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그게 왜 있어? >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는 게 아니다. 마치 방금 전 겪었던 것처럼 생생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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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과대학(KORTECH) 신소재공학과 차은숙 교수팀은 촉매환원법을 활용한 그래핀 대량생산 기술인 'SCR그래핀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기법을 통해 생산된 그래핀은 전기전도도가 기존에 비해 260배가 넘는 등 매우 우수하여……
……
이번 연구로 그래핀의 상용화 시기를 크게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혁신적인 이번 연구의 자세한 내용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지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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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하나의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그 기사와 함께 관련 논문 자료들도 떠올랐다.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보들이 담긴 논문을 보며 정우는 자신이 어디서 그 정보들을 접했는지 기억해냈다.
'… 특허관리실에 있을 때 본 건가.'
성운이노베이션을 퇴사한 후 정우가 옮긴 직장은 다름 아닌 대한그룹의 특허통합시스템 관리실이었다. 그 당시 대한그룹은 그룹내의 모든 특허를 한곳에 모으는 대형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데이터베이스 관리 경력이 있는 개발자들을 우대하여 모셨는데, 관련 경력이 있던 정우도 스카웃되었던 것.
하지만 당시에 스치듯 접한 정보가 무슨 연유로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핀 대량생산이라는 키워드가 트리거가 된 걸지도.'
어렴풋한 짐작으로는 마이크로그래핀MG 음극재와 관련하여 대화를 하면서 듣게 된 정보들이 기억을 되살리는 트리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이 기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아니다.
'… 촉매환원법!'
바로 앞으로 세상을 뒤흔들게 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바로 그 기술, 그래핀양산기술인 SCR그래핀기술의 핵심이 바로 '촉매환원법'이라는데 있었다. 앞으로 떡상하게 될 전기차 시장을 생각하면 몇천억 원, 아니 몇조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술의 핵심을 알게 되다니.
이 기억이 다시 잊히기 전에 서둘러 스마트폰을 들어 간단한 키워드로 정보를 메모했다.
그가 잠시 회식 자리임을 잊고 메모에 열중할 때였다.
"… 정우 씨 바빠요?"
"… 예?"
"뭐야, 누구랑 톡하길래 그렇게 집중해요? 애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좀 메모할 게 있어서요."
"메모요? 무슨 메모요?"
"아, 별거 아닙니다."
"그래요? 뭐 투자 정보 뭐 그런 건가? 괜찮은 거 있으면 서로 공유합시다, 정우 씨. 같은 동료직원 아닙니까."
이기갑 책임이 친한 척 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부담스러울 뿐이다.
"예, 뭐. 기회가 되면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나도 담배 피우려 했는데. 같이 가요 정우 씨."
"그래요 그럼."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던 정우의 뒤를 곽동호 과장이 뒤따라왔다.
고기불판의 뜨거운 열기를 벗어나 차가운 밤공기를 쐬니 갑갑함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화장실을 갔다 오니 담뱃불을 붙인 곽동호가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후우- 아까 불편했죠?"
"뭐가요?"
"이 책임님이요. 갑자기 알려달라느니 공유해달라느니, 좀 그렇죠? 그래도 그러려니 이해하세요. 이 책임님이 말은 좀 직설적이어도 천성이 나쁘신 분은 아니라서. 친해지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걸로 마음에 두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래요? 의외로 쿨하시네요. 전 소문만 듣고 한 성격 하시는 걸로 알았거든요."
"소문요? 무슨 소문요?"
"그 사무실에서 동기랑 한판 했다고 들어서요. 그 눈 부리부리하신 분이랑요. 아니에요?"
"양규철 선임 말씀이십니까? 뭐 싸운 건 아니고 그냥 의견 차이 때문에 약간 대립한 정도죠."
"에이, 듣기로는 정우 씨가 완전 찍어눌렀다던데. 그분이 꼼짝도 못했다면서요."
양규철과의 일이 영업팀에까지 퍼질 정도였나.
하지만 그 소문을 굳이 당사자 면전에다가 물어보는 저의가 궁금해졌다.
"그 얘기를 꺼내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냥 저도 궁금해서요. 정우 씨가 어떤 약점을 쥐었길래 같은 동료가 꼬랑지를 말았는지가요."
"… 글쎄요."
"저한테만 살짝 얘기해주세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 불편하네요."
명백한 거부의사에 곽동호 과장의 눈이 찰나지간 묘하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이내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하하, 제가 방금 이 책임님한테 뭐라하고선 똑같이 선을 넘은 것 같네요. 알겠어요, 다음부턴 그런 얘기 안 꺼낼게요. 혹시 이거 때문에 저 미워하면 안 됩니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뭐, 알겠습니다. 추운데 들어가시죠."
"이것만 마저 피고요. 추우시면 먼저 들어가 계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우는 곽동호 과장을 두고 식당 안으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곽 과장의 시선이 느껴진다.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간질간질한 감각.
이상하다.
'…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나.'
전사 회식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기갑 책임과 곽동호 과장과 술을 기울이며 친해지는 이벤트는 과거에 없었다.
특히 다른 팀인 곽동호 과장이 이렇게 친한 척 접근하는 일도 없었고.
그가 알던 과거가 변했다.
'혹시 이것도 내 행동 때문인 건가?'
회귀 이후 행한 결과들로 인해 원래의 과거가 조금씩 바뀌었다면?
곽동호 과장이 다가온 이유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왜?'
무언가 찝찝하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엇인가 있다.
자신의 행동 중에 원래대로 흘러가야 할 과거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
짚이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아내와의 이혼, 그리고… '양규철'과의 시비다. 두 일 모두 원래의 2017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 이중 어느 쪽이 지금 곽동호 과장의 행동이 변화하게 된 시발점이 된 걸까.
아직은 확신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그때 식당 안에 들어선 정우의 시선에 문득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상석에 앉아 있는 멀끔한 슈트 차림 미남.
성재민 본부장이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한 두 눈이 자신을 훑듯이 스쳐 지나간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정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성재민 짓이구나.'
이기갑 책임과 곽동호 과장. 사내에서 유명한 성재민 본부장 라인의 인사들이다. 아니, 이 회사에서 성재민의 라인이 아닌 인물이 있기나 할까.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두 사람이 술자리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있는 테이블로 합석한 이유.
담배를 피운다며 굳이 따라나와서 양규철과의 일화에 대해 얘기를 꺼낸 이유.
-… 대한화학과 그렇게 친하시다던데.
바로 자신이 양규철 선임에게 내뱉었던 그 한마디의 여파였던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먼저 추후 일어날 양규철의 산업스파이 사건에 성재민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는데?'
정우도 뉴스기사나 소문으로만 양규철 사건에 대해 접했을 뿐 자세한 내막은 몰랐었다. 그런데 이렇게 관련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될 줄이야.
게다가 정우가 지나가듯이 던진 이 한마디가 이들이 노심초사하며 움직일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점도 얻어냈다.
"… 재밌게 돌아가네."
정우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사내정치, 그 폭풍의 핵으로 깊게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기껏해야 잘리기밖에 더 하겠어.'
이미 코인 자산만 수백억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코인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중이다.
나중에는 이런 회사 정도는 아예 사버릴 수 있지 않을까.
'확 회사를 사버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하며 피식 웃어넘길 때.
주변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음? 잠깐만 서현 씨, 혹시 양 선임 못 봤어?"
"양규철 선임이요? 양 선임님은 회식 참석 안 하셨습니다."
"참석을 안 했다고?"
이상하다. 분명 함께 나왔던 것 같은데 없다고?
술자리 인맥 다지기를 좋아하며 회식을 절대 마다하지 않던 양규철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순간 정우는 문득 어떤 직감이 들었다.
'… 설마 지금 훔치려고?'
전사원이 참석한 회식. 회사는 지금 텅텅 비었을 터.
보안이 허술한 지금은 산업스파이인 양규철이 활동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 에이 설마."
머릿속에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무시한 채 고기 한점을 집어먹었다.
어느덧 식어버린 차가운 고기가 질겅질겅 씹힌다.
'그래. 무시하자.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설사 지금 그가 기술을 빼돌리려 한다 쳐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내 회사도 아닌데 굳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허울 좋은 정의감 때문은 아니다. 눈앞에서 담배를 피거나 돈을 뺏는 일진 아이들을 목격했지만 무시한 채 걸어갈 때의 불쾌함과 자괴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무시하기에는 마음이 찝찝하고 불편하다.
결국 그의 선택은 하나였다.
"… 안 되겠다. 서현 씨 나 회사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아. 팀원들한테 말 좀 전해줘."
"양규철 선임 때문입니까?"
"응? 그걸 어떻게 알았어?"
"방금 양규철 선임 어딨는지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 맞네."
"혹시 양 선임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겁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그건 아닌데… 아마 곧 저지를지도. 이거 신고해야 하나."
"경찰에 말씀이십니까?"
지서현이 놀란 듯 눈을 꿈뻑였다.
"그럼 양 선임님이 범죄라도 저지른 겁니까?"
"쉿! 서현 씨 조용히 해. 다 듣겠어."
정우가 주의를 주자 지서현의 목소리도 은근해졌다.
"… 알겠습니다. 근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아무튼 지금 나 회사 가야 하거든? 모른 척 좀 해주라."
"잠깐만요 선배님. 회사에 가서 양 선임 찾으시려는 겁니까?"
"어. 생각해보니 양규철이 지금 회사에 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서 신고해도 무의미하거든. 직접 가봐야겠어."
"그런 거라면 굳이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방법이 있거든요."
"응? 무슨 방법?"
"잠시만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지서현이 이상한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귀여운 하품하는 이모티콘에 '지각'이라고 적혀 있는 앱이었는데 그걸 실행하자 격자무늬로 나뉜 영상들이 눈에 보였다.
왠지 익숙한 그 화면은 어딘가를 비추는 CCTV 화면인 듯했다.
"서현 씨 이게 뭐야?"
"전에 만들어둔 건데… 일단 여기를 보십쇼."
지서현이 앱의 어떤 메뉴를 실행하자 촤르르 글자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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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이노베이션 본사 출입기록 로그]
……
<양규철(선임)>
-출근시간: 08:53
-퇴근시간: 업무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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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그건 성운이노베이션의 출입기록 로그 데이터였다.
정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걸 어떻게 갖고 있어? 설마 출입보안시스템 해킹이라도 한 거야?"
"…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일단 로그기록을 보면 양 선임은 아직 회사에 있는 것 같습니다. 퇴근 시간이 안 찍혀 있네요."
"… 그렇네? 혹시 양규철이 지금 어딨는지도 찾을 수 있어?"
"CCTV 확인해보겠습니다."
"잠깐 전산실…! 될 수 있으면 전산실 쪽 확인해봐!"
"찾아보겠습니다."
정우의 재촉에 지서현이 전산실 입구 쪽 CCTV 화면을 선택하더니 확대했다.
전산실이 위치한 층은 불이 꺼져 어두컴컴해서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복도 말고 전산실 안은 볼 수 없어?"
"여기 있네요."
전산실 내부 CCTV를 선택했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LED불빛을 뿜어내는 서버와 전선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전산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에 보이는 또 하나의 방까지.
전산실 내부에 위치한 그 방은 문이 열린 상태였는데 안에 등을 드러낸 남자가 무언가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익숙한 등의 실루엣. 작업하던 남자는 불안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똑똑히 드러난 얼굴.
"… 양규철!"
찾았다!
* * *
회식 1차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박학기 개발팀장이 개발팀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께서 가시면서 법카를 주셨습니다!"
"와-!"
"자 집에 가실 분은 알아서 가시고 2차 가실 분은 삼거리쪽 노래방으로 모여주세요!"
"네!"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누가 먼저 간 거야?"
"음… 양 선임이랑 이 선임이 안 보이네요. 서현 씨도 없고."
"아까 이 선임님이랑 서현 씨 급하게 나가던데요?"
"그래? 아니 회식 슬쩍 빠질 거면 나한테 보고는 하고 가야지. 에잉… 아무튼 갈 사람들 이동합시다!"
그렇게 아직 술과 흥이 부족한 직원들은 2차로 향했다.
그때 고급 세단 하나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짙은 선팅으로 차량 내부가 보이지 않는 차량. 그 안에는 성재민 본부장이 타 있었다.
최고급 내장재로 구성된 뒷좌석 시트에 깊이 몸을 파묻은 그는 운전을 하던 비서에게 물었다.
"이정우 건은 확인해봤습니까?"
"예. 이 책임과 곽 과장으로부터 보고 받았습니다. 잘 모른다는 투로 얘기하더랍니다."
"그래요? 뭔가 숨기는 것 같지는 않고?"
"워낙 방어적이라 아무것도 밝혀낸 게 없다고 합니다. 좀 더 파헤쳐 볼까요?"
"흠…."
성재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임 비서, 이정우가 어디까지 알아냈을 것 같습니까?"
"양규철은 확실히 노출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대한화학을 언급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물증은 없지만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다만 문제는 우리도 노출되었냐는 건데… 이정우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 얘기해보세요."
"음… 어차피 오늘 무대를 깔아줬으니 계획이 실행되면 양규철은 곧 노출될 겁니다."
"계획대로 된다면 말이죠. 근데 양규철 그놈은 영 미덥지가 않아서."
"오늘이 고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계획대로 되면 이정우가 아는 정보는 무용지물이 될 테니 그리 위협적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와 양규철의 연결고리에 대해 의심은 해도 증거는 없을 테니까요. 다만… 그렇다고 그냥 놔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서의 말에 성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꼭 미꾸라지 한 마리가 모든 일을 망쳐버리는 법이니… 결국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낫겠군요."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요?"
"퇴사 사유 하나를 만들어서 내보내도록 합시다."
"퇴사라면…."
"해결할 수 없는 업무를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괴롭히란 말이에요. 제 발로 걸어 나가게끔."
"예, 알겠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들으며 성재민은 눈을 감았다.
단단히 조여져 있던 넥타이와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자 이정우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이정우가 양규철을 막으러 이미 회사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 * *
모든 사원들이 회식을 위해 빠져나간 성운이노베이션 사옥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한 비상구 불빛만 드리운 그곳 중층 복도에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그 남자는 조심스럽게 걸어 복도 끝에 위치한 전산실 문 앞에 섰다.
보안시스템으로 굳게 닫혀 있는 전산실의 문.
하지만 남자의 손에 나온 카드키 하나로 간단히 무장해제당했다.
감추어둔 속살을 드러내듯 보관된 서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에 잠겼던 복도를 서버들의 LED 불빛이 밝히며 복도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도 비췄다.
얼굴이 드러난 정체불명의 사내. 그는 바로 양규철 선임이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마치 미로처럼 서버의 벽으로 빽빽한 전산실 내부를 거침없이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와본 곳인지, 아니면 길이라도 외운 것인지 단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전산실 내부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문이었는데 거기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구가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후우…
양규철은 눈썹에 매달린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긴장감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만 참아내며 '그'에게서 받은 또 다른 키를 꺼내 전산실 내부에 숨겨진 문을 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비밀의 방.
거기엔 독립된 또 하나의 서버가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깄구나!'
양규철은 서둘러 가져온 노트북과 서버를 연결했다. 빠르게 백도어프로그램을 설치한 그는 서버의 보안을 우회하여 접속, 그 안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용량이 상당한지 복사 시간이 상당했다.
1분, 2분 시간이 지나갈수록 초조함과 함께 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심장은 마라톤이라도 하듯 쿵쾅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100%]
다운로드가 완료되자 양규철은 추가로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실행해 서버 내부 데이터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완벽하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쏜살같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는 뱀처럼 은밀했지만 나오는 그의 몸놀림은 치타처럼 빨랐다.
독립서버실 문을 나서는 양규철. 품에 안은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 시, 시발! 성공이다!"
마침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범죄긴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그가 벌어들일 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으니 장밋빛 미래를 생각하면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의뢰인에게 자료를 넘기고 동남아로 잠수를 타면 절대 못 잡을 터.
따뜻한 휴양지에서 미녀들을 끼고 여유를 즐길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올 때였다.
삐익- 삐익- 삐익- 삐익-!
전산실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섬뜩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