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67-OEN
다솜이 잠시 생각하는 것인지 조용하다.
용선을 제외한 일행은 계속 신음만 내뱉는다. 용선은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는지 움직이기 시작한다.
" 어쩔 수 없겠어. 이대로 우리 편을 놔둘 수도 없고. 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
다솜의 당황한 표정과 급한 표정이 교차한다.
" 이런! "
용선이 투명한 반월도를 손에 쥐고 합장한다. 스님이 인사하듯.
다솜은 머리에 힘을 주어 자신의 기술에 집중한다.
용선이 능력을 발휘하기 전, 모두를 기절시킬 생각인 것 같다.
다솜이 관자놀이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가져간다. 그녀의 행동에 상희와 건남, 명치대인과 준은 더욱 고통스러운 듯 신음은 두배 이상 커진다.
" 으으악... 그...만! "
합장한 용선의 눈동자가 맑은 회색빛으로 맴돈다. 그 눈빛으로 다솜을 쳐다본다.
" 늦었어... 흔하지 않은 기술이군. 기억을 지우다니... "
그리고는
" 리턴. "
순간 이 공간이 용선의 몸에서 나오는 회색빛으로 물들여진다. 모든 물체와 다솜, 그리고 라구나 식구를 감싸는 회색의 물결. 다솜이 체념하듯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그러게 말 듣지... 조금 고통스러울 거야... 아~ 난 여자는 잘 안 건드리는데... 별수 없지 뭐. "
용선의 말이 끝나자 회색의 빛은 다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스르륵 스르륵'
꼭 대용량 메모리가 다솜에게 주입되는 것 같았다.
회색의 물결이 공간에서 차츰차츰 사라진다. 그 사라지는 빛에 양만큼, 다솜은 고통을 수반한다. 라구나 일행의 행동을 어느덧 다솜이 하고 있다. 머리에 울리는 커다란 고통이 그녀를 잠식한다.
" 으윽! 으악! "
머리를 부여잡으며 무릎 꿇은 그녀... 나뒹굴던 라구나 식구들은 의식이 되돌아왔다.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특히, 다솜에 의해 기억이 지워진 상희는 모르고 있던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있다.
' 휘이익~ 팍. '
고통에서 벗어난 상희와 그의 일행. 그리고 그와 상반된 다솜은 절규한다.
" 으~ 머리 뽀개 지는 줄. "
도리도리를 잘하는 명치대인이 정신을 차리며 말한다.
" 휴~ 기억 술사가 이런 능력이었군. "
건남도 고개를 양옆으로 깍닥거리며 일어선다.
" 능력자가 있었다니... "
준도 차츰차츰 눈가에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우쭐한 용선이 웃는다.
" 이봐들 다 이 몸 덕인 줄 알라고 꼼짝없이 여기서 다 기절할 뻔했어! "
그리고 상희는? 그녀는 정신이 들었지만 무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정신 차린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다솜의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간다. 다솜을 내려보고 있는 상희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난 알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무진장 열이 받았고,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조용히 입을 떼는 상희.
" 너... 너희가 내게 그런 짓을 했었던 거야... "
치욕이 그녀의 눈가에 내려앉아 있었다.
"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내게 감행했다는 거야. "
능욕과, 능멸당하던 자신의 모습이 주름진 이마에 새겨진다.
" 내가! "
상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너희에게! "
상반신에 힘이 들어간다.
" 그렇게 조롱받을 만큼! "
허리가 90° 돌아간다.
" 잘 못 한 거라도 있던 거야! "
그리고 되돌아오는 허리의 힘을 이용하여 주먹을 날리는 상희.
' 퍽! '
" 죽여 버리겠어!! 니들 모두. 죽여 버리겠어!! "
고함과 함께 날린 매서운 주먹이 다솜의 볼에 꽂혔다.
신음에 고통을 호소하던 다솜의 검은 안경이 멀리 튕겨 나간다.
목이 꺾이며 고개가 돌아간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다솜은 고개가 돌아간 방향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상희의 분노.
재필이 자신에게 행했던 실험, 나체로 묶여 힘없이 당했던 자신의 모습, 다솜으로 인해 그런 걸 잊고 재필과 몸을 섞으며 사랑을 나눈 기억이, 잘려져 있던 필름이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씩씩거리는 상희가 뒤돌아 건남을 째려본다.
" 건남옵! 이러기야... 옵은 알고 있었던 거야? "
건남은 민망한지 천장을 훑어본다.
" 그... 그게... "
" 그래서 라구나에 들어온 거냐고? "
명치대인은 어리둥절, 준과 용선의 머리엔 물음표가 달린다. 뭔데 상희와 건남이 저러고 있는 걸까? 지금 당장 재필이나 잡을 것이지, 시간이 아깝지 안냐옹~
지금 상희가 그러는 이유가 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10년 전 재필과의 사건 이후의 묻혀 있던 기억이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 옵? 건남 옵! 정말 무섭다. 옵 정체가 뭐야? 그냥 추적 전문 사냥꾼이라 말했잖아! 근데 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왜냐구? "
" 상희야. 진정해... 내가 잘못 접근한 건 사실이야... 인정할게... 하지만, 하지만 난 그렇게 해서라도 'OEN'을 잡고 싶었어... 너를 이용해서라도. "
이건 또 무슨 소리냐옹~ 재필을 잡는 것이 목표인 줄 알았는데... 'OEN'이라니? 그 마들가리 절대 현상범. OEN. 고양이 멍멍거리는 소리를 또 듣고 말았다아옹~
잠깐 상희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봐야 이들이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 10년전 상희 -
재필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상희는 무기력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신치료와 함께 병원에서 지내던 상희는 매일 울었다. 그때의 상희는 지금의 상희처럼 씩씩하고 강인한 정신력의 사냥꾼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병실 생활이 길어질 무렵,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를 찾아올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를 찾아올 친구 또한 없었기에 상희는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병실의 문을 연 간호사가 상희를 그에게 안내했다.
" 여기... 이곳에서 휴식 중이에요. 가족이나 친척이 없다고 들었는데... 사촌 오빠라니... 상희씨. 사촌 오빠 면회 왔어요! "
문틈 사이로 빼꼼 내민 간호사가 친절하게 상희에게 이야기했지만, 상희는 의문만 머리에 달고 있었다.
' 사촌이라니? '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 아.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
그리고 사라진 간호사, 문을 열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덩치와 잘 빼입은 회색 슈트, 반 꼽슬머리에 꽃을 들고 면회 온 그에게 상희가 물었다.
" 누... 누구시죠? 제겐 친척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
남자의 표정이 180° 바뀌었다. 간호사와 이야기하던 그런 상냥함은 사라졌다. 들고 온 꽃을 땅바닥에 놓으며 그가 말했다.
' 탁.'
" 이제야 찾았군. "
상희는 움츠렸다. 재필에게 생겼던 트라우마가 머리속에 잠입한 걸까? 이상한 두려움이 병실 안에 퍼져나갔다.
" 제... 제게 보... 볼일이라도... "
상희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상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 조그만 참아. "
" 차... 참다니... 요. 읔! "
' 푹. '
그에게서 뒤로 물러서던 상희가 신음과 함께 힘이 풀렸다. 낯선 남자가 그녀의 단중을 뾰족한 것으로 찔렀기에...
상희의 눈에 그의 실루엣이 뿌옇게 보였고 이네 눈이 감겼다. 의문의 남자는 그런 상희를 들쳐멨다. 무언가 위급해 보이는 그가 그대로 병원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 몇시간 후 -
상희의 눈이 떠졌다. 허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상희, 그녀는 갓등의 주황색 조명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거야. "
눈을 뜬 상희의 귀에는 병원에서 만난 낯선 남자의 음성만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상희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문이 트이질 않았다. 그녀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 너무 무서워하지 마. 다 너를 살리려고 한 것이니. "
그녀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러는 거냐고...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남자가 입을 뗐다.
" 아마 자네가 그 병원에 계속 있었으면 재필에게 잡혔을 거야. 그 녀석에게 너를 지키기 위해 그런 거니 이해해 주게... 참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이름은 들어 봤을 거 같은데... 난 OEN이라고 하네. "
그때의 상희는 사실 몰랐다. 그저 평범한 일반이었던 그녀는 세상의 악당에겐 관심이없었다. 그렇게 상희는 마들가리 행성 최고의 현상범을 이때 처음 만났다.
" 내 말 잘 들어. 상희양. 자네는 유일한 윤의 자손이기에 이제 곧 너를 두고 여러 사람이 다가올 거야. 물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고... 이제껏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신기하지 않나? 아마 그럴 거야. 자네는 이 행성의 희망일 수도, 아니면 그 반대로 고난일 수도 있어.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자네를 취하는 것에 따라서 말이지. "
상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냥 무서움과 두려움에 흘려들을 뿐이었다.
" 재필과 같은 놈에게 자네가 이용당하면 분명 이 행성은 파멸에 이를 거야. 그러니 당분간은 나와 함께 지내지. "
상희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조금만 참게 급소의 혈이 풀리면 움직일 수 있을 테니. "
과연 OEN이라는 존재가 왜 상희를 자신의 아지트로 데리고 왔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윤의 자손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쉬는 듯 OEN은 조촐한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아 어깨를 축 늘여 뜨렸다.
' 끼이익~ '
잠시 후 누군가가 낡은 철제문을 열며 들어왔다.
" 파파. 안에 있어요? "
" 들어오렴.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아이는 다솜이었다.
" 재필의 움직임은 어때? "
" 파파가 예상했던 대로 뒤에서 몰래 제스 양성을 시도하려는 것 같아요. "
" 훗. 결국 나와 같은 길을 가겠다는 건가? "
" 파파에게 보내야 하는이 여자의 샘플을 뒤로 빼돌리더라고요. "
"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군. 휴~ "
한숨을 쉬던 OEN이다솜에게 말을 이었다.
" 딸아... 과연 우리의 연구 결과를 그놈이 따라올 수 있을까? "
" 글쎄요. 힘들겠죠. 이 여자의 유전자가 있다 해도 그걸 풀어내는 방법을 모른다면요. "
" 그럼 계속해서 그 녀석을 감시하고 내게 보고해 줄 수 있겠니? "
" 걱정마세요. 파파. "
그렇게 다솜과 OEN이 대화를 나누고, 상희는 낡은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철제문을 두들겼다.
'탕탕탕탕.'
" 왔군... 들어오게. "
마치 기다렸다는 듯 OEN은 그를 들였다. 어리숙하게 보이는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그 어리숙함과는 다르게 결의의 찬 그가 바로 건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