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1-지우개
그렇다. 재필은 동광제약의 실 소유자와의 결속으로 그들을 이용해 왔다. 계약이기는 했지만, 무력으로 동광제약을 좌지우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 동광제약의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빌미로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을 유혹해 그들을 거둬 드렸다. 새로운 팔과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목적으로. 희귀병과 부랑자들도 재필의 먹잇감이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낫게 한다는 명분으로, 부랑자의 삶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이유로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모든 건 허상이었다. 허물로 만들어 놓은 가식이었다. 오로지 제스로 만들 기초가 필요할 뿐이었다. 달콤한 희망은, 염원이었던 삶은 무너졌다. 애틋한 꿈은 건물이 무너지듯 스르륵 사라졌다.
치료와 배고픔에서 빠져나오고 싶던 사람들은 연구소에서 마련한 병실에서 생활했다. 코드가 박혀 있는 입원복을 입고 병실과 치료실을 오가던 사람들. 재필은 그런 그들을 어느 시점이 되면 가두었다. 그 시점을 만드는 것이 다솜의 일이었다. 다솜이 기억술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시점이 어느 때인지 쉽게 다가올 것이다.
다솜은 치료실에 들어오는 환자의 기억을 지우는 역할을 했다. 이마에 손을 가져가고 눈을 감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기억을 잃어버렸다. 순간의 기억을 지우는 다솜의 능력. 자신이 여기에 왜 오게 되었는지,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기억에서 사라졌다.
순간의 기억을 빼앗는 다솜 덕에 재필은 쉽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병실 내의 환자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지하지 못했다. 효정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 문제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지만, 미친년 소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언제가 그녀에게 찾아왔던 재필에게서 몰래 엿들은 교신내용. 그래서 그녀는 완강히 동광제약 직원의 손을 뿌리친 것이다. 자신이 그곳에 끌려가면 제스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 재필의 사무실 -
지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총괄하는 재필.
그 앞에 돌아온 여섯 명의 부하가 서있다. 늠름했던 군복의 사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어깨가 풀썩 주저앉은, 기개라고는 개나 줘버린 모습으로 재필을 마주하고 있다.
"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는 거야? "
소파 같은 검정 의자에 앉아 있는 재필의 얼굴은 그냥 덤덤해 보인다. 기가 꺾인 한 명의 대원이 재필에게 답한다.
" 네. 보스... 죄송합니다. 제럴드가 잡히면서 저희는... "
제럴드가 잡히면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그들이다.
" 됐어. 이야기하지 않아도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니. 그보다 그들에게 미행당하지는 않았나? "
" 네. 그런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저희를 미행했다면... "
재필은 그의 말을 자른다.
" 이봐. 멍청이. "
" 네? "
" 너희는 그러니까 밑바닥, 구질구질한 인생을 사는 거야. 그냥 그 자리에서 죽지 그랬어. "
" 죄송합니다. 보스! "
여섯의 사내는 고개를 조아린다.
" 머저리 같은 새끼들. 그만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 "
거수경례를 하며 군인 여섯은 쪼르륵 밖으로 향한다. 그들이 나가자 재필의 오른쪽에 있던 다솜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온다. 그녀는 책상을 중간에 두고 재필과 마주 선다.
" 근식이가 보낸 파일은 확인해 봤어? "
차트를 넘기듯 클립보드에 끼워 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다솜.
" 보스. 생각보다 정확하게 저희를 파악한 것 같습니다. "
" 그래 봤자 우리가 어떠한 일을 벌이는지는 모를 거 아냐? "
" 아니에요 보스. 동광제약과 협력하여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과 제스를 만들기 위해 제약회사의 연구소와 기술을 지원받고 있다는 것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어요. "
" 훗 일개 형사 나부렁이가 그런 거 조사한다고 우리가 다칠 건 아니잖아... 그래도 조심해야겠지? "
" 보스가 제스 양성을 하는 이유가 수상을 죽이기 위해 테러를 감행하기 위함이라는 추측을 하는군요. "
" 뭐 틀린 생각은 아닌데... 테러했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꼭 제스가 아니더라도 더 뛰어난 능력자들을 이용해서. "
재필은 다솜에게 손짓한다.
" 그 기록지좀 줘봐. 내가 읽어 봐야겠어. "
" 여기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별도로 체크해 놓았으니 참고하십시오. "
다솜은 재필이 읽기 편하게 클립보드를 돌려서 건넨다.
" 어디 보자. 피래미 새끼가 바라본 난 어떤 놈인지... "
클립보드를 받는 동시에 윗주머니에서 커다란 시가를 꺼내어 입에 무는 재필. 그의 눈에 근식이 보낸 성우의 자료가 들어온다.
- 기사 보도. 229년. 18월에 작성된 기사 내용은 사라지는 부랑자들. 30구역 뒷거리의 부랑자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도시의 정화인가? 이름 모를 사도가 나타난 것인가?
- 동광제약의 사장과 임원들 사이에 찍힌 재필의 사진. 어떤 관계일까? 3년 동안 재필이 다녀갔던 기록들.
- 제스 양성에 필요한 항체를 찾고 있는 재필. 왜? 제스를 양성하는 것인가? 그 외에 여러 개의 문장이 압축되어 있다.
" 후~ 그래도 여러 방면으로 날 조사하고 있었군. "
다솜이 재필을 빤히 쳐다본다.
" 보스.성우라는 작자. 어떻게 할까요? "
" 댐이 무너지는 것도 조그만 구멍 때문이라 하지 않았나? 별로 큰 구멍은 아닌 것 같지만 막아야지. 23구역 교도소에 박혀 있는 놈에게 일 처리 하라고 해. 되도록 빨리 저승길 안내하라고. "
" 알겠습니다. 보스. "
다솜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뒤돌아 사무실 문을 연다. 다솜이 사라지자 재필은 용에게 연락한다. 선글라스를 쓰는 재필은 클립보드의 자료를 훑는다.
" 용아. 어디쯤이니? "
" 지금 지하 벙커 3km 지점입니다. "
" 어떤가? 무언가 잡히는 거라도 있어? "
" 이놈들 미행당한 거 같은데요. "
" 그래? "
" 네. 보스. 정보에 의하면 232일행 중 고스트 능력을 갖춘 함정을 운용하고 있다 합니다. "
" 허~ 생각보다 능력 있는 일꾼을 데리고 있군. "
" 지금 제가 위치한 곳에서 미세한 바람이 움직였던 상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보스. "
아무래도 buzz 함정이 낮게 비행할 때 생긴 모래 자국을 보고 용이 추측하는 것 같다. 일괄적으로 길게 뻗어난 자국은, 바람에 날리어 양 갈래가 뚜렷하게 나누어진 모습이다.
" 후. 그깟 사냥꾼들에게 긴장할 것까지 있을까 모르겠군. "
" 아마도 고스트의 능력이라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보스. 어디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니 말입니다. "
" 이럴 때 사용하려고 방공 시설 갖춘 거 아니겠어. "
"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
" 용아... 이곳을 뚫을 수 있는 건 이 행성에 그렇게 많지가 않아 군대가 대규모로 오지 않는 이상은... "
" 그럴 겁니다. 보스. "
" 이제 그년만 생포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
" 네. 항체가 굴러들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
" 후. 좋아! 그들이 오는 걸 환영하자고. 그만 들어와. "
" 네! 알겠습니다. "
통신을 끊고 용은 검정 소형정에 몸을 싣는다.
- 10년 전 상희의 집 -
재필과 상희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서로의 성욕을 채우고 깊게 잠든 그와 그녀... 아니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재필은 깊게 잠든 척하고 있었다.
이불에 살짝 어깨를 내민 상희는 재필을 등지고 옆으로 누워 잠을 잤다. 그녀의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던 재필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그리고 상희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비틀었다.
그의 근육질의 상체가 검은 실루엣으로 가려졌지만 단단하게 느껴졌다.
" 잠들었군... "
그녀의 잠을 깨울까 걱정이 되는지 목소린 매우 작았다.
" 자... 시작하자! "
상희의 방에 불이 들어왔다. 문 옆에 스위치를 누른 사람은 용이었다. 그리고 문을 열며 들어오는 다솜. 이런 상황에서도 상희는 눈을 뜨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재필과 그녀가 정사를 나누기 전 재필은 상희에게 수면제보다 강한 약을 그녀에게 먹였다. 아주 쉽게 물에 녹여 놓은 약을 상희에게 건넨 재필. 그때의 상희는 재필과의 사랑놀음이 진정한 사랑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재필이 약을 먹여 자신을 잠재울 거란 생각은 가지지도 않았다. 용이와 다솜이 방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울퉁불퉁한 근육에 타이트한 티를 입으며 침대 안에서 재필이 빠져나왔다. 그리곤 이불을 치웠다.
나체의 상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를 똑바로 눕히기 위해 다솜이 움직였다. 20대 초반의 여성의 몸은 매끈하고 탄탄해 보였다. 같은 여자인 다솜이 보아도 매력적으로 빛나는 육체였다.
" 보스는 운도 좋아 이런 여자와 잠자리도 하고... 여자인 나도 부러운걸요. "
어린 다솜의 말에 재필이 대답했다.
" 그냥 내가 접대한 거야... 이년이랑 몸 섞이기 싫었다고! 하필 이년이 내가 필요한 것을 몸에 지니고 사는 년이었으니. 이 일만 끝나면 영원히 안녕이라고. "
용이 재필을 보며 말했다.
" 그러고 보면 보스는 여자에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
" 난 그냥 사람에 관심이 없어. 여자든 남자든... 아무튼 다솜아 빨리 필요한 거 이년의 몸에서 빼어내. "
" 알았어요. "
다솜은 커다란 주사기를 들었다. 상희의 난소를 채집하기 위한 주삿바늘. 복직근으로 바늘이 향할 때였다. 약의 힘이 다 된 것일까? 상희가 눈을 뜨고 말았다. 게슴츠레한 눈빛은 순식간에 변했다. 놀람과 두려움으로...
당황한 건 재필과 용, 다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빨리 깨어날 정도의 약 기능이 아니었기에.
다솜이 주삿바늘을 들어 올리며 뒤로 주춤거렸다. 상희는 움츠리며 팔은 가슴을 가렸다.
" 누... 누구시죠? "
떨리는 음성으로 상희는 재필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말했다.
" 재필씨... 어떻게 된 거에요? 아는 사람들이에요? 제 오... 옷 좀 주세요? "
그렇게 말하는 상희는재필의 눈빛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 허... 이게 아닌데 이게 이게 아닌데 말야... "
재필이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턱을 괴며 침대 위에 발을 올렸다.
" 차라리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이 아가씨야! "
상희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두렵고 자신과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변한 것에 공포심을 느꼈다. 그녀의 온 피부에 닭살이 돋아났다.
" 재필씨... 왜? 왜 그래요? 지금 나한테... "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상희에게 재필은 얼굴을 쭉 내밀었다. 매우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 이봐... 상희! 똑똑히 들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 몸속에 있는 난소가 필요할 뿐이거든... 깨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너무 두려워하지마. 금방 끝날 테니. "
상희는 눈물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 자신과 달콤한 밤을 보냈던 사람이었는데, 자신과 관계를 맺기 전 사랑한다는 속삭임으로 말하던 재필이었는데, 마음을 빨아들였던 입맞춤의 혀는, 독사의 혀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변해 있었다.
재필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 어때? 내가 너무 변했나? 흐흐흐. "
재필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손가락으로 상희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 조금만 참아 고통은 없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만 빼내면 네 기억을 지울 테니까! "
그리곤 고개를 돌려 용에게 지시했다.
" 저년 잡고 있어! 입 틀어막고! "
용은 재필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상희는 바둥거려 보지만 그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주삿바늘은 그녀의 몸 안으로 향했다. 매우 천천히.
' 읍! '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기절했던 상희는 눈을 떴다. 옆으로 누워 있는 그녀를 빽허그 하는 두툼한 팔. 피부와 피부 사이에 전달되는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돌아눕는다. 그리고 감겨 있지 않은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 또한 그녀를 보는 눈빛은 사랑이다.
" 재필씨 안 자고 있었어? "
" 그럼. 자기가 자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꼭 껴안고 있었어."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하고는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고 상희는 재필과 키스에 푹 빠졌다. 전날 밤의 악몽은 다솜으로 인해 모두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