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76-암호
그러고 보니 '재필'이 뭐길래 이들이 이렇게 지내게 된 걸까? 재필은 마들가리행성의 현상범이었다. 조직의 보스인 줄 알았던 그. 내막을 까보니. 그놈은 행성을 통으로 집어삼킬 심상이었다.
마들가리 행성엔 지구와 다르게 '제스'가 존재한다. 짐승이라 말하기엔 지능은 높았다. 괴물이라 해야 하나? 그래 지구의 몬스터 같은 존재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제스'를 이용하여 재필은 영생과 힘을 얻으려 했다. 강력한 제스를 양성하여 무기로 쓰려했던 재필이었다. 그렇게 제스를 뽑아내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막강한 자금력. 그것의 출처... 그건 아직도 조사하고 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 큰돈을 움직였던 것일까? 제약회사가 있긴 했지만, 그 많은 돈을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딘가 모를 검은 돈을 찾기 위해 행성의 검찰은 지금도 조사중이었다.
그런 현상범인 재필을 라구나의 상희와 건남, 다해, 명치대인이 잡은 것. 물론 내 영향이 컸지만... 음 화화하. 그렇기에 그들의 명성은 마들가리행성에 크게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좋았다. 자신들을 찾는 의뢰가 많아졌고, 그로인해 수입도 짭잘했다. 광고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방송출연은 그들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1여년. 이제 그들은 지친 것 같다.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상희가 저런 소릴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일 거다.
아무튼, 난 밥도 못 먹고... 짜증이다아옹~
- 23구역 도시의 거리. -
클럽 세브에서 나온 명치대인은 커다란 빌딩 숲을 걸었다. 휘황찬란한 조명들로 도시는 화려했다. 늦은 밤이지만 중심지의 밤은 환했다. 낮보다 강한 밝은 세상. 거리에 들리는 음악 소리에 명치대인은 전진하며 스텝을 맞춘다.
높은 빌딩, 커다란 전광판 스크린에 자신이 등장하는 광고가 흘러나와도 이젠 신비롭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잠시 가로수에 기댄다. 그리고 자신의 선글라스를 쓴다.
" 형 어디세요? "
명치대인의 물음에 답하는 건... 건남이었다.
- 오~ 이게 누구야. 연락도 안 하던 놈이. 무슨 일 있어?
" 무슨 일은요.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서 연락했죠. "
- 뭐. 그냥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건남의 말소리 뒤에는 커다란 음악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 형. 술 드셔요? "
- 어. 한잔하고 있지.
" 에효~ 술 좀 끊어요. 그놈의 술. "
- bar에서 일하는 놈이 그런 소릴. 나 같은 사람 없으면 너희 굶어 죽는다고...
" 됐수다. 요새 바빠서 가게 문 연 지 좀 오래됐다고요. 아무튼 어디에요? "
- 여기 buzz. 오랜만에 들렸는데. 너한테 연락까지 오네. 무슨 날인가?
" 지금 그럼 27구역이에요? "
- 그렇지. 왜 오려고?
" 네. 오랜만에... "
- 오~ 바쁘다는 녀석이. 알았다. 도착하면 연락해.
" 알았어요. "
명치대인은 선글라스를 벗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재필이를 잡고 나서 장만한 자신의 비행정으로 뛰는 듯 걸었다.
오~ 쌈박한 비행정이 그의앞에 보인다.
24년식 최신 모델. 재규엉 회사에서 출시한 6륜식 소형 비행정. 돈을 얼마나 처발랐기에 옵션도 장난이 아니다. 광고도 찍었겠다. 명성도 자자하겠다. 이 정도는 타야 되는 건가? 명치대인이 신식 비행정에 몸을 실었다. 건남이를 만나기 위해 위치를 입력시킨다.
'27구역 buzz.'
수직으로 상승하는 그의 애마를 쳐다보는 사람들. 그들의 시야에서 어느덧 비행정은 사라진다.
- buzz bar -
경쾌한 음악이 귓불을 떨리게 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춤을 추는 사람, 술 취해 흐느적거리는 주정뱅이 그리고 bar를 가득 메운 손님들.
그 안에 건남은 조촐한 맥주병을 입에 물고 있었다.
성진이 손님 접대가 끝났는지 그런 그에게 조심히 다가왔다.
" 형님. 오랜만에 왔는데 말도 못 붙이네요."
" 바쁜데 어쩌겠어... 아주 돈을 긁어모을 심상인가 봐. "
" 제가 버나요. 다~ 우현이 형 돈이죠. 헤헷. "
그렇게 어여쁜 아가씨 손님과 이야기 중인 우현을, 둘은 힐끔 쳐다봤다.
" 형. 재필 사건 이후 통 얼굴 보기 힘든 것 같은데 잘 지내셨어요? "
" 그럭저럭... 좀 쉬었지 뭐. "
" 그럼 요샌 어떻게 지내세요. "
" 나? 나야 집에서 지지리 궁상 떨며 지내지. "
" 믿을 수 없어요.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데. "
" 허~ 아무튼 왔는데 네 카드 점이나 봐 볼까? "
" 그럴까요? 내 카드를 어디에다 두었더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그렇게 말한 성진은 자신의 카드를 찾기 위해 bar 밑을 살핀다.
" 찾았다. 형. 복채는 선불인거 아시죠? "
" 우리 사이에 복채는...여튼, 옛다. "
10크랑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펴는 건남은 지갑이 없나 보다.
" 자 그럼. 당신의 미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신비안을 가진 성진 점쟁이의 카드 점. 당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헤헷. "
" 언제 이런 멘트도 만들고... "
" 손님들 재미있으라고 한 번 만들어 봤어요. 자 그럼. "
현란한 카드 섞기. 54장의 트럼프가 신비롭게 물결친다.
성진은 리본 스프레드를 한다. 스륵 하고 카드가 깔리자 리본 스프레드 턴 오버로 마감 짓는다. 카드가 부채꼴 모양으로 건남의 앞에 놓여 있다. 화사하게 웃는 성진이 건남에게 손가락을 튕긴다.
" 자 골라보세요. 넉 장. "
건남은 골고루 카드들 꺼내어 펼쳤다.
3클로버. Q다이아몬드. 7하트. 조커가 나왔다.
" 자 이제 풀이해 주시지. "
" 흠. 형. 요새 정말 뭐하시고 다니시는 거예요? 집에만 있는 거 맞아요? "
건남은 정곡이라도 찔린듯 흠칫 놀랬다.
" 왜... 왜? "
" 어린아이를 찾아다니는 형의 모습.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군요. 방해꾼이 있어요. 능력이 있는 놈이군요. "
" 오~ "
" 그리고 그 아이는 곧 비수로 형에게 다가와요. "
" 비수? "
" 대충 형에게 안 좋은 영향으로 다가온다는 거죠. 뭔지 몰라도 접으세요. "
" 이야~ 전문 점집을 하나 차려라 그게 더 돈 잘 벌겠다. "
" 맞나보군요. 제 이야기가? "
" 어느 정도는... 아~ 내 이야기를 술술 털어... "
그때, 버즈의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성진은 카드를 놓아두고 인사를 한다. 건남은 하던 말을 멈춘다.
들어온 손님을 맞이하는 성진.
" 어서 오세요. "
매우 친절한 미소가 친절사원 1등 할 기세다.
" 형. 잠시 있다가 올게요. "
그렇게 건남에게 말하고는 손님 챙기기 바쁜 성진이였다.
건남은 들어오는 손님을 살짝 살폈다. 명치대인이 온다는 소릴 했기에 그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 아니군. 음? 무기가 화려한데. "
지금 들어온 손님은 풍채가 컸다. 등에 매달은 바주카포가 '나 저격수요.'라 말하고 있었다.
" 사냥꾼 출신인가? "
혼자 말한 건남은 또다시 술병을 깨작인다. 시끄러운 음악이 점차 끝나고 조용한 음악으로 바뀌는 시점. 또다시 buzz의 문이 열린다.
검은 마스크와 힙합 모자를 눌러쓴 명치대인이 스르륵 들어왔다. 건남의 입가에 미소가, 명치대인의 눈빛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돌아가는 의자에서 건남이 일어섰다. 명치대인은 달려와 건남을 부서질 듯 허그한다. 이건 키스라도 할 필이다.
"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
" 얌마. 놓고 이야기해라. "
명치대인은 건남의 옆에 앉았다. 우현과 성진이 살짝 인사를 하고 명치대인은 손을 흔든다.
" 그래도 buzz는 가끔 오시나 봐요? "
" 아니. 한두 번 왔나? 재필 사건 이후로 통 나다니질 않았으니. 상희하고 다해는 잘 지내지? "
" 에휴~ 그냥 미친 듯이 지내요. 바빠서... 이 행성엔 왜 그리 범죄자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
" 무법천지이긴 해. 그러니 우리 같은사람들이 먹고살잖아. "
" 아무튼. 이제 라구나로는 안 올 생각이세요? "
" 뭐. 나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 상희가 캡틴인데 그 녀석 결정에 따라야지 않겠어? "
" 에휴~ 그러게 그냥 싹싹 빌지 그랬어요. 형 없으니 일 처리 속도가 늦다구요. "
" 됐다. 요놈아. 창기 형도 와 있다면서... "
" 창기형이야 뭐... 전투인원이고. 형이랑은 다른 직업군이잖아요. "
" 그렇긴 하지. "
" 할 일은 산더미인데. 이거 원. "
" 그렇게 바쁜 사람이 광고도 찍고. 잡으라는 범인이나 잡을 것이지. "
" 그러니까 더 바쁘죠. 광고에... 출연에... 나쁜넘들까지 섭력해야 하니. 부랄이 얼얼하다구요. "
"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군. "
" 대신 총 맞아 죽을 것 같다구요. "
" 왜 히리 있잖아. "
" 이제 그 녀석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도 신물이 나구요. 휴~ "
둘은 오랜만에 만나 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주저리주저리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쯤 buzz에 손님이 또 들어온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들... 영업사원이 떼거리로 들어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들은 아까 들어왔던 저격수를 찾아 앉았다. 정말 돈을 긁어모을 것 같다. 손님으로 붐비는 buzz. 무심코 바라본 건남은 다시 명치대인과 속닥거린다.
" 뭔. 야밤에 저런 차림으로 이곳에 들어오냐? "
" 형도 그런거 신경쓰세요? "
" 아니. 아무튼신기해서. "
" 그 보다. 어여 복귀할 생각 하셔야죠. "
"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거면. 그만해라. 당분간 이렇게 지낼 테니. "
" 으휴~ "
그때, 우현과 성진이 나란히 건남과 명치대인 앞에 선다.
" 성님들 그간 편안하게 지냈사옵니까? 이거 원 바빠서 인사도 못드리고 있었네요. "
그리고 성진은 흐트러진 카드를 정리했다.
" 음. 아무튼... 건남형은 조심하세요. 지금도. "
" 지금도? "
의아한 건남이 성진을 쳐다봤다. 무얼까? 조금 전 익살스러운 표정이 사라졌다. 곧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생각이 건남의 뇌리를 스친다.
" 성진아 무슨 일이야? "
성진의 옆에 있던 우현이 입을 뗐다.
" 아무래도 성님들... "
그가 운을 떼자 성진이 카드를 한장 한장 bar 위에 올려놓았다. 스페이드 1. 하트 5. 스페이드 3.
건남은 그 카드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클로버 5. 하트 1. 스페이드 8. 하트 7. 스페이드 5.
무엇을 하는 건지 모르는 명치대인은 건남과 성진을 두리번거린다.
" 뭐여? 이것이? "
우현이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간다.
" 성님. 쉿! "
성진은 또다시 카드를 내려놓았다.
스페이드 9. 하트 7. 스페이드 2 스페이드 6. 하트 10.
카드를 내려놓았던 성진이 멈췄다.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무언의 행동이 '알았냐' 하는 눈빛이었다.
건남 또한 약간 끄덕인다. '알았다.' 하는 표정이다.
성진을 주시한 채 명치대인에게 살며시 말하는 건남.
" 명치대인아 무쇠주먹 장착해라... 일본도도. "
" 갑자기! "
방금 성진이 보여준 카드의 의미는 성진과 건남만이 알고 있는 암호였다.
스페이드와 클로버가 숫자 1부터 13까지 ㄱ,ㄴ,ㄷ의 자음이었고 하트와 다이아몬드가 ㅏ,ㅑ,ㅓ,ㅕ식의 모음이었다. 물론 하트 1이ㅏ로 시작한다. 그렇게 순서대로 자음 19개와 모음 16개로 만든 암호였다. 그 의미를 조합하면,
'곧 싸움. 준비.' 라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건지 의아한 명치대인, 그러나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투덜은 거렸다.
오른손에 장착하는 무쇠주먹.
왼손으로 검병을 잡았다.
" 왜 이러는 거여? 들... "
순간, 뒤에 있던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검은 정장의 영업사원들이 쌍검과 단도를 들고 고함쳤다. 네 명이었다. 유니폼이 되어버린 정장의 사나이들 무섭게 생겼다. 모두다.
손님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웅성거리던 어느 손님이 " 꺄악! " 하고 소리지름과 동시에, 성진의 빠른 손동작.
조커를 날리는 스넵이 부드러웠다.
건남의 무심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며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의 다트를 던진다. bar 안쪽,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명치대인은 달려오는 사내의 안면에 180° 돌아 무쇠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우현은 bar 안에서 뛰어나오며 자신의 장도에 선을 그었다.
' 사사삭 '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무서운 녀석들을 제압했다.
한 녀석은 카드가 이마에 꽂힌 채 고꾸라지고, 한 녀석은 다트가 인중에 꽂히며 쓰러졌다. 또 한 녀석은 장도에 팔이 떨어져 나가며 선혈을 뚝뚝 흘렸다.
부여잡은 팔뚝.
정장의 그가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알다시피 한 녀석은 무쇠주먹에 날아가 사냥꾼처럼 보이는 놈 앞으로 널브러져 있다.
의자가 부서지며 말이다. 그 널브러진 사내가 신음했다. 테이블의 남자는 바주카포를 어느새 건남에게 겨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