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흔한 술자리 >
오랜만에 모이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녀석들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여, 오늘의 주인공 왔네."
"퐁퐁이형 왔어?"
"미친 새끼 크크큭, 대놓고 퐁퐁이형이래."
나를 보자 미친놈들마냥 낄낄거리는 놈들. 평소 같았으면 '죽탱이 맞고 싶냐'고 맞받아쳤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운조차 없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며 대놓고 우울한 분위기를 폴폴 날렸다.
하지만 친구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퐁퐁이형 갑자기 왜 자작이야."
"이 새끼 알콜 중독 걸렸나봄. 그러니 와이프가 도망가지!"
"맞아, 퐁퐁이형! 술 좀 끊어~"
"… 안 닥쳐?"
"오오오- 카리스마~ 오줌 지릴뻔."
"나 벌써 팬티 젖은 듯. 축축해서 갈아입고 와야겠다."
"크크크큭, 미친 새끼."
속을 긁는 불알친구 놈들. 솔직히 나오면서도 이 자식들이 위로를 해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원래 이런 녀석들이니까.
옆에서 낄낄거리던 순박하게 생긴 봉수 녀석이 맥주병을 빼앗아 대신 따라줬다.
"자작 그만하고, 자 한잔 받아라."
"욜- 봉수 새끼 존나 정성스럽게 따르네."
"원래 돌싱축하주를 따라줄 때는 정성과 예의를 다해야 하는 법! 환영한다, 돌!싱!남!"
"풉-!"
"크크크큭, 옆에서 다 듣고 쳐웃잖아 미친놈아!"
"들리라고 한 건데?"
"악마 새끼. 진짜 저 새끼가 제일 또라이라니까."
… 아오 개자식들. 이런 것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온 불알친구들이라니.
하지만 녀석들의 놀림에 짜증이 나면서도 내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웃기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봉수 녀석이 따라주는 맥주를 원샷했다. 목구멍이 따가웠지만 그 차가운 청량감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크으, 살겠다."
"속 좀 후련하겠다?"
"후련하긴. 좆같다 아주."
"그래도 이제라도 알아서 갈라선 게 어디냐."
"인정. 애 없을 때 탈출해서 다행이야. 애라도 덜컥 뱄어봐. 양육비 따지면… 어휴."
"근데 너 어떻게 알게 된 거냐."
"뭐가."
"제수씨 말야. 아아, 이제 제수씨가 아니라 그년인가. 암튼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볼드모트 같은 년 바람 피는 거 어떻게 잡았냐고."
"그거? 얘기하자면 길지만 대충 알려주자면 그냥 운이 나빴어. 아니… 운이 좋았달까."
와이프의 바람현장을 잡게 된 건 우연이었다.
미팅 건 때문에 지방 출장을 다녀온 길. 예상보다 학술회가 빨리 끝나 하루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녀가 좋아하는 닭발을 사들고 몰래 집으로 들어갔는데….
"… 거실에서 존나게 떡치고 있더라고."
"하… 듣기만 해도 좆같네."
"피가 거꾸로 솟겠다."
"나 같으면 바로 칼 들었다. 어떻게 참았냐."
"몰라. 기억 안나."
대답 대신 술을 들이켰다. 씁쓸하다. 이것이 인생의 쓴맛인가.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경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퐁퐁이 새끼, 솔직히 난 니가 그럴 줄 알았다."
"뭔 소리야. 너 예슬이가 그런 앤 줄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븅신아. 사실 생각 좀 해봐라. 예슬이 걔가 얼마나 헤펐냐. 너 걔랑 만난 지 이틀만에 핸드폰 사달라고 한 거 기억 안나?"
"경도야 그건 애교지. 직장 멀다고 차 뽑아달라고 징징대서 정우 쟤가 아우디 뽑아줬었잖아."
"그것도 현찰박치기로 샀었지 아마? 직장도 같은데 솔까 차를 또 사는 게 말이 되냐. 차 필요하면 니 차 타고 다녀도 됐는데 말이야."
"그건 내가 가끔 미팅 때문에 차 가지고 기흥 공장으로 가면 예슬이는 차가 없으니까…."
"그럼 그때는 지하철 타고 가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전와이프에 대한 친구들의 험담에 순간 울컥해졌다.
왠지 나를 욕하는 것 같달까.
"야, 그래도 된장녀처럼 가방 사달라거나 그런 적은 없거든?"
"븅신아. 그건 니한테 말 안 하고 이미 질렀으니까 그렇지. 너 통장 관리 예슬이 그년한테 맡겼다며? 척하면 척인데 그걸 모르냐."
"맞아, 마지막에 너랑 예슬이 걔가 모임에 나왔을 때 걔가 메고 있던 게 샤넬백이었지 아마."
"예슬이가 그거 짭이라 그랬는데…."
"허영심 많은 걔가 퍽이나 짭을 잘 들고 다니겠다."
"… 쩝."
생각해보니 예슬이가 명품이 아니라면서 주기적으로 가방을 하나씩 사기는 했었다. 그런데 그게 명품일 줄이야.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은 친구들의 말이 사실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실체는 겨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해. 안예슬 걔 결혼하고 애 갖고 싶다면서 태교한답시고 퇴사하고 나더니 니가 벌어온 월급 받아먹으면서 집에서 놀기만 했잖아. 밥은 배달음식 지가 시켜 먹고 남은 거 주고. 그래놓고 정작 너는 용돈 20만 원이었다며? 도대체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았냐.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녔냐?"
"야야, 그건 애교지. 퇴직하고 나서 카페도 차려달라 해놓고는 막상 차려주니까 출근하기 귀찮다면서 오픈 들쭉날쭉하다가 말아먹었던 얘기도 빼먹으면 안 되지. 정우 이 새끼 그때 거의 손해만 한 1억 봤을걸."
"그 얘긴 그만해. 얘 아직도 그거 대출 갚는 중일 텐데."
"어휴… 암 걸려."
전와이프를 욕하던 친구들도 속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굴이 불콰해진 김봉수가 마른 안주를 집어먹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 퐁퐁썰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결혼 안 한 건 존나 행운이었어."
"풉, 김모쏠이 결혼을 안 했다고? 못한 거겠지."
"안 한 거야 등신아. 난 다시 태어나도 결혼 안 해."
"당연히 다시 태어나도 결혼 못하겠지. 니 와꾸를 봐라."
"크크큭."
이번엔 친구들의 안주거리가 모태솔로인 김봉수로 변경되었다.
타겟이 된 순박하게 생긴 봉수는 억울한 얼굴이었다.
"야, 아무리 내가 외적으로 딸려도 과거로 돌아가면 여자들 걍 꼬시지!"
"니가? 무슨 수로."
"당근 돈지랄해야지."
"니가 돈이 어딨어."
"와, 이게 사람 무시하네. 니네 웹소설도 안 보냐. 회귀하면 코인 사서 재벌되는 게 요새 회귀물의 정석인데."
"아! 맞네, 코인하면 되네!"
"그러네. 코인이 있었지."
코인 얘기에 친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코인광풍이 불었을 당시 다들 코인에 한번쯤 투자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봉수가 신나서 조잘거렸다.
"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2009년으로 가서 비트코인 존나 채굴할 거야."
"무슨 2009년이야. 한 2017년 정도로만 돌아가도 건물주 되는 거 일도 아닌데."
"그건 그래. 어느세월에 비트코인 폭등할 때까지 존버해. 17년이 딱 좋을 듯."
"하긴 비트코인이 17년 12월이었나? 그때 19,000불인가 2만 불 찍고 폭락하니까 그때가 좋긴 하겠다. 그 당해에만 한 20배 올랐지?"
"야 그때로 가면 비트코인을 왜 사. 리플이나 에이다, 아인스타이늄 같은 알트코인 사야지."
"와- 리플 오랜만에 듣네. 나 그거 아직도 48층에 물려 있었는데."
"씨발 내 친구 중에 리플 48층 주민이 있다니. 봉수야 니 대가리 좀 보자. 장식인가 확인해보게."
"리플 48층 대갈빡에 함 맞아볼래?"
"워워- 진정해, 진정해 으아아악!"
봉수가 들이받는 시늉을 하자 경도가 익살스럽게 도망갔다.
그런 경도를 노려보던 봉수가 맥주를 들이키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실 17년도에 코인한 사람들은 리플이나 에이다 같은 변동성이 컸던 코인들을 주목하겠지. 근데 진짜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바로 이더리움이지."
"이더리움? 그거 시총 존나 커서 변동성 존나 작았던 거 아니냐."
"코알못을 아닥 좀. 니들 이더리움이 그 당시에만 얼마나 오른 줄 아냐?"
"내가 코인 시작했을 때 한 20만 원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이미 폭등한 가격이고. 잠깐만 내가 찾아서 보여줄 테니까 놀라지 마라."
봉수가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그 당시 이더리움 차트를 보여줬다.
놀랍게도 2017년 1월 당시 이더리움 코인의 가격은 겨우 8달러 선이었는데 2018년 1월에는 무려 1400달러를 찍었다.
"8달러짜리가 1400달러가 됐다고? 그럼 수익률이 도대체 얼마야."
"단순 계산해도 180배, 18,000%지."
"180배… 미친."
"10만 원만 사도 1800만 원… 100만 원만 사도 1억 8천…. 미쳤다!"
"천만 원어치 사면 18억이야! 와- 이더리움이 넘사벽이네."
"뭐 이더리움보다 버지코인이란 애가 훨씬 많이 오르긴 하는데 그건 워낙 씹스캠이니까 위험하고. 만약 회귀하면 무조건 이더리움을 사서 존버해라. 알간?"
"김봉수 이 새끼 또 존버타령하네. 징한 새끼. 그래서 존버하던 리플이 지금 얼마라고?"
"아오 진짜 너 뒤진다!"
"으아아악!"
속을 긁는 경도의 놀림에 결국 화를 못참은 봉수가 뻥튀기를 집어던졌다. 그걸 보며 깔깔 웃는 친구들.
그때 옆에서 같이 웃던 동현이가 입을 열었다.
"근데 경도 말이 맞아. 차라리 봉수 저 새끼는 코인보다는 부동산 같은 걸 했어야 했는데. 존버 존나 잘하잖아."
"저 새끼가 그때 코인에 돈 꼴아박은 거 집 샀으면 지금 얼마랬지?"
"얘가 코인하기 전에 청약 넣으려 했던 마포 아파트 거기가 지금 16억이랜다. 분양가 5억이었던 거였는데 진짜…."
"심지어 미분양이었다지? 계약금 5천만 원만 있으면 대출 껴서 살 수 있었다며."
"아마도. 솔직히 난 저런 거 보면 과거로 돌아가면 코인보다는 부동산하고 싶더라. 코인은 변동성이 너무 심해서 위험해. 안정적인 부동산이 낫지."
동현이가 부동산을 예찬하자 경도가 반발했다.
"근데 요새 부동산은 매매하기도 애매하잖아. 양도세다 뭐다 세금 때문에 말도 많고. 부동산 할 바에 주식하고 만다."
"주식은 코인보다 수익률도 안 나오잖아."
"안 나오기는. 너 게임스탑이나 테슬라도 모르냐."
"아… 테슬라는 킹정이지."
게입스탑이나 테슬라는 나도 알았다. 코인이나 부동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주식에는 조금 관심이 있었으니까.
특히 테슬라는 직접 투자까지 해서 그 상승률을 직접 경험해보았고 조금이나마 수익도 냈었다.
"그러면 뭐해. 세금으로 다 떼어가는데."
"해외주식은 원래 파는 거 아니야. 한번 사면 끝까지 들고 가는 겨."
"주식박사 납셨네. 그래서 당신의 수익률은 얼마인가요? 김워렌버핏님?"
"… 닥쳐."
우리의 갈대, 경도의 주식 투자는 처참했다. 팔랑귀답게 이리저리 종목을 바꾸다가 손해만 봤던 것.
자신의 처참한 주식 잔고를 떠올린 경도는 짜증이 난 듯 화제를 돌렸다.
"좆같은 주식 얘긴 그만하고, 그보다 난 정우 저 새끼가 뭐할지 궁금하네."
"맞네. 퐁퐁이형, 말없이 안주 축내지 말고 함 들어나 보자."
"뭘?"
"넌 과거로 돌아가면 뭐할 거냐."
"나? 그야 시기에 따라 다르지."
"2017년이라 치자."
"글쎄…… 이혼?"
내 대답이 뭔가 처량하게 들린 걸까. 갑자기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경도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정정, 정정. 2017년 이전으로 하자."
"그때면…… 결혼 자체를 안 해야지."
두 번째 대답에 장내 분위기는 더더욱 숙연해졌다. 난 분위기를 띄우려 애써 웃었다.
"푸하하, 농담이야 인마. 회귀하면 뭐 별 거 있어? 그냥 열심히 돈 벌어야지. 니들 말대로 코인이든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전부 다 할 거다."
"아니기는… 씨발 퐁퐁이형!"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젠장!"
"자자, 분위기 좆같게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 우리의 탈출한 퐁퐁이형, 돌싱남 이정우를 위하여!"
"… 위하여!"
서로의 맥주잔이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맥주를 들이켰다.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김이 빠져버린 맥주. 이미 밍밍해져버린 맥주를 다시 되돌릴 순 없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 하물며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하지만…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 재밌겠네.'
순간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공상.
하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란 것을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오늘 마시고 죽자!"
필름이 끊길 때까지 함 달려보자!
* * *
"아우- 죽겠네."
도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걸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걸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새로 바른 하얀 벽지가 인상적인 천장은 일단 자취방은 아닌 게 확실했다.
'… 모텔인가.'
어제 취해서 친구들이 모텔에 데려다 놨나보다 여기며 몸을 일으켰을 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옆쪽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 때문이었다.
"헉! 누구야!"
놀라서 이불을 들추니 얇은 슬립차림의 미녀가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눈에 낯익은 실루엣은 놀라울 만치 전와이프와 닮아 있었다.
"… 에이 설마."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을 돌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확인했다.
곤히 잠든 옆얼굴이 보인다. 날카로운 턱선이 인상적인 그녀.
한때 죽도록 사랑했었던, 하지만 지금은 죽이고 싶을만큼 미운 자신의 전와이프, 안예슬이 분명했다.
"… 이런 미친."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정우는 자신이 전와이프에게 술김에 연락을 해서 실수로 하룻밤을 보냈다고 믿고 있었다.
[2017년 1월 1일 05:57]
스마트폰을 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