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다시 마주한 예술적인 X >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른 날짜와 시간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평소 쓰던 기종이 아닌 구기종의 투박한 스마트폰인 것도 이상했지만, 그 액정에 떠오른 시간은 더욱 이상했으니까.
2022년이어야 할 시간이 2017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고장났나."
잠시 에러가 발생했다고 여기며 설정앱에 들어가 이리저리 눌러보았지만 현재 시간은 2017년으로 표기되고 있었다.
재차 확인하려 인터넷에 들어갔다. 자주 쓰는 초록색 검색엔진 사이트. 하지만 오늘은 그 사이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2017년 정유년 붉은 닭의 해,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2017년이라고?
두 눈을 무겁게 하던 졸음기가 확 달아나는 기분이다. 아니, 사실 이미 옆에 전와이프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부터 졸음기는 달아난 뒤였고, 지금은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안예슬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졸려 보이는 두 눈엔 짜증이 서려 있다. 왜 깨웠냐는 듯한 얼굴.
짜증이 서린 얼굴마저도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팽팽한 피부는 마지막에 보았던 것보다 더 젊어 보였으니까.
"… 새해 아침부터 왤캐 부스럭거려! 졸려 죽겠는데!"
"……."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가!"
짜증 섞인 그녀의 말에 다시금 확신이 들었다.
'… 과거로 돌아왔다?'
놀랍겠지만 자신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확신이 필요했다. 정우는 다시 잠든 안예슬을 흔들어 깨웠다.
"아 진짜! 왜 그러는데!"
"… 오늘 며칠이지?"
"장난해? 당연히 오늘 새해 첫날이잖아! 2017년 새해!"
그녀의 입이 당연하다는 듯 2017년을 말한다.
정말 과거로 돌아왔단 말인가.
"… 말도 안 돼."
"갑자기 일어나더니 자꾸 이상한 소리할래? 어제 먹던 와인이 아직도 덜 깬 거야? 왜 자꾸 사람 짜증나게 하고 있어!"
그 말에 2017년 새해를 맞이하는 타종행사를 감상하며 전와이프와 와인 한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정우, 그는 2017년으로 돌아온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아드레날린이 치솟았고, 자연스레 몸이 벌떡 일어나졌다.
동시에 어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2009년으로 가서 비트코인 존나 채굴할 거야.'
'얘가 코인하기 전에 청약 넣으려 했던 마포 아파트 거기가 지금 16억이랜다. 분양가 5억이었던 거였는데 진짜.'
'너 게임스탑이나 테슬라도 모르냐.'
코인, 주식, 부동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정보들.
자신이 회귀한 게 맞다면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떠들었던 망상을 현실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 코인!"
"뭐? 그게 뭔…!"
다시 짜증을 내려는 듯한 그녀를 내버려두고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그제야 낯익은 거실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깨끗하고 하얀 벽지와 모던한 가전제품들로 꾸며진 거실.
자신은 모텔에서 깬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바로 2017년 무렵에 지내던 신혼집이 분명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나버린 오래전 기억이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거실 한쪽에서 노트북을 찾아냈다.
랩탑을 부팅하며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2017년에 코인 시세가 얼마였지?'
떠올려야만 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비트코인이 폭등하던 시기가 2017년 말로 기억한다. 즉, 2017년 새해 초라면 아직 비트코인이 급등하기 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노트북을 연 정우의 손이 바쁘게 날았다. 이 시기에는 단 한 번도 검색하지 않았던 코인거래소를 찾아 접속, 차트를 확인한다.
[BTCUSD: 990USD]
가격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현재 비트코인의 가격은 990달러. 어제 술자리에서 봉수 녀석이 떠들던 얘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긴 비트코인이 17년 12월이었나? 그때 19000불인가 2만 불 찍고 폭락하니까 그때가 좋긴 하겠다. 그 당해에만 한 20배 올랐지?']
2017년 말에 비트코인은 19,000불에 도달한다.
현재 약 1,000불 정도이니 거의 19배는 상승할 여력이 남은 것이다.
'… 기회다!'
심지어 겨우 20배라는 수익률도 만족하기엔 이르다.
비트코인이 아닌 다른 잡코인들, 일명 알트코인의 상승률은 몇십, 몇백 배도 거뜬하다고 했으니까.
봉수의 코인 얘기에 경도가 맞장구치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 그때로 가면 비트코인을 왜 사. 리플이나 에이다, 아인스타이늄 같은 알트코인 사야지.']
리플, 에이다, 아인스타이늄을 사라던 김경도의 말을 머릿속에 각인했고.
무엇보다 봉수가 보여줬던 차트가 떠올랐다.
18,000%라는 경이로운 상승률을 보여줬던 코인.
"… 이더리움."
지금 당장 이더리움에 투자해야만 했다.
* * *
타다다닥-
타이핑을 하는 건지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다.
안예슬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음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씨 진짜…."
어제 남편과 와인 한잔을 하고 잠에 든 뒤 비밀친구와 몰래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늦잠을 자버렸기에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은 새해 첫날.
당연히 공휴일이었기에 늦잠을 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댓바람부터 소란이냐고. 짜증나게!"
거실로 나서며 짜증을 담아 소리쳤지만, 남편이란 작자는 얼굴도 거들떠도 안 보고 노트북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대충 대답했다.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
"뭘 확인할 게 있다고… 어?"
남편의 뒤로 다가가 집중하고 있는 노트북 화면을 보니 초록색과 빨간색 막대기들이 화면을 수놓고 있었다.
"설마 아침부터 게임하는 거야? 오빠 이제 게임 안 하기로 했잖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저건 뭔데!"
"일."
"일은 무슨. 야한 거 보는 거 아냐?"
"아니야. 그보다 예슬아, 너 내가 준 월급 제대로 관리하고 있어?"
"… 엉?"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 공격에 안예슬의 안색이 굳었다.
"갑자기 돈 얘기는 왜 하는데!"
"돈 쓸 일이 필요해서. 그동안 내가 이체해준 월급 좀 확인하고 싶은데?"
"… 어디에 쓰려고! 이상한 데 쓰려는 거 아니야?"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통장이나 보여줘."
"오빠, 결혼하면 돈은 내가 관리하기로 한 거 잊었어?"
"잊지 않았지. 근데 돈이 급해서 그래. 지금까지 얼마 모아놨어?"
"그게…."
사실 최근에 정우의 월급과 자신의 월급을 합쳐서 눈여겨보았던 가방 하나를 질렀기에 통장에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안예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얼마 전에 은행앱 로그인하다가 비밀번호가 여러 번 틀려가지고 정지가 되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못 보여줘…."
"아 그래? 아쉽네. 그럼 대략 얼마 있는지라도 말해줘."
"… 기억이 진짜 안 나 오빠."
"천만 원이라든가, 이천만 원이라든가 대략적인 액수 몰라?"
"요새 확인을 안 해봐서… 미안해. 급한 일이야?"
"어. 오늘은 은행 문 당연히 안 열거고… 알겠으니 휴일 끝나면 바로 확인해줘."
"어? 어…."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한 안예슬은 안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황당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자신이 모멸당했다는 분노가 함께 어우러져 일그러진 상태였다.
'저 곰탱이가 갑자기 계좌를 왜 보여달라는 거지?'
어제만 해도 사랑밖에 모른다는 사랑꾼 면모만 보여주던 오빠가 오늘은 180도 달라져 마치 딴사람이 된 듯 찬바람을 폴폴 날리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고 불안해졌다.
안예슬은 벌떡 일어나 재빨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한껏 차려입은 뒤 다시 거실로 나서자 정우가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게?"
"… 응. 나 사실 친구들이랑 오늘 보기로 했는데 깜빡했지 뭐야. 잠깐 나갔다 올게."
"친구 누구?"
"채연이라고 알지? 걔 보기로 했어."
"채연 씨? 가만… 채연 씨면 홍콩지사로 발령났다던 그 친구 아니야? 지금쯤 중국에 있을 텐데?"
"… 아 내가 말이 헛나왔네. 채연이 말고 혜연이."
"아, 혜연 씨. 난 또. 뭐 약속이라니 잘 만나고 와. 근데 너 어른들한테 전화로 새해 인사는 돌렸어?"
"… 오빠는 했어?"
"난 이제 하려고."
"나도 이따 할게."
"그래라."
"… 그럼 오빠, 갔다 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어."
"무슨 아내가 간다는데 인사가… 아 몰라. 알아서 해."
마지막 인사에도 남편에게서 돌아오는 배웅 인사 건성 그 자체였다.
그게 거슬려서 꼬투리를 잡으려다가 이 불편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녀는 서둘러 불편한 집안을 벗어났다.
아파트 입구로 나선 그녀는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 진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결혼 3개월 차 한창 깨가 쏟아질 때의 신혼. 당연히 평소라면 다정하게 여보라고 불렀을 오빠다.
그런데 사랑꾼 오빠가 자신을 '너'라고 부르다니.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런 점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눈치가 둔해도 느낄 판에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인 그녀의 촉에도 쎄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걸까.
설마 어제 문자 메시지를 들키기라도 한 걸까.
'아니야, 내가 얼마나 확인했는데.'
술이 약한 편인 남편이다. 와인 몇 잔에 깊이 곯아떨어진 걸 이중삼중으로 확인하고 애인과 사랑을 속삭였기에 안예슬은 들키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이 쎄한 기분은 뭘까.
불안한 그녀에게는 무언가 위안거리가 필요했다.
스마트폰을 열어 익숙한 듯 단축키를 누르자 한 사람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성재민 본부장님]
바로 그녀의 비밀애인, 성재민 본부장이었다. 신호음이 꽤 길어져 끊어질 듯하던 전화는 다행히 연결되었다.
-오늘은 가족들이랑 있는다고 연락하지 말랬잖아.
"… 몰라요. 본부장님, 저 심심해요."
-남편은? 이 선임 옆에 있는 거 아니야?
"나왔어요."
-… 그래? 그럼 일단 내가 거기로 갈게. 추우니 근처 카페에라도 들어가 있어.
"오늘 가족들이랑 있어야 된다면서요."
-우리 예슬이가 기다리는데 슬쩍 빠져나와야지. 한 시간 안에 갈게.
"헤헤, 기다릴게요."
통화를 종료하고.
애인과 만날 생각에 안예슬은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며 오히려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을 배반하는 이 배덕감.
손거울을 들어 바라본 자신의 얼굴은 아직도 아름답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차오르며 그녀는 움츠러들었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 흥! 세상에 남자가 지만 있는 줄 아나."
이정우, 이 곰탱아. 너 없이도 재밌게 놀 수 있거든?
옷매무새를 다듬은 안예슬은 조신하고 힘찬 워킹으로 근처 카페로 향했다.
* * *
아파트입구에서 어딘가로 통화하는 듯하던 안예슬은 이내 행선지를 정했는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그 모습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정우는 쓰게 웃었다.
'성재민 그 새끼 만나러 가나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