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170이주
* * *
97화. 이주.
" 그래서 여기 모인 분들이 힘을 합쳐 5년 전부터 준비한 '천상의 대지' 프로젝트는 보시는 것처럼 90% 완성되었습니다. "
스크린의 화면이 밝게 변하며, 그가 말한 '천상의 대지'가 화면에 등장했다. 원형의 구체 주변에 띠를 형성한 비행체, 그 비행체가 녹색 액체로 잠식된 마들가리행성 위에 떠 있었다. 우주 위를 유유히 떠도는 비행체였다.
" 면적은 총 7억 7,000만 ha. 이 우주선에는 농업. 축산업. 임업. 수산업을 할 수 있는 방대한 토지와 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지금 행성의 생태 환경과 흡사하게 만들었습니다. "
듣고 있던 사람들이 감탄사를 날린다. '이 정도일 줄이야!' 하는 느낌일 것이다.
" 다만,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선 동력이 문제입니다. 모든 전략적 자원들이 이곳에서 생성되려면 우주로 나간 뒤, 5~6년 정도는 버텨야 하는 전력이 필요합니다. "
웅성웅성.
" 그래서 그 비행체를 운영 할 수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
마르자르크의 컬컬한 음성이 들렸다.
" 지금의 행성 전력을 모두 담는다고 해도 비행체를 쏘아 올리는 것.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을 버티는 수준입니다. 이 거대한 비행체에 드는 에너지는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 필요하니 말이죠. "
자조적인 목소리로 화르마 4세.
" 그럼 그것으로 끝난다는 건가? 이런 아무리 힘과 권력과 돈이 있어도 무리란 소리군. "
" 아닙니다. 그것이. "
" 그럼 방법이 있다는 얘긴가? "
" 네. 화르마님. "
" 그것이 무엇인가? "
" 제스입니다. "
" 제스? "
20인의 사람이 모두 '제스'라 말하곤 물음표를 달았다.
" 네. 제스의 피로 그것을 압축하면 엄청난 동력원을 만들 수 있습니다. 5~6년은 충분히 넘는 수준입니다. "
" 이봐! 빼아르라 했나? 지금 장난치나? 여태껏 몰살시킨 제스, 그 제스가 이 행성엔 없지 않은가? "
초특급 연예인, 좀버의 신경질적인 음색이 회의실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까 폴턴에게 짜증 내던 그 녀석이다.
" 네. 그렇습니다. 존버님. "
" 그럼 제스 말살 정책은 왜 한 건가? "
구겨진 표정으로 존버는 폴턴을 째렸다. 폴턴이 물 잔을 든다. 그리고 마신다. ' 꿀꺽. '
"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 주십시요. "
" 뭐? "
웅성웅성.
" 제가 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누가 제 말을 믿었겠습니까? 누가 개천에서 사는 일개 쭉정이의 말을 들으려 했겠습니까? 전 수상조차도 제 말은 듣지 않더군요. 흐하하하.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부터 그제야 이 말도 안 된다는 종말을 여러분은 믿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수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미친놈 소리만 들었겠죠. 이 자리에 오르기에 가장 빠른 길을 전 선택했을 뿐입니다. 제스의 말살로 말이죠. 흐하하하... "
음산한 웃음이었다.
" 여하튼 지금 이 상황에서, 제스가 사라진 이 시기에 어떻게 그 많은 에너지를 추출할 것인가? "
빼아르가 존버의 말을 가로챘다.
" 그걸 해결할 방법을 이제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모이신 이유가 이것 때문이지 말이죠. "
" 방법? "
" 네. 존버님. 수상님은 제스들의 전멸을 하는 동시에 제스 생산을 암암리 준비했습니다. "
" 허~ 기가 차군. "
" 재필을 알고 계십니까? "
마르자르크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 그 범죄자 말인가? 행성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그 인간? "
" 네. 맞습니다. 수상께서는 지금 여러분의 자금으로 그자를 도왔습니다. 제스의 양성을 위해서 말이죠. "
웅성거림.
모든 이가 놀라고 있었다. 그럼 재필의 그 막대한 자금이 다 수상에게서 나왔다는 건가?
아~ 그랬다. 재필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수상이었다. 재필은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몰랐다. 그냥 자신의 야욕을 위해 제스를 양성했다.
전투 병기로 양육한 제스들. 그 뒤의 자금줄이 수상이라는 것도 모르고. 수상은 그런 재필을 이용했다. 자신이 제스를 양성한다는 것을 세탁할 수 있는 좋은 먹잇감이 재필이었던 것이다.
재필이 232에게 잡히자. 수상은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제스를 힘도 안 들이고 자신이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능구렁이 수상으로 임명한다아옹~
" 이봐! 그 재필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만든 신형제스는 모두 파괴하지 않았나? 그것도 수상의 지휘하에... 매장하지 않았냐고! "
이젠 역정에 가까운 존버였다.
" 그럼요. 행성 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모두 파기시켰습니다. "
" 나참? 이 자식이 장난치나! 파기시키면 없다는 거잖아! "
" 존버님. 파기시킨 건, 작동을 멈추게 하는 의미였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그 화면들, 신종 제스의 파괴되는 모습은 일부로 만든 가짜 화면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코드가 일순간 제스를 멈춘 것이지 죽이진 않았다는 것이죠. "
뜨헉! 그럼, 그때. 재필이 연행되고 나서 그 많던 제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인가? 워메, 믿을 놈 하나 없다아옹~
" 지금 그 신종제스는 움직이지만 못할 뿐입니다. 아주 좋은 공급원이 깊은 지하에 숨어 있습니다. "
병기화 시킨, 재필이 만든 신종 제스를 지하에 숨겨 놓았다고. 언론에다가는 뻥을 치고... 옛기 이 사람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행성의 지도부냐아옹~
" 지하에 숨겨져 있다고? "
마르자르크가 놀라움을 감추며 물었다.
" 네. 화면을 보시죠. "
빼아르가 스크린의 '천상의 대지'를 기념탑으로 바꾸었다.
" 이 탑 아래로 지하 벙커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하지 않은 제스들이 잠들어 있죠. "
화면 속 기념탑의 내부가 공개되었다.
100m 높이의 탑.
그 아래의 지하 요새가 드러났다. 탑의 높이보다도 더 길어 보이는 지하 속 벙커. 그 안의 설계도면이 화면에 입체화되어 그려졌다.
" 이 안에 1만의 제스가 잠들어 있습니다. "
" 굉장하군! " " 허허! " " 놀라워. 아주 놀라워! "
각각 한마디씩 하는 회의장의 큰손들.
" 모두 다 여기 계신 분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
화르마 4세가 중후하게 입을 뗀다.
" 그럼. 모든 게 준비된 것이 아닌가? 우린 그동안 이주 준비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
" 네. 어떻게 보면 교황님의 말처럼, 여기 계신 분들은 편안히 짐을 정리하며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 제스를 이용하여 동력을 생산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건 저와 수상님의 몫이니 말입니다. "
빼아르의 말과 함께 회의실의 전등이 환하게 바뀌었다. 스크린은 사라졌다.
" 그럼. 수상과 당신만 믿겠네.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마련할 테니 말이야. "
화르마 4세의 눈빛이 희망으로 물결쳤다.
마들가리행성은 곧 붕괴할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썩은 수뇌부는 행성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파멸로 사라질 행성의 운명을, 뜬 눈으로 0구역의 액체에 잠식당할 운명을...
2년.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이곳은 전락할 것이었다.
휴~ 띠벌! 나 총각이라옹~ 그 뭐냐? 교미도 한 번 안 해보고 저세상으로 가라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2년 동안 아무래도 방탕한 삶을 살 것 같은 나. 삐뚤어 질 테다아옹~
어딘지 모를 사막.
알몸의 여성이 뜨거운 태양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사막을 걷고 있다.
천 쪼가리 하나 없이 벗은 그녀.
그녀가 걸어온 길 뒤로 길게 뻗어 있는 발자국. 그녀는 나이가 어린 소녀였다. 그래, 나이가 어린 상희였다. 20세 이전의 모습. 긴 생머리가 그나마 태양 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무뚝뚝한 표정으로 끝없이 걷고 있다.
그때, 멀리서 들리는 비행정 소리. 프로펠러가 커다란 비행정이었다. 헬리콥터와 흡사하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승용차와 비슷했다. 아무튼 그 비행정이 멀리서부터 상희에게로 다가왔다.
' 타타타닥. 타다다닥... '
요란하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 그녀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멍한 눈빛으로 목적지가 없는 이 사막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 다가오는 비행정.
어린 상희의 뒤에 커다랗게 자리 잡았다.
여기는 탱고.
말하라.
본부에서 말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래! 위치 전송하고 생포하기 바란다. 이상.
라저!
주고받은 교신. 교신이 끝나자 비행정은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상희의 긴 생머리가 비행정의 바람에 휘날렸다. 비행정은 정박을 시도했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수직 정박을 진행했다. 그제야, 그녀가 발을 멈춘다.
멍한 눈빛은 사람의 눈 같아 보이지 않았다. 비약적으로 큰 동공. 어딘가 모르게 지금의 상희와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정박한 비행정에서 완전무장한 군인과 선글라스를 낀, 정장의 사내가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희.
총구를 겨눈 군인과 정장의 사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변을 살피는 그녀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건, 사막의 모래뿐.
" 이 아이가 윤이 남긴 유산인가? "
어느덧 3m 앞까지 다가온 정장의 사내는 필무였다. 건남의 형이자, 상희의 남편.
젊은 그의 모습.
그가 가까이 다가와도 아무런 행동 변화가 없는 상희였다.
" 말 할 줄 아나? "
뜬금없이 상희에게 질문했다. 대답 없는 그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다가가는 필무, 그의 뒤 군인은 상희를 경계하며 정조준하고 있었다.
필무는 자신의 정장마이를 벗으며 상희에게 점점 다가갔다. 알몸의 그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려 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그를 따르는 상희.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제 태어난 갓난아기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뇌사 상태의 사람 같았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필무가 부드럽게 말했다.
" 이제 걱정하지 마. 우리가 널 보살 필테니. "
상희가 알아듣기나 한 것일까? 그냥 멍한 모습으로, 필무가 인도하는 비행정으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 타다다다닥... 타다다닥... '
요란한 비행정에 오르는 그녀...
0구역.
" 끄아악! "
소리치며 일어난 상희. 꿈속에서 만난 필무.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헉. 헉. "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3월의 토끼 정박장 안.
모든 기물이 넘어가 있다. 파손되어 있다.
라구나의 기체도 무언가에 얻어맞았는지 흠집이 군데군데 보였다.
무너진 벽, 삐거덕거리는 연결 통로의 문.
" 어... 어떻게 된 거지? "
마! 너가 다 부셨잖아!! 오리발 내밀 심산인가? 그리고 쓰러져 있는 일행과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눈에 첨가되었다.
" 이 사람들은... "
찢긴 자신의 옷자락을 훑는 상희.
" 도대체 무슨 일이... "
얘. 정말 모르는 건가? 자신이 폭주한 사실을, 그와 더불어 수비대에 폭격을 맞은 것도. 상희는 온몸이 뻐근한지, 서서히 일어서며 근육통의 아픔을 신음하고 있다.
" 윽. 윽. "
그렇게 일어서며. 쓰러져 있는 3월의 토끼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상희.
" 분명. 이들이 쓰러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
그때, 3월의 토끼의 모자가 꿈틀거렸다. 살았나? 그 모습을 보자, 상희는 그녀를 흔들기 시작했다.
" 연금술사님. 깨어나셨나요? 연금술사님. "
" 으으윽. "
3월의 토끼가 비몽사몽한 눈을 떴다. 그러나 일어날 기운이 없어 보였다.
" 괴... 괜찮은거신 거죠? "
" 으윽. 엉. "
말할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매우 천천히 모자 귀를 깔딱거렸다.
" 무~울... 좀. "
느려터진 토끼의 음성을 알아들었는지, 상희는 복도로 향했다. 물병을 들고 다시 돌아온 상희가, 토끼를 무릎에 받치곤 물을 먹인다.
아무튼 조곤조곤하게 물을 먹는 3월의 토끼의 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일어날 기색은 없었다.
" 끌 끌끌... "
웃을 기력은 있나 보다.
" 괜찮으십니까? "
" 안 괜찮아! 머리 뽀개 질 것 같아... 으윽... 공기 냄새가 다른 걸 보니 이동기가 움직였나 보군. 컥컥. "
헛기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3월의 토끼였다.
" 이... 이동기라뇨? "
" 자네에게도 건남이 아무 말 하지 않았나 보군그려... 끌끌끌끌... 콜록. "
" 네? 건남옵이 뭔가 일을 꾸몄나요! "
" 됐어. 그냥 다들 깨어나면 이야기하자고. 조만간 다들 일어날 테니. "
" 왜? 모두 기절 한 거죠? "
" 내 촉으로는 말이야. 누가 화학무기를 아지트에 뿌린 것 같은데... 끌끌끌... 근데! 어쩌다 내 아지트까지 이동한 거지? "
헐! 너가 모르면 어떡하냐 옹~ 이동기를 만진 게 너라옹!
"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야겠어. "
" 일어설 수 있겠어요? "
" 자네가 부축해 주면. "
" 알겠습니다. 연금술사님. "
상희는 3월의 토끼를 부축하며 이동했다. 3월의 토끼가 지시하는 곳으로, 그곳은 정박장 구석에 있는 통제실.
통제실이라 해서 특별한 건 없었다. 낡은 모니터와 커다란 통제기가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벽도 없이 뚫린 공간이었다.
" 여기. "
" 고마우이. "
토끼가 흐느적거리며 모니터가 놓인 책상에 앉았다. 무척 힘들어 보인다. 전원이나 올릴 수 있을는지. 떨리는 손가락을 전원 버튼에 가져가는 3월의 토끼, 그녀의 뒤에서 상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건남과 성우가 있는 곳에 눈을 고정했다.
" 연금술사님. 저 성우옵하고 건남옵 상태 좀 보고 오겠습니다. 괜찮으시죠? "
말할 기운도 없는지 다녀오라는 듯 손짓했다. 풀린 손가락이 흐느적, 흐느적. 상희가 건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3월의 토끼는 지금까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블랙박스 파일을 찾아 클릭했다.
" 어디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
점점 기운을 찾아가는 것인가? 그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고 나서 만 하루가 지나있었다. 모니터의 날짜와 시간으로 봐서는.
" 이런 온종일 쓰러져 있었던 건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