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인 후 인생 대박-15화 (15/120)

< 15 : 후폭풍 >

사방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경보음과 함께 양규철의 머리에서 재생되던 핑크빛 미래가 순식간에 공포스릴러로 돌변했다.

"헉!"

들킨 건가.

도대체 어떻게?

당황한 양규철이 허겁지겁 전산실을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철컥-

열려있던 전산실 잠금이 저절로 잠기더니 갑자기 열리지 않았다.

기겁해서 전산실 문을 열어보려고 온힘을 다해 몸통박치기를 하고 발로 차고 별짓을 다 해보며 애썼지만 요지부동.

"씨… 씨발…!"

하다못해 서버 하나를 떼어다가 있는 힘껏 전산실 문에 내던져 보았지만 튼튼한 문은 꿈쩍도 안했다.

결국 양규철은 자포자기했다.

"… 좆됐다."

땀으로 범벅이 된 전신이 찝찝하다. 샤워라도 했으면.

허탈한 마음으로 전산실 문에 기대어 있을 때였다.

삐빅- 누군가 출입 시도를 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내 문이 열렸다. 그 서슬에 밀려 나동그라진 양규철. 고개를 들어 간신히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문으로 쏟아져나온 눈부신 빛이 어두컴컴한 전산실을 비추자 갑작스러운 명순응에 눈이 비명을 질러댔다.

"… 윽!"

눈이 멀어버린 듯한 충격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와 겨우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일련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푸른 제복이 인상적인 국민을 지키는 민중의 지팡이.

바로 경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

"저 사람이 스파이입니다."

바로 이정우가 양규철을 가리키며 서 있었다.

* * *

[… 국내 배터리제조설비기업에서 회사 내 기밀자료를 빼돌리려던 직원이 경찰에 의해 붙잡혔습니다. 산업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양 모 씨(31)는 해당 기업의 개발팀 소속으로서 전산실로 직접 침입해 자료를 유출하였고, 다행히 이를 알아챈 같은 동료 직원 이 모 씨(30)에 의해 저지되어 현장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양 모 씨가 빼내려던 기술은 차세대 전고체배터리 관련 기술로 업계에서도 매우 주목하고 있던 기술이라고 합니다. 현재 구치소에 수감된 양 모 씨는 묵비권을 행사 중이며 혐의가 모두 인정될 경우 최대 징역 4년에…….]

TV든 인터넷이든 어딜 가든 같은 기사와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점심을 먹으며 티비에 나오는 뉴스를 보던 지서현은 정우에게 물었다.

"…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뭐가?"

"양 선임님… 아니 양규철이 산업스파이였다는 거 말입니다."

"그거? 그냥… 느낌이 오더라고. 원래 그 사람이 좀 그랬잖아?"

회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말에 지서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 역시 대단하십니다."

"… 뭔 소리야. 뭐가 대단해."

"엄청난 직감이십니다. 저도 본받고 싶은데… 후천적으로는 어렵겠지요?"

"… 타고나는 거라 아마도."

민망해진 정우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서현 씨야말로 그건 어떻게 한 거야?"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출입시스템 말야. 해킹이라도 한 것 같던데 도대체 그걸 왜 뚫어놨어?"

"그게…."

우물쭈물하던 지서현이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저는 아침잠이 많습니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침잠이 많다고?

순간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설마… 지각을 피하려고…?"

"네. 맞습니다."

"와… 세상에, 상상도 못 했다. 지각 안 하려고 회사 보안시스템을 뚫는 사람을 볼 줄이야…."

"… 죄송합니다."

"뭐, 나한테 죄송할 건 아니고…. 근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한데? 실제로 지각하면 사람들이 다 알지 않아?"

문득 떠오른 의문에 지서현이 시선을 회피했다.

"… 그래서 쓸 일이 없습니다."

"……."

정우는 생각했다.

자기는 진짜 또라이를 부사수로 둔 것 같다고.

* * *

양규철 산업스파이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보안이 뚫린 책임을 물어 보안팀과 전산팀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찢겨 나갔고.

보안팀장은 해고, 전산팀장은 보직해임되었다.

양규철의 소속팀이었던 소프트웨어개발팀 역시 그 후폭풍을 피해 갈 수는 없었으나, 몰랐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박학기 팀장만 감봉처분으로 끝나게 되었다.

"… 양규철 이 개자식. 내가 얼마나 이뻐했는데…!"

"팀장님 참으십쇼. 혈압 오르면 우리만 손해라구요."

"하… 강 책임이 내 입장이면 참을 수 있겠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하-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양규철과 맨날 같이 점심을 먹으러 다니던 소위 점심파티를 이끌었던 박학기 팀장은 최근 들어 부쩍 욕이 늘어났다.

아끼던 부하직원 한 명 때문에 연봉이 쪼그라들었으니 오죽하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숨과 욕설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는 개발팀장 탓에 개발팀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대대적으로 내려온 감사 때문에 각종 서류와 팀 활동비 및 복리후생비 집계 등을 맞춰본다고 한동안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반면에 양규철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정우에겐 굉장한 혜택이 주어졌다.

보너스 지급은 물론이고, 추가 연차까지 주어졌다.

원래 지서현도 함께 받아야 하는 혜택들이다. 하지만 보안시스템을 해킹한 건 합법이 아니라서 일부러 밝히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정우만 수혜를 입게 되었다. 지서현의 조력을 밝히지 않으려 경찰 조사 때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어쨌든 정우의 공은 회사 차원에서 보상에 나섰는데 성운이노베이션을 이끄는 성태규 대표가 직접 치하할 정도였다.

"우리 회사를 지켜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포상을 받았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보여주기용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나서 그는 성태규 대표와 단독 면담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으나 입사할 때를 제외하면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성태규 대표는 성재민 본부장과 꼭 닮아 있었다.

다만 성재민이 날카로운 인상이라면 성태규 대표는 굉장히 유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건가?"

"그냥 운이 좋았달까요. 양규철 그 사람은 평소에 느낌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하하, 옛날부터 운이 좋은 사람을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었지. 아마도 나는 정우 씨를 가까이 해야 할 운명인가 봐. 하하하."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털털하게 웃는 성태규 대표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성 대표가 그에게 물었다.

"사실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가 아는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줬으면 해서."

"무슨 얘기를 말씀이신가요?"

"양규철이가 기술을 빼돌렸는데 조력자가 있는 것 같아."

성태규 대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우도 살짝 놀랐다.

세간의 소문으로는 연구에만 힘쓰고 회사에 관심이 없다던 대표다. 그런데 의외로 그가 이 사건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 조력자요?"

"경찰이 조사한 내용을 좀 봤는데 양규철이 전산실 카드키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해. 그 안에 독립서버실 키도 가지고 있었고. 혹시 따로 들은 바 없는가? 나는 이정우 선임이 양규철이를 잡은 걸 보면 뭔가 알고 있는 눈치 같던데."

"음…."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양규철의 배후로 성재민 본부장이 의심 간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하지만 물증이 없고 오로지 심증뿐이다.

섣불리 말하기엔 괜히 오해를 빚을지도.

"…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니지. 이거 내가 괜히 부담을 줬구만. 신경 쓰지 말게."

성 대표가 손사래를 치던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본부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이 열리며 성재민 본부장이 들어왔다.

"… 아, 선객이 있었네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야. 지금 막 다 끝난 참이거든. 이정우 선임, 오늘 대화 즐거웠네. 나중에 또 얘기하자고."

"네 대표님. 얘기 즐거웠습니다."

"혹시 얘기할 게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찾아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우는 성재민 본부장을 지나쳐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를 흘깃 쳐다보는 성재민 본부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양규철을 잡았는데 분하지도 않은 건지 무표정한 두 눈은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성재민 본부장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정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남겨진 두 사람.

성태규 대표가 본부장을 응시했다. 정우를 상대하던 유한 인상은 어느새 위엄 있게 변한 뒤였다.

"확인해봤어?"

"예. 양규철이 가지고 있던 전산실 카드키는 한 달 전에 도난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때 카드키를 폐기처분하고 새로 발급해야 했는데 미처 처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 그 얘긴 들었어. 보안팀이나 전산팀원 중에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은?"

"심증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물증은 없습니다."

"본부장 생각은 어때?"

성태규 대표가 턱을 쓸으며 물었다.

"일단 안고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보안팀은 그렇다 쳐도 전산팀 정도의 인재를 구하기가 쉬운 게 아니라 인력 공백은 쉽게 채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니냐."

"참초제근慘草除根을 원하시면 전부 해고하시죠. 다만 저는 보직해임과 대기발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다른 보직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 경영을 전공한 네가 더 잘 알겠지. 알겠다."

"맡겨주십쇼."

"하지만 본부장 네가 잘했다는 게 아니야. 이번 일은 좀 실망이 커."

성태규 대표의 눈이 차가워졌다.

"믿고 일을 맡겼는데 이런 식으로 구멍이 뚫리면 어떡하나. 이정우 선임이 양규철 고놈 못 잡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 죄송합니다."

성재민 본부장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푹 고개를 숙였다.

성태규 대표가 혀를 끌끌 찼다.

"너 일 잘하는 거 알아. 미국물까지 먹고 온 놈인데 못할 수가 없지. 그런데 말이야. 요새 왜 이렇게 힘을 못 쓰는 거야? 아랫사람 단도리 하나 제대로 못해서 원… 쯧."

"제가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정우 선임이 잘한 거고. 아무튼 알겠어."

"… 가보겠습니다."

"아참, 특허출원은 알아봤어?"

"MG음극재 기술 특허출원 건 말씀이십니까? 예, 알아봤습니다. 바로 진행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바로 진행해. 여태 내 고집 때문에 기술을 너무 묵혀뒀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성태규 대표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사실 그의 염원은 결점이 없는 마이크로그래핀MG 음극재 기술을 완성시켜서 특허로 출원하는 것이었다. MG음극재 기술의 필수재료인 그래핀을 양산하는 방법을 찾거나, 그래핀을 대체하는 다른 소재를 찾는 게 목표였던 것.

하지만 이번 산업스파이 기술유출미수 사태를 겪고 깨달았다.

죽 쒀서 남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때문에 부랴부랴 특허출원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성 대표의 말을 들은 성재민 본부장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래핀 기반 음극재 관련 기술 몇몇 개가 이미 특허심사 중이라 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알아. 하지만 그것들보다 나와 우리 연구팀이 만든 MG음극재 기술이 더 정교하고 뛰어나지. 기반 원리도 다르고, 음극재에 그냥 그래핀이 아닌 마이크로그래핀을 쌓아넣는 건 우리가 유일하고. 그건 너도 알 텐데?"

"그래도 비슷한 분야라 반려가 되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특허출원에는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 재민이 너는 진행만 잘해."

"… 회사에서는 본부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쌀쌀맞기는. 그래 알았다. 일 보러 가자."

어깨를 툭툭 치고는 대표가 대표실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가는 성재민 본부장.

하지만 아버지의 격려를 받은 아들의 얼굴은 의외로 싸늘하였다.

* * *

대표실을 빠져나온 성재민.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 바로 쳐냈어야 했는데."

양규철이 이정우 선임에게 들켰다고 했을 때 바로 이정우를 처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안일하게 떠보려고나 했다니. 그 잠깐의 방심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수습을 해야 할 때다.

그때 임 비서가 급히 다가왔다.

"본부장님, 대한화학 한민준 부사장님이 전화하셨습니다."

"그래요?"

"네. 오늘 저녁에 그곳에서 뵙자고 하셨습니다."

"음… 알겠어요. 오늘 저녁 스케줄 다 취소해요."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한 쿠사리 듣게 생겼다.

하지만 매도 먼저 맞으면 낫다고 성재민은 용기 있게 호랑이굴로 향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고급 요정料亭. 그곳은 예약손님만 받아서일까. 서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했다.

가드에게 방문 확인을 거친 그는 고풍스러운 한옥의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테이블.

거기엔 이미 술 한잔을 기울이고 있는 안경 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머릿기름부터 얼굴과 온몸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남자. 그가 바로 대한화학의 2인자 한민준 부사장이었다.

"성 본부장, 어서 와요."

"늦었습니다."

"늦기는. 약속시간보다 5분이나 일찍 왔구만. 아, 내가 배가 좀 고파서 먼저 시켰어요. 회 좋아하지?"

"좋아합니다."

"자 한잔 받아."

술을 또르르 따라준다. 성재민도 따라주려 했지만 한민준 부사장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거절했다.

"난 이미 있어서. 쭉 들이켜."

"예."

한 부사장의 말에 성재민은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뜨끈한 정종은 도수가 꽤 되는지 위에 불을 지르는 기분이다.

하지만 한 부사장의 술 권유는 멈추지 않았다.

한잔, 두잔, 세잔, 그렇게 다섯 잔을 연거푸 먹이고 나서야 한 부사장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성재민 본부장."

"… 예."

"내가 무슨 말 할지 알고 있어요?"

"…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아네.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아랫사람이 잘못한 건데. 안 그래요?"

"… 제 잘못입니다. 제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주워 담을 수 없는데."

한 부사장이 핵심을 짚었다. 그의 말대로다. 양규철이 잡힘으로 인해 기술을 누군가 노리고 있는 걸 알게 되었으니 성운이노베이션은 더더욱 보안에 힘을 쓸 것이고, 사실상 다시 기술을 노리는 건 굉장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성 대표는 뭐라던가요?"

"특허출원을 하겠답니다."

"특허출원이라… 뭐 이거 완전 새 되게 생겼구만. 그럼 이제 우리 일은 없던 걸로 되는 건가?"

한 부사장의 말에는 성재민과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한 협약을 깨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성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MG음극재 기술 유출 건은 없던 걸로 해주십쇼."

용기를 내어 의사를 전했다.

MG음극재 기술 유출 건. 한민준이 지원하고 성재민이 주도한 이 사태는 복잡한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현재 성운이노베이션의 배터리사업부는 매년 적자만 기록 중이다. 그 적자 규모만 수십억 단위. 성재민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인 배터리사업부를 축소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인 성 대표의 염원이자 연구비를 미친 듯이 쏟아붓고 있는 배터리사업부의 핵심기술인 MG음극재기술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판단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결탁의 대가로 겸사겸사 수백억의 뒷돈이 약속되어있었기에 성재민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계획의 핵심이었던 양규철이 실패하기 전까지는.

'이미 어그러졌어.'

MG음극재기술을 다시 빼돌리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기에 아예 없던 일로 하는 게 맞았다.

성재민도 무리해가면서까지 기술을 빼돌릴 정도로 애사심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의 적자를 줄이고 흑자로 전환하여 기업의 재무성을 안정시키기 위한 애사심과 기술유출로 단번에 수백억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욕심이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진 것뿐이었다.

성재민의 부정적 의사에 한민준 부사장이 가만히 술을 홀짝였다.

"그동안 내가 좋은 데 많이 데려다주고 이뻐했는데,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이제 와서 발을 빼시겠다?"

"…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성 본부장 이미 너무 발을 깊이 담갔는데?"

"… 예?"

"양규철 산업스파이 사건의 주동자가 왜 모르는 척이실까."

돌직구로 훅 들어오는 협박에 성재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부사장님! 주동자라뇨! 양규철은 중국 쪽에 사주를 받아서 독단적으로…!"

"아니 중국은 맞는데, 그 중국에 넘기려고 한 게 성 본부장 아닙니까. 오리발도 적당히 내미셔야지."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모르는 척을 하고 그러실까. 하하하."

서둘러 수습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보았지만 한민준 부사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제야 성재민은 단단히 잘못 걸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역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 저 엮으시면 부사장님도 무사하지 못하실 겁니다. 제가 벙어리도 아닌데 입 꾹 다물고 있을 것 같습니까?"

"멍청하기는. 검사한테 백날 내 이름 떠들어봐요. 걔네들이 날 소환하나 안 하나."

"그게 무슨…!"

"성재민 씨, 당신이랑 나랑 차이가 뭔지 알아?"

한민준이 씨익 웃었다.

"바로 빽이야. 나는 대한그룹이 뒤를 봐주고 있고, 당신은 좆도 없고."

"……."

"그런데 감히 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나를 협박하려 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이 성재민을 꿰뚫었다.

성재민은 온몸이 낱낱이 해부되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머리털이 쭈뼛 서며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게…."

"아참, 성재민 씨, 내가 재미난 거 보여줄까요? 내가 얼마 전에 재밌는 걸 받았는데 말이야… 어디 보자… 아 여깄네."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낸 부사장이 동영상 같은 걸 재생하더니 성재민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그건 CCTV화면으로 보였는데 침대에 뒤엉켜 있는 두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의 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두 남녀를 본 성재민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바로 자신과 얼마 전 헤어진 내연녀 안예슬이었기 때문이다.

"… 어, 어떻게 이걸…!"

"그게 중요한가. 내가 이걸 손에 넣었다는 게 중요하지. 이야, 이거 구도가 기가 막히네. 그러고 보니 우리 성 본부장, 참 잘생겼어. 연예인 해도 되겠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어요?"

"……."

"내가 말이지, 우리 성 본부장 연예인으로 만들어주려고. 어때, 우리 재민 씨 전국적인 포르노 스타가 좋아요? 아니면 매국노 산업스파이가 좋아요?"

"… 그게 무슨…!"

"9시 뉴스에 나오고 싶으면 실패해보세요. 전 국민이 다 아는 스타로 만들어드릴게."

"……."

한민준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반면에 성재민은 사색이 되었다.

당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엮여버린 것이다.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 앞에서 성재민은 살기 위해 다급히 대답했다.

"아, 아직 아닙니다! 바, 방법이 있습니다!"

"뭐가 아니지? 특허출원하면 끝인데?"

"… 아직 딱 하나 마지막 수단이 있습니다. 제게 방법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 흠 일단 들어보자고."

성재민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생각해내야만 한다. 한민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계획을!

이윽고 하나의 방법이 즉흥적으로 떠올랐다.

"… 회사를 먹는 겁니다."

"회사를? 어떻게요."

"… 일단 대한화학에서 저희쪽에 납품 계약을 제안하는 겁니다. 대규모로요. 한… 2천억 정도?"

"2천억? 흠… 뭐, 계속해봐요."

"아시다시피 그 정도 대규모 계약은 성운에서 감당이 안 됩니다. 납기일이 정해져 있으면 더더욱이요."

"그렇지."

"… 하지만 저희 회사 입장에서도 2천억원 정도 규모의 계약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혹시 공장을 더 지으려나?"

"… 그렇습니다. 대출을 땡겨서라도 공장을 늘려서 납품을 맞춰야죠."

"오호…! 이해했어!"

한민준 부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니까 계약으로 대출을 유도한 다음에 성운이 공장을 짓게 해서 현금유동성을 조이고, 계약을 취소해버리려는 거구만? 그 직후 은행에서 대출 회수가 들어오면…!"

"… 예. 유동성이 떨어진 성운은 어쩔 수 없이 부도사태를 맞게 될 겁니다…. 아버지가 지분을 내다 팔지 않는 이상요."

"그때 우리가 딱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거지."

"… 맞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MG음극재 특허는 성운이노베이션 법인 명의로 진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성운을 먹으면 기술도 꽁으로 먹겠네? 이야- 역시 성재민 본부장 머리 진짜 잘 돌아가? 괜히 유학파가 아니야."

"… 과찬이십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성재민 본부장.

그런 그를 한민준 부사장이 미소 띤 얼굴로 응시했다.

하지만 한민준 부사장의 응시는 1분 가까이 지속되었고. 웃는 얼굴로 계속 바라보는 한 부사장의 얼굴은 왠지 모를 광기까지 느껴졌다.

분위기가 변했음을 눈치챈 성재민 본부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근데 말이야.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투자도 우리 대한화학에서 하네?"

"… 그렇습니다."

"은행 움직이는 것도 우리가 하고?"

"그, 그렇습니다."

"그러면 씨발 너 새끼는 하는 게 뭔데!"

와장창!

한 부사장이 집어던진 술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쳐 박살 났다.

파편이 튄 건지 성재민 본부장의 볼에 생채기가 생겼다.

하지만 이를 느낄 새도 없이 성재민은 바닥에 넙쭉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하- 니가 애초에 일을 잘했으면 쌩돈 들어갈 일이 없잖아? 안 그래? 니가 애초에! 기술만 잘 빼왔으면 될 일 아니냐고!"

"… 죄송합니다. 제가 최대한 아버지를 설득해서 계약서에 싸인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임원들도 설득하고…."

"그건 당연한 거고. 씨발 유학파는 무슨, 병신 같은 새끼."

"……."

"왜 대답이 없어. 꼬와요? 꼬우면 나처럼 잘 태어나든가."

"… 죄송합니다."

치욕적인 언사지만 성재민이 할 수 있는 건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앵무새 같은 그 모습을 보던 한민준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알겠어요. 고개 들어요."

"그럼 계획은 어떻게…?"

"어떻게긴. 100%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선책이 없으니 별 수 있나. 해야지. 방금 말한 플랜B로 한번 해봅시다. 내가 지원은 해줄게."

"… 알겠습니다."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어. 이번 실수는 잊어요. 만약 이번 일 잘하잖아? 내 앞으로 우리 성재민 씨는 평생 같이 갑니다."

"… 실패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냐아냐 실패하면 또 어때.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한민준 부사장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흔들었다.

하지만 성재민은 한민준처럼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시야가 좁아지며 숨이 턱 막혀왔다.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신은 스스로 회사를 한민준의 아가리에 갖다 바쳐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듯한 막막함이 그를 옥죄었다.

* * *

성운이노베이션 CS팀.

주로 B2B 서비스를 하는 기업답게 CS 즉, 일반 고객 클레임은 거의 없어서 꿀보직 중의 꿀보직이라고 알려진 팀이었다.

오늘도 클레임 전화 거의 없이 한가하게 시간을 때우는 CS팀원들은 주로 회사의 이슈들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댔는데, 당연히 최근 가장 이슈인 산업스파이 사건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다.

"전산팀장님 보직해임된 거 알지?"

"네. 너무 불쌍하셔요.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내 말이. 근데 해고는 안 당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정말요? 그럼 다른 곳으로 발령가시는 건가. 기흥 공장 쪽?"

"근데 전산팀에서 편하게 일하시던 분이 적응은 하시려나 모르겠네. 전산팀도 관리만 하고 엄청 꿀이잖아요."

"맞아맞아. 참 안 됐지. 대신 이정우 씨 있잖아. 이번에 산업스파이 잡아가지고 보너스 받고 장난 아니더라. 내년에 승진할지도 모른대."

"승진이요? 벌써요?"

"이정우 선임 30대 초반 아닌가요? 안 그래 예슬 씨?"

여자직원들의 대화의 화살이 잠자코 듣고 있던 안예슬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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