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 87­어이 (88/179)

〈 88화 〉 87­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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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어이.

­ 12년 전 ­

거대한 실험장비 속의 상희는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었다. 물이었던가? 그건 아닌 거 같았다. 하늘빛 색이 감도는 액체가 물보다는 진했다.

거대한 실험기구 속의 상희는 눈을껌뻑거리며, 밖에서 자신을 관찰하는OEN과다솜을바라보고 있었다.

" 아버지. 232의 유전자로는 이제 얻을 것이 없어요. "

은색의 안경을 어루만지는다솜이흰색 실험복을 입은 채 차트를 넘겼다.

" 재필이 말한 대로인가? "

" 네. 그렇습니다. 더 이상제스의피를 압축시킬 점액이 나오질 않습니다. "

" 이것으로 몇 마리나 만들었지? "

" 12마리입니다. "

" 음.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은데... "

" 별수있겠습니까.일주일째제스의피를 압축시킬 액이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

" 이렇게 허무하게 연구를 끝낼 수도 없고 말이지. 아직 3마리가 더 필요한데. "

" 그 점액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의 수가 대략 100명입니다. "

" 100명이라... "

" 그것도 1마리에 들어가는 숫자이고요. "

" 그럼 도합 300명의 사람이 필요 하다는 거겠지. "

" 그렇습니다. "

OEN이상희가 담겨있는 실험관을 유심히 쳐다봤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아이를 함께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때가 좀 아쉽군. 우리에겐 절호의 찬스를 이렇게 놓칠 줄이야. "

" 아버지 지금이라도 그 아이를 찾아볼까요? "

"그래야겠지. 몇 년이 걸릴지 미지수지만 말이야. "

" 그럼 상희는 어떻게 할까요? "

"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워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을... "

다솜은끄덕였다.

상희는 그렇게 기억을 잃었다.다솜의술사 능력은 기억이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체,다솜의능력으로 상희는 기억이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재필 사건 이후로 끊어졌던 기억이 되돌아왔다. 1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혈육의 정.

되돌아온 그녀의 기억에 '다혜'라는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딸.

다혜.

매우 어린 아이의 모습, 옹알이하는 유아의 모습, 배시시 웃고 인상을 찌푸리며 우는 다혜의 모습이 상희의 머리를 스쳐 갔다.지금쯤이면12살의 어린 소녀로 자랐겠지? 어디로 갔을까? 엄마라는 자신을 알고 있을까? 살아 있긴 한 걸까?

그랬다.OEN에게잡혀 오기 전. 상희를 노리는 집단이 있었다. 검은 조직도 아니었으며...OEN처럼현상범도 아니었다. 그냥 상희도 모르는 집단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기억엔 그 집단이 어떤 단체인지 몰랐다. 다만,OEN과의힘 싸움에서 졌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에 남았다.

섬뜩한OEN의눈빛. 그 아래에는 그 무리의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납치해 달아난 한 명.

그 집단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한 명은 다혜를,OEN은상희를 각각 나누어 가진 꼴이 되었다.

아무튼 과거를 회상하며 상희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혜의 옹알이가 더욱 그녀를 잠들게 했다.

­ 31구역 경계면 ­

자르의눈과 코와 입이 부풀어 올랐다. 이곳저곳의 멍 자국은 덤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현석에게 받았던 수갑.뜨의바주카포와 바꾸었던 수갑이자르에팔목에감겨있다. 무릎 꿇은자르의앞에는건남과현석이 각각 팔짱을 끼고자르를내려 보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

풀들이 잔잔한 바람에 나풀거린다.

"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냐고?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

많이 맞아서 입을 못 여는 것일 수도 있다. 퉁퉁 부은 입술이 무거워 보인다.

" 내가 마 하 주 아아. "

(내가 말 할 줄 알아.)

그건 아닌가 보다. 다만 입이 부어 무엇을 말해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발음이었다.

" 현석아. 너무 팼나 보다. 이거 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 "

사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삭히지 못한 현석이었다.

그 이유는 이랬다.

자르가쏜 미사일은 현석의 비행정에 적중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뻥친 기분이 든다. 분명 적중했는지 알았다. 미사일은 사실 현석의 비행정으로 돌아오는 바퀴벌레드론을격추한 것이었다.

구형 모델인 현석의 비행정에는실드장치가 없었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맞았다면 공중분해 되어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 현석은 바퀴벌레드론으로그 미사일을 막았던 것이었다. 바퀴벌레드론의폭파에 격분한 현석이었다. 조금이라도 아껴보려 하다가 비싼드론이공중분해 되는 순간 현석은 잘 쓰지 않던 욕이 튀어나왔다.

" 이런 개×× 말×× 거×× 넌 잡히면죽었어!! "

미사일에 맞아 폭발하기보다. 목청에 터질 것 같은 현석의 비행정. 사정없이 비행했다.자르가낙하산을 펼친 곳으로.

땅에 착륙하자마자 현석은자르를향해서 들소처럼 뛰었다. 들판을 달리는 저 육중한 몸매가 낙하산을 푸는자르의등과 부딪혔다.

' 퍽 '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공중으로 솟은자르.

가드 할 틈도 안 주고 현석은 맨주먹으로자르를구타했다. 이건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매섭게 날아온 펀치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 퍽. 퍽. 퍽.퍽퍽퍽... '

" 이새꺄그드론이얼마짜린줄 알아!! "

820크랑. 가격만큼 때릴 기세였다. 그러나건남이현석을 제지하며 말렸다.

" 현석아 참아라. 참아. 이러다죽겄어... "

그런건남은곧바로 쓰러진자르의팔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자르에게 물었다.

" 너.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지? "

"미쳤어. 내가 그걸 말하게... "

자르가신음하며 말하자건남은뒤도 안 돌아보고 '씩씩'거리는현석에게 눈짓을 보냈다.

" 현석아 말려서 미안하다. 하던 거 해. "

그렇게드론의가격만큼 자르는 두들겨 맞았다.820대를 속사포로 날린 현석의 주먹으로 인해 자르는 꼴뚜기별 꼴뚜기로 변해 있었다.

자르가그렇게 약한 타입의 현상범도 아닌데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다니? 사실 타이밍이 좋았다.자르가낙하산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현석이 그 장소에 도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자르가낙하산을 풀고 정면으로 서 있었다면 분명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리기 좋게 널찍한 등을 보여준자르. 이건 '날 때려줍소' 하는 자세였으니 말이다.

물론건남같은 약골이 덤볐으면 때리고 나서 곱으로처맞았을지도모른다. 현석이와 같은 육중한 주먹이니 가능했다.

그렇게 꼴뚜기가 된자르가부은 눈을 부라리며건남과현석을 살피고 있다.

건남과현석은 넓은 초원에서 서로 담배를 꺼내어 문다. 어째 근심이 드는 것 같다.자르이 자식이 순순히 나불거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 휴~ 어떻게 할까? "

" 휴~ 전 이제 잡았으니 형이 알아서 해요. 고문을 하던, 죽이던, 아는 최면술사 있으면 독심술이라도쓰시던지요. "

입에서 연기를 뿜는건남과현석. 짧은 담배 타임이 끝나자건남은뭔가 떠오른 듯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똑딱'인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건남은입꼬리를 올리며 현석을 지긋이 바라봤다.

" 현석아! 그 총 좀빌려주려무나... "

" 내 총? 그냥 죽이려고? "

" 그래차롸리주겨...퇫! "

(그래 차라리 죽여.)

" 어디그러겠냐.영상에서 확인해 보니 이 녀석 바퀴벌레 무지 싫어하던데... "

현석이 빈정거리며 건남에게 총을 넘겼다.

" 뭐... 그래도 이런 거로불겠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놈인데... "

총을건네받은건남은총구를 자르에게 겨냥했다.

" 여기 바퀴벌레 들어 있지? 총알 말고? "

"그럼요. 12발 다 장전되어 있으니 형이 알아서 해. "

" 자...자르. 순순히 말해. 날 죽이려는 이유가뭐지? "

퉁퉁 부은 눈이지만 긴장한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 내가그까바귀버레로입 열거 가냐! "

(내가 그깟 바퀴벌레로 입열것같냐!)

애처롭다. 저 얼굴로 끝까지 악을 쓰는 걸 보면...

" 그럼 뭐. "

건남이방아쇠를 당긴다.

'틱. '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쏜살같이 날아가는 바퀴벌레가자르가슴에 달라붙었다.

' 척! '

몸서리 치는자르.

그리곤 이리저리 뒹군다. 몸에 붙은 생존의 아이콘 바퀴벌레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윽윽윽. 그러다고지짜쏘냐.윽윽...어떠캐.어떠캐. "

(그렇다고 진짜쏘냐.어떡해. 어떡해.)

다해처럼 귀요미 '어떠케'가아닌 이와 이사이에서 바람 소리가 낀 '어떠캐'가초원에 울려 퍼졌다.

저리 싫어하는가? 좀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바퀴벌레 경기가 있나? 아무튼건남의생각이 좀 먹혔나 보다.

" 어때 이래도 말 안 할 건가? "

"주겨. 그냐주겨!!으아악!! "

(죽여. 그냥 죽여!)

이거 기절 각이다.

" 그래도 말 안 하겠다! "

건남은권총을 들어자르의머리를 겨냥한다.

'틱! '

여지없이 발사된 바퀴벌레가자르의미간에 자리 잡았다. 저 부은 얼굴에 사팔뜨기가 되니 정말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무섭지 않은 천하무적 바퀴.

바퀴벌레가 기어가기 위해 오른쪽 첫 번째 발을 드는 느낌이, 자르는 생생하게 느껴지나 보다. 자르는 경악한다.

"으아아악! 으악. 으악... "

" 저 새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

지켜보던 현석은자르의행동을 의심하지만, 곧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 마.마하께... 이거 조 치워...으아악. "

(말.말할게... 이것 좀 치워...)

모든 비밀을 털어 놓을 기세가영력했다.자르가고성을 질러도 바퀴벌레는 그의 면상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각선으로 여섯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사뿐사뿐 움직였다.

" 진작 그럴 것이지! "

' 터벅터벅 '

건남이자르에게 다가와 얼굴에 있는 바퀴벌레를 손바닥으로 후려친다.

' 짝! '

바퀴벌레가 튕겨 나갔지만 손바닥은 이미자르의볼과 마찰을 이루었다.부어오른볼에 손자국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는다.

"자르? 또다시 묻지! 날 죽이려던 이유가뭐야? "

"띠바... 이러게마하주이야... "

(씨바... 이렇게 말 할 줄이야.)

그렇게 자르는 술술 불기 시작했다. 불명확한 발음으로말이다아옹~

자르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했다. 물론 그 힘의 과시는누구로부터였냐가중요했다.건남이아이를 찾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에건남을노리는 이가 있었다. 그가 공교롭게도팔콘이었다. 왜팔콘이건남의행동을 주시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찾는 먹이감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포식자의횡포라고나할까?

팔콘은상희의 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건남이그녀의 아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이 일에 시발점이었다.건남을죽이기 위해팔콘은이를 갈았다.

그럼팔콘자신이건남을직접 해치우면 될 텐데 왜 자르에게... 그리고 자르는 왜뜨에게건남을죽이려고 명령했던 걸까?

사실 자르는 조직의 두목이 되어팔콘을영입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팔콘은쉽게 따라오지 않았다.

" 내가너란녀석 밑에서 있을 필요 있나?크크크... 나보다 능력이 좋아야 내가 따르지 않겠나? "

자르의이마를 검지로 툭툭 치던팔콘의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모멸감과 열등감.

그래서 시작한 것이건남을죽이는 것이었다. 팔콘에게 인정받아야 그를 영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었지만, 조직의 재건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아이를 찾아 돌아다니는건남을선수 쳐 죽이고, 그 무용담을 팔콘에게 남기고 싶었다는이야길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자르는 말했다. 알아들을 수나 있는지...

" 별 거지 같은 이유가 다 있군. "

현석이 한 개비의 담배를 또 입에 물었다.

" 그럼자르.팔콘의위치도 알고 있다는 거겠군? "

건남이자르에게 관심을 더 보인다. 그와 상반되는 현석은 연기를 내뿜었다.

" 형. 그건 왜 물어? 설마... "

" 뭐 더 있어잡아야지. "

현석이 피우던 담배를 잊은 채건남을멀뚱히 쳐다본다. 그리곤...

" 아주 쉽게 말하네. 형! 아서라. 어차피 난 여기서 빠질 거지만 말이야. 그 놈 잡다가 괜스레 하늘나라 구경하러 가지 않으시려면. "

" 분명. 그 자식을 잡아야 아이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팔콘을잡아야 말이지. 그팔콘이란녀석이 상희의 딸을 왜 필요로 하는 지도 알아야겠고. 생각 보다 큰 녀석이 걸렸군. "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긴다. 멀리 날아가는 꽁초가 땅에 떨어지자 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형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재필 잡고,팔콘잡고, 어디OEN까지잡아서,현상범그랜드 슬램 달성하려는 거야!자중하시라고요. 이 참에 나랑 병원도 한 번 가보고. "

" 그런 것에 의미 없어. 형의 아이야. 상희의 아이고...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나는 군. 젠장. "

" 그래도 그렇지 그 악명 높은 사람을 무슨 수로 잡겠다는 거예요. 무기 살 돈도없단사람이... "

" 너있잖아! "

현석의 눈빛은 '이 형과 함께 있으면 은행 대출금 갚기 전죽겠다.'라는눈빛이다. 현석은 가출한 어이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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