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화-수치심
상희가 재필을 만난 건 그때였다. 십 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그날이었다. 진상의 일이 있고 난 다음 둘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졌던 상희.
하루 이틀 몇 주가 지나자 그녀는 재필과 사귀고 있었다. 그때의 상희는 재필이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냥 다부진 사나이. 평범한 기술직 직장인. 용맹한 시민. 그 정도로만...
그렇게 4개월쯤 사귀고 있을 때였다. 상희는 재필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의 일상생활이 궁금했다. 사랑하는 애인의 궁금증. 그런 거였다. 상희는 그 궁금증을 담아 두기 싫었다. 그래서 쉬는 날을 이용해 깜짝 파티를 해주려 맘을 먹었다.
그의 직장에 찾아가 재필의 직장 동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하는 것. 참으로 순수한 마음에 그녀는 실행했다.
손수 만든 김밥. 맛집의 해물탕. 누구나 좋아하는 통닭과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 재필의 명함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다. 하지만 상희는 그 주소를 찾지 못했다. 아니 그 주소지에는 덩그러니 폐가만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상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잘못된 주소지겠지 하는 마음에 명함의 주소와 폐가의 주소를 거듭 확인하였다. 하지만 주소지는 같았다. 힘없이 들고 온 음식물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음날 상희는 재필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는 받지를 않았고 이틀이 되서야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 상희야. 잘 있었어? "
상희는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까. 그때의 상희는 지금의 상희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 오빠? 잠깐 나 좀 만날 수 있어? "
" 지금? "
" 어! "
" 나 지금 출장 중이야... 다음 주에나 올라갈 것 같은데... "
이 사람은 지금 날 속이고 있다는 걸 상희는 직관했다.
" 오빠! 우리 그만 만나자! "
" 상희야. 상희야. 왜 그래? "
" 몰라서 그래? 오빠 지금 나 속이고 있잖아! 끊어!! "
상희가 전화를 먼저 끊었다. 속상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무언가 배신감에, 무언가 아쉬움에, 무언가 자신의 순진함에, 무언가 자신의 무지함에 화가 났다.
그녀는 그렇게 하루 종일 울었다. 그렇게 상희는 재필을 잊어가려 했다. 만약 정말로 그때 상희가 재필을 버렸다면 그녀의 인생은 정말 모든 것이 변했을지도 몰랐다. 이 악연의 연결 고리가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상희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재필과의 일 때문이라도 그 꿀꿀함을 잊고 싶어서라도 그녀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일과가 끝난 상희는 손님과 함께 도시의 외각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분위기 있는 음악. 나풀거리는 촛불. 향긋한 와인.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무렵 상희의 눈에 재필이 들어왔다. 곱상하게 생긴 여자의 팔짱을 받으며...
재필의 흐뭇한 미소. 평소 입지 않았던, 아니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슈트를 입은 모습. 친근하고 후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매력적으로 다듬은 모습이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상희는 더 이상 앞에 있는 손님과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재필과 시시덕거리며 살포시 입맞춤을 하고 있는 다래의 모습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순진하고 순수했던 그녀의 분노는 참을성과 이성을 잠식했다. 상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에 있는 상희의 손님은 당황한다.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 재필의 앞에 선다. 다래를 부둥켜안고 있던 재필은 상희가 다가온 것을 확인한다.
당황하지 않는 그.
상희는 재필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 이거였어! 이 년 때문에 날 버린 거였어! "
다래가 놀라며 재필의 뺨을 어루만진다.
" 오빠 이 여자 누구야! "
재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희를 노려본다.
" 훗!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너 보러 날 좋아해 달라 한 적 없어. 네가 들러붙은 거지! 왜 내 말이 틀리니? "
군더더기 없이 침착하고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한 재필이었다.
" 뭐? 너 같은 걸 나 혼자 좋아했다고? "
분노한 상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이봐! 상희 씨 정식으로 소개할 게! 내 여자 친구 다래야! 이 분에게 사과하고 그만 사라져 주시지! "
" 뭐? 뭐라고? 사과? 아악!! "
상희는 실성하듯 소리를 질렀다. 모든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상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상희의 손바닥은 재필에게로 향했고, 그 손바닥은 재필이 상희의 팔목을 잡으며 제지당했다.
상희의 팔목을 뿌리치는 재필.
털썩 주저앉은 상희.
재필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다래를 부축이며 일어나 유유히 레스토랑에서 사라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상희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더욱 일에 매진했고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냥 미친개가 날 물고 갔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악연이라 했던가 재필의 그림자는 떠나가지 않았다. 상희는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미지근한 샤워가 필요했다. 상희는 샤워 부스로 향하며 옷을 한 올 한 올 벗었다. 샤워기의 손잡이를 돌리자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를 감고 온몸에 바디로션을 바르며 피곤함을 달래는 그녀. 샤워가 끝날 무렵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상희는 무시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도 없었으며 기껏해야 잡상인이나 종교도 없는 자신에게 설교를 강요하는 종교인이 초인종을 누른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나였을 까. 몇 번 초인종이 눌리더니 멈췄다. 상희는 수건으로 젖은 몸뚱이를 닦으며 샤워실을 나왔고 자신의 잠옷을 챙겨 입었다. 또다시 들리는 초인종 소리. 반복해서 계속 누르는 현관문 밖의 누군가. 상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자신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밖을 살필 수 있는 전자기기의 홀로그램을 확인하려는 찰나, 소음기가 달린 권총 소리가 들렸다.
그때의 상희는 그냥 그 소리가 '피식' 하고 느껴졌었다. 상희의 현관문 손잡이가 박살이 나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괴한의 남자 둘. 상희는 놀랬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챙이 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괴한의 습격. 두 사람의 총구가 상희를 향하고 있었다.
" 자! 아가씨.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목숨이 소중하다면... 소리를 질러서도 안되고. "
상희는 무섭고 두려웠다. 소리를 지를 수도, 그들과 싸울 수도 없는 나약한 여인이었다. 괴한들은 상희의 눈과 귀, 입을 막고 그녀를 납치했다. 상희를 납치한 괴한은 바로 재필의 반대파 조직이었다. 그들은 조직 간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 재필의 죽음을 원했고, 그로 인해 그의 여자 친구로 착각한 상희를 납치하기까지 이른 것이었다.
눅눅한 창고.
상희는 잠옷을 입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 퍽! '
다짜고짜 상희의 복부를 가격하는 괴한.
" 으아악!!! "
상희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손과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비명뿐이었다.
" 살... 살려 주세요 제발! 흑흑흑... "
" 살려주지! 재필이 어디 있는지만 불면. "
" 저... 저는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
' 짝! '
" 으악! "
이번엔 채찍이 그녀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잠옷이 찢겨 나갔다.
" 그놈을 감싸려는 것 보니 그놈의 애인이 맞나 보군! 이봐 아가씨!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
' 짝. 짝! '
" 으아악. 헉헉... "
상희는 수치심이 차올랐다. 상처받은 사람으로 인해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함이 밀려왔다.
" 흑흑흑... 아마 재필은 다래라는 여자와 함께 있을 거예요...흑흑흑... "
상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눈물로 토해져 나오는 것 같았다.
" 고 녀석 바람났군! "
상희의 귀에 어딘가 연락하는 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야! 빨리 다래라는 년 찾아! 아무래도 그년이 진짜 애인인 것 같아! "
" 아 그 녀석 족치기 힘들군! "
" 아... 형님 이년은 어떻게 할까요? "
상희의 복면을 벗기는 어떠한 괴한. 그 괴한을 포함한 두 명의 괴한이 상희의 눈에 들어왔다.
" 요년 쓸만한데... 재필이란 녀석 난봉꾼인가 보군. 이런 미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걸 보면. 큭큭큭... "
" 적당히 가지고 놀다 죽이던 버리던 해! 난 보스에게 보고 하러 갈 테니. "
셋 중에 가장 높아 보이는 괴한이 눅눅한 창고에서 사라졌다.
" 오~ 좋아 내 똘똘이가 요새 간질간질했는데 이 정도 인물이라면 똘똘이 힘 좀 나겠는 걸 히히히히히... "
" 인마! 내께 먼저여... "
두 괴한은 맛있는 먹잇감을 먼저 가지려는 듯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단도가 두 괴한의 뒤통수에 꽂혔다.
" 윽. "
비명도 없이 쓰러진 괴한들. 진이 빠진 상희의 눈에 희미하게 들어오는 한 사람의 인영. 그 인영은 커다란 클리프 나이프를 상희를 향해 휘둘렀다.
상희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그녀는 몰랐다. 온몸의 멍과 구타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중요한 건 그녀를 살려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상희는 병원에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구타에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질 못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의 병이 치료가 되질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료한 병실 생활.
1인 병실을 쓰던 그녀의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가 흘러나왔다.
- 네! 이곳은 오늘 낮에 일어났던 살인사건 현장인데요. 끔찍한 현장입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낮 12시쯤 살해를 당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살인 방법이 너무나 끔찍했다고 하는데요. 단독 범행이라기보다는 2명 이상의 범인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피해 여성은 천장에 목을 매었다고 합니다. 자살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을까요?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허술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식의 모습이 아녔을까 하는 경찰 관계자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약 종류인 것 같습니다. 치사량의 독성 물질을 투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후에 알몸으로 목을 매달고 목과 양쪽 손목을 그었다고 합니다...... 이상 TBS 뉴스에 은별 고였습니다. -
상희는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10년 전 건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