멍해서 한동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침대 아래쪽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가 가말이 눈을 뜨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셨군요.”
가말은 여자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의사나 간호사 같진 않았다.
간병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말했다.
“잠시만요. 선생님을 호출할게요.”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을 때 의사가 왔다. 그리고 의사는 가말을 확인해보니 말했다.
“보름 동안 의식이 없으셨어요.”
“베이비는…?”
배가 납작해서 덜컥 걱정이 됐다.
“무사해요.”
다행히 의사는 말했다.
“살아있는 거지?”
가말이 묻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합니다.”
“어디 있어…?”
“소령님께서 데리고 계세요. 모셔오겠….”
하지만 의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가말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갈게.”
의사는 굳이 말리지 않고 손짓했다.
“휠체어를 가져와주세요.”
그리고 남자 간호사 둘이 가말을 부축해주었다.
“고마워.”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지나갔다.
입구가 열려있는 공간에는 한눈에도 아기 용품이 가득했다. 요람이 있었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도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도영의 가슴 쪽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가말은 천천히 다가갔다.
도영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잠들어있었다.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허벅지에 걸쳐놓은 손이 총이 아니라 젖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희한했다.
그의 가슴에 안긴 아기가 옴지락거리며 가말을 보았다. 이렇게 어린데도 붉은 눈동자가 명현했다.
자신이 이쪽 배에서 태어났다는 걸 아는지 아기는 울지도 않고 가말을 관찰하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가말은 벅차오르는 눈으로 아기를 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안녕.”
그 소리에 도영이 잠에서 깼는지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 있는 가말을 보고는 놀랐다가 눈가를 쓸었다.
“깜짝이야.”
도영은 버릇처럼 아기를 제대로 안으면서 뒤에 서있는 의사를 보고는 다시 가말을 보고 물었다.
“언제 깨어난 거야?”
“지금.”
“몸은 괜찮아?”
도영은 가말의 볼을 감싸며 물었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이 하는 양을 구경하듯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베이비야.”
아기가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 같은 투였다.
도영은 제 품에 있는 아기를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울음을 멈추질 않아서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 엄마가 없는 걸 알았나봐.”
도영이 아이에게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이는 작은 손으로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가말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못내 안달이 나는 얼굴로 물었다.
“안아봐도 돼?”
“네 배에서 나온걸.”
그러면서 도영은 아기를 안겨주었다. 가말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받아 안았다.
품에 생각보다 묵직하게 들어앉는 무게가 신기하고, 경이롭고, 무어라 더 설명하기 힘들었다.
가말은 아기를 보다가 그대로 안고 테라스로 갔다.
“어디 가?”
도영이 의아해하며 따라오는 사이에, 가말은 아기를 햇빛에 비추듯이 위로 들어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춰 반짝거렸다. 붉은 눈동자는 이미 뭔가를 아는 것처럼 가말을 응시했다.
그때 도영이 다가와서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기막혀했다.
“인마, 라이온 킹이냐.”
“봐.”
가말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살짝 고갯짓했다. 도영에게 보라고 말하듯이.
“사타디야.”
고대 사타디 부족은 오래 전에 대가 끊겼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사타디가 탄생했다.
항상 부족의 번영을 신경 썼던,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아다위와 그녀를 결혼시키려고 했던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이를 안고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이다.
시간의 유속 속에 잠들었던 사타디는 현대에 다시 깨어났다.
이 아이가 사타디의 이름을 계승할 것이다.
도영이 가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드페르다.”
그리고 도영은 가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정확히는 가말이 안고 있는 아이까지.
그러고는 물었다.
“이름은 뭐로 할 거야?”
“이름?”
“아직 안 정했으니까.”
가말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도영을 보았다.
여러 일이 있어서 이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딱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타유. 사타디어로 별이란 뜻이야.”
도영은 웃었다.
“좋네.”
그러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사내 녀석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나 싶긴 하지만 괜찮겠지, 뭐.”
가말은 놀라서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남자애야? 여자앤 줄 알았어.”
그 정도로 아이는 예뻤다.
쿠니스가 아이의 성별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말은 지금에야 처음으로 아이의 성별을 알았던 것이다.
그 말에 도영이 아이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었다.
“드페르가의 장남 타유 드페르 군을 소개하지.”
허공에 몸이 뜨자 놀아주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타유는 다리를 휘저으며 좋아했다.
이내 도영은 타유를 고쳐 안으면서 물었다.
“그럼 이름 바꿀래?”
가말은 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타유는 타유야. 별은 태양의 아이니까.”
도영은 웃으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마티!”
그때 입구에서 가벼운 차림을 한 토라와 라토가 나타났다. 가말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도영이 엄지손가락을 젖혀 그들을 가리키고 말했다.
“네 상태가 심각해서 제왕절개로 꺼내는 수밖에 없었어. 이 거대한 피 두 통이 있지 않았더라면 위험했을 거야.”
“거대한 피 통이라니, 어지럽도록 피를 뽑아주고 받는 취급이 고작 이런 거야?”
토라는 기가 차다는 듯이 도영을 보았다.
가말이 다정한 눈으로 둘을 보고 말했다.
“고마워, 토라, 라토.”
라토가 소파에 앉아 가말과 시선의 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우리가 마티의 클리엔테스라는 게 이번만큼 다행이었던 적이 없어.”
그때 타유가 라토에게 한 손을 뻗고 옴지락거렸다.
가말은 타유를 봤다가 쌍둥이를 보고 말했다.
“타유야. 너희의 동생.”
토라와 라토는 이미 타유를 만나봤겠지만 이름을 짓고 나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라토가 타유의 작은 손을 가볍게 쥐고 말했다.
“이투하가 타유를 지킬 거야.”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듯이.
그런데 도영이 기가 차다는 어조로 말했다.
“갓 태어난 내 아들한테 멋대로 군대를 붙이지 마.”
“마티와 이투하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타유도 마찬가지고.”
가말이 잠들어있는 사이에 라토는 제법 도영에게 편하게 말하게 된 모양이었다. 둘 사이에 은근히 존재하던 벽이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가말은 두 남자가 친해지는 게 시간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좀 더 상식적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도영은 토라보다 라토와 비슷한 점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 말에 세 남자, 아니 타유까지 네 남자는 무슨 말인가 하듯이 가말을 보았다.
가말은 웃었다.
“가족이야.”
<코드네임 베스티아 완><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