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금수저였어요? >
당연하게도 탁 팀장은 정우의 부탁을 거절했다.
"… 안 된다니까요 거참.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임원급도 아니고 내가 왜 일개 개발팀 직원을 사장님한테 소개해줘야 하는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공장을 인수할 겁니다."
급한 마음에 이실직고했지만 탁세훈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좀 그럴듯한 핑계를 대던가요. 자꾸 장난하는 것 같잖습니까."
"진짜입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주세요. 아니, 사장님 번호만 알려주십쇼.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끈질기게 부탁하자 결국 탁세훈 팀장이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좋아요. 데려가 줄게요. 어차피 나도 고객관리 차원에서 그 양반 얼굴 봐둬서 나쁠 건 없으니."
"정말요?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가서 공장 인수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하지 말 것."
"간단하네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공장까지만 안내해주면 그 뒤로는 정우가 설득하면 되기에 그러하겠다고 답했다.
"… 그리고 기름값이랑 밥값, 술은 정우 씨가 사요."
"하하하, 그건 당연하죠. 몇 번이고 내겠습니다."
겨우겨우 탁 팀장을 설득한 정우는 다음날 그와 함께 공장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평일이라 연차를 써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탁 팀장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
<영업2팀 파견 요청>
-차출인원: 개발팀 이정우 선임
-사유: 소프트웨어개발 이론 및 지식 자문
-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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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세훈 팀장이 센스 있게 개발팀에 협조 요청 공문을 넣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연차를 안 쓰고도 업무시간에 지방 출장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공장을 구하는 이번 일만 잘 풀리면 곧 퇴사할 생각이라 연차는 의미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
.
.
경북 포항시 동해면에 위치한 해공그래파인 공장은 포항시에서 상당히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공장 외관을 본 정우는 할 말을 잃었다.
"… 생각보다 작네요?"
"그럼 겨우 30억짜리가 얼마나 크겠어요? 들어갑시다."
컨테이너인지 무슨 재질인지 모를 자재로 이루어진 공장 건물로 들어갔다.
작아 보였던 겉모습과 달리 안은 꽤 넓었는데, 연필의 재료인 원목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고 각종 설비들도 조리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가동을 꽤나 오랫동안 안 했는지 각종 원자재와 설비들에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그때 인기척을 들었는지 공장 한쪽 쪽방인지 사무실인지 모를 방에서 한 중년 남성이 나왔다.
"누구쇼?"
"아이고- 공 사장님, 접니다! 성운이노베이션 탁 팀장이요!"
"아, 탁 팀장!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왔어요?"
공 사장이라 불린 인물이 탁세훈 팀장과 악수를 하며 반가워했다.
탁세훈도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 제가 뭔 일이 있어야지만 옵니까. 아참, 여기는 저희 회사 개발팀 소속인 이정우 선임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우입니다."
"아, 예."
공 사장은 정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탁세훈에게 입을 열었다.
"탁 팀장, 혹시 그때 제안했던 인수 건 아직 유효해요?"
"아 그게 아니라 그냥 공 사장님 얼굴 보러 온 거예요. 비즈니스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친구가 하도 사장님 뵙고 싶다고 해서."
"이 분이요?"
탁세훈의 말에 공 사장이 정우를 다시 쳐다보았다.
"개발팀 직원이라며? 개발팀 직원이 왜 날 찾으슈?"
"사실 제가 여기 공장을 인수하고 싶어서요."
정우는 진심을 담아 진지하게 얘기했지만 전혀 못 믿는 눈치였다.
공 사장이 껄껄 웃어댔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 탁 팀장 동료분이 참 재밌는 분이구만? 하하하."
"농담 아니…."
"아무튼 그러지 말고 탁 팀장,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면서 사업 얘기 좀 합시다."
공 사장이 정우를 무시한 채 탁 팀장을 설득했다.
탁세훈이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공 사장님! 저희는 인수 생각 없다니까요."
"아 글쎄 그건 들어가서 얘기해보자고. 자자, 들어갑시다."
억지로 두 사람을 사무실로 안내한 공 사장은 한쪽에서 믹스커피를 타와 내놨다.
뜨끈한 믹스커피는 언제 먹어도 달달하다.
한 모금 하는데 공 사장이 입을 열었다.
"탁 팀장, 여기 갑자기 온 걸 보면 내 상황은 다 이해합니다. 인수 제안 다시 하러 온 것 맞지요? 그게 아니면 탁 팀장이 평일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올 이유가 없지. 하물며 직원까지 데리고."
"인수 제안 아니라니까…."
탁 팀장이 말하려던 그때 정우가 나섰다.
"탁 팀장님, 저 농담 아닙니다. 저 진지하게 여기 인수할 생각 있습니다."
"… 정말로요?"
"예."
진지함에 진심이 전해진 걸까.
한동안 정우의 눈을 보던 탁세훈 팀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인수 협상 진행해봅시다."
"아이고- 탁 팀장. 잘 생각했어요!"
눈치를 보던 공 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얼마에 인수하실 생각이신지…? 그때 제가 제안 드린 30억인가요?"
"그게…."
"잠깐만요."
정우가 나서서 답하려 할 때, 탁 팀장이 나섰다. 왜 막아서는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슬쩍 윙크하는 그의 눈짓이 보였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잠자코 있으라는 무언의 의사가 전해졌다.
정우도 괜히 인수 의사를 밝히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탁세훈이 진지한 얼굴로 공 사장에게 입을 열었다.
"공 사장님, 그때와 똑같은 가격이라면 제안은 없던 걸로 할 겁니다."
"흠… 이해해요. 솔직히 그땐 내가 너무 고집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비즈니스에서 미안할 것 있겠습니까. 자, 그럼 얼마 생각하고 계십니까?"
"25억. 25억이 내 마지노선입니다."
"25억…."
30억에서 무려 5억이나 훅 떨어졌다.
아마도 해공그래파인 공 사장은 공장 매각에 실패한 이후 굉장히 후회를 한 모양이었다.
뿌연 먼지가 덮인 공장 상황을 보아하니 매출은 거의 안 나오는데 마지막 탈출 기회를 놓쳤으니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런데 자포자기하던 그때에 한줄기 동아줄마냥 탁세훈 팀장이 나타났으니 바짓가랑이라도 안 잡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25억이면 진짜 괜찮은데?'
정우는 공 사장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공장이 좀 작기는 하지만, 생산설비를 들여놓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는데 고작 25억 원에 인수가능하면 괜찮은 조건처럼 여겨졌으니까.
하지만 탁세훈 팀장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20억 원이 아니면 인수는 어려울 것 같네요. 기존 설비 폐기 비용, 폐업처리 비용 등등 따지면 손해라서요."
"음…."
20억이라니. 너무 후려치는 거 아닌가?
정우가 걱정이 되어서 끼어들려 했던 그때였다.
"… 좋습니다. 내 양보하지요. 20억… 20억원에 매각하겠습니다."
놀랍게도 공 사장은 탁세훈 팀장의 말도 안 되는 후려치기를 받아들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우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 사장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상폐 직전의 공포… 인가.'
회귀 전에 주식을 하면서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도 내가 산 주식을 사주지 않는 상황.
본전은커녕 100원짜리 하나라도 건지려고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주식을 내던지는 그 심정을.
보유한 주식이 완전히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른다는 패닉은 이성을 잃고 가진 주식을 모두 헐값에 내던지게 만든다.
지금 공 사장의 입장이 바로 이런 패닉셀Panic Selling 상황과 비슷했다. 자신이 가진 흑연가공공장을 한 푼도 못 받고 폐업하게 될까 봐 후려치기임을 알아도 매각하려는 것이다. 단돈 20억원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물론 20억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정우 입장에서는 완전 헐값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된 거죠? 얼른 계약서 쓰시죠."
공 사장이 재촉했다.
거기까지 상황이 전개되자 탁세훈 팀장도 좀 당황한 눈치였다.
"음… 잠시만요. 의논을 좀 해야 할 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편히들 얘기 나누십쇼."
"정우 씨, 잠깐 나 좀 볼까요?"
탁세훈 팀장이 정우를 데리고 공장 밖으로 나섰다.
"담배 펴요?"
"아니요."
"한 대 필게요."
담뱃불을 붙인 탁세훈 팀장이 한숨인지 모를 연기를 크게 내뱉었다.
"후우- 나도 모르게 직업병이 발동해서 가격을 후려치긴 했는데, 이거 사고 쳐버렸네. 이제 수습 어쩔 거예요? 진짜로 공장 인수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인수할 건데요?"
"농담하지 말고요. 제 생각에는 본사에서 지침이 바뀌어서 계약 못하게 되었다고 말 맞추면 될 것 같은데… 아씨.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지. 뭔가에 홀린 것 같네."
짜증난다는 듯 노려보는 탁세훈을 보며 정우가 웃었다.
"인수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아니 정우 씨, 20억이 장난도 아니고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어어 정우 씨? 정우 씨 어디 가요!"
그를 부르는 탁 팀장을 뒤로 하고 공장으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공 사장이 그를 반겼다.
"계약서 쓰실 거죠?"
"네."
"탁 팀장은요? 주인공이 와야 계약서를 쓰지."
"곧 오실 겁니다. 들어가시죠."
사무실로 들어간 두 사람. 뒤늦게 탁 팀장이 뛰어들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공 사장을 보며 얼버무렸다.
"하하 공 사장님.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는데 이 친구가 뭘 몰라서…. 뭐해요? 의논 좀 더 하자니까."
"탁 팀장님."
그런 그를 정우가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정우 씨 20억이…."
"보여드리죠."
정우가 스마트폰으로 뱅킹앱을 실행하더니 계좌 잔액을 탁세훈에게 들이밀었다.
[총예금 잔액: 10,210,489,347원]
거기엔 오늘 공장 인수에 대비하여 미리 출금해둔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표시된 11자리 영롱한 숫자를 본 탁세훈이 입을 떡 벌렸다.
"… 지금 농담하는 거죠? 일, 십, 백, 천, 만…… 100억?"
"농담 아닙니다."
"이게 무슨…?"
일개 직원이 100억원을 가지고 있다고?
탁세훈 팀장은 무언가 괴리감을 느끼는 듯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어버버했다.
겨우 그를 조용히 시킨 정우는 그제야 공 사장과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계약금은 10%인 2억원으로 하지요."
"좋습니다. 근데 탁 팀장이 아니라 왜 이분이…?"
공 사장이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는 듯 의아해했다.
"계약은 제가 진행하니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예예. 알겠습니다."
정우는 미리 준비한 공장 매매에 관한 표준계약서를 공 사장에게 내밀었다.
"계약서 훑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근데 제가 법인 설립을 할 거라서 계약은 법인 설립이 마무리된 이후에 법인 명의 계좌로 계약금과 잔액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음? 성운이노베이션이 인수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설명이 미흡했네요. 제가 인수하는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제 보니 사장님이셨군요. 근데 아까는 왜 개발팀 직원이라고…?"
"지금은 직원 맞아요. 성운이노베이션 개발팀에서 일하거든요."
"예?"
직원이 공장을 인수한다니 공 사장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럼 돈은 어디서 나셔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제가 공장을 인수할 충분한 자금이 있고, 사장님의 공장을 인수할 거라는 거죠. 사장님은 매각하기를 원하시구요. 혹시 계약당사자가 성운이노베이션이 아니라서 안 파실 건 아니죠?"
"아뇨아뇨. 무조건 팝니다. 팔아요."
"좋습니다. 그리고 폐업 비용이 드실 테니 기존 설비는 두고 가셔도 됩니다. 팔 수 있으면 파셔도 되고요."
"예예."
"퇴거는 계약 이후 일주일 이내로 비워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 사장이 무조건 오케이한 덕분에 계약서 작성은 수월하게 끝났다.
"서울 가서 계약서 이상 없는지 확인하고, 법인 설립이 마무리되면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때 계약 마무리하시죠."
"알겠습니다. 편히 가십시오 사장님!"
사장이라.
맨날 이 선임이라고 불렸던 자신이 사장이란 소리를 듣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기분이 묘한 건 탁세훈 팀장도 마찬가지였나보다.
"… 이정우 씨, 금수저였어요?"
구두 계약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길, 탁 팀장이 차 안에서 물었다.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아요? 투자라도 했던 거예요?"
"예. 투자로 돈 좀 만졌습니다."
"와… 난 전혀 상상도 못했네. 정우 씨가 공장 인수한다길래 장난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게 아니면 제가 영업팀장님께 굳이 부탁을 드리지 않았겠죠. 말을 걸지도 않았을 거구요."
"하긴… 개발팀 직원이 말 걸길래 이상하다 싶었어. 그런데 이거 회사에서도 알아요?"
"뭐가요?"
"정우 씨 부자인 거요."
"전혀요. 말한 적 없거든요."
"아… 하긴 정우 씨가 부자인 거 알았으면 이혼하지도 않았겠네."
아마도 탁세훈도 정우의 이혼 소문을 들었나 보다.
"아셨군요."
"워낙 여기저기서 떠들어서요. 그런데 그 여자는 왜 이혼했대요? 정우 씨 돈도 많고 잘생겼는데."
"잘생기긴요. 그리고 그때는 돈 없었어요. 이혼하고 번 겁니다."
"그럼 이혼하고 고작 몇 달만에 100억원을 번 거예요? 와… 이제 보니 투자의 신이셨네."
"투자의 신이라뇨. 워렌버핏이 들으면 코웃음 칠 겁니다."
민망해서 얼버무리긴 했지만, 고작 100억이 아니라 2,000억원 넘게 벌었다는 걸 알면 탁세훈 팀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오늘 감사했습니다. 서울 가면 제가 술 거하게 사겠습니다."
"… 두 번 사요. 아주 뽕을 뽑아야지."
"하하하 겨우 두 번으로 되겠습니까? 세 번, 네 번도 사겠습니다."
"후회하지 마세요. 나 비싼 술집 많이 알아요?"
"하하하 가보고 싶네요. 얼마나 비싼지."
이후 두 사람은 서울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셨다.
영업을 많이 했던 양반답게 신기하고 분위기 좋은 술집들을 많이 알았는데,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위치한 칵테일 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바텐더의 화려한 칵테일 쇼는 눈을 즐겁게 했고, 각각의 칵테일의 이름과 컨셉, 그에 얽힌 스토리는 귀를 즐겁게 했으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독특한 맛의 칵테일은 입을 즐겁게 했다.
한잔에 최소 3~4만원, 비싼 위스키는 10만원이 우습게 나갔지만 이런 상류층 문화를 처음 접해보는 정우에게 있어서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 * *
인수할 공장을 구했으니 법인 설립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정우는 곧장 회계사를 끼고 법인설립을 진행하려 했는데 최고의 실력자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딱히 이쪽에 아는 인맥은 없었기에 아무나와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때 탁세훈 팀장이 나섰다.
"아무리 회계사가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지만 중요하게 봐야 될 건 있어요."
"그게 뭐죠?"
"바로 경력입니다. 회계쪽에서는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가 실력이거든. 그래야 예상치 못한 경우에도 얼 타지 않고 잘 대응하는 법이라서요."
"그렇군요. 혹시 추천해주실 분이 있으신가요?"
"있죠. 내가 알기로는 그분이 제일 잘할 거예요."
탁세훈이 추천한 그분은 대형 회계법인 서일의 서동만 회계사였다. 파트너급 회계사로서 나이가 꽤 든 인물이었는데 인자한 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굉장히 깐깐했다.
"법인정관 서류가 미비합니다. 자본금 10억 이상은 공증이 필요해요. 확인해서 공증서류 추가 부탁드립니다."
"공증이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요?"
"나중에 국세청에서 감사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집니다. 문제 안 생기게 하려면 지금 제대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운이노베이션에서 재직 중이시군요. 겸직 금지 조항은 없습니까?"
"예. 따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있어도 크게 상관없기는 합니다. 회사 내에서 자체내규로 내리는 징계만 맞을 뿐인데, 법인을 설립하시려는 사장님께서 그 정도의 사소한 징계를 두려워하실 것 같지는 않군요."
"뭐… 그렇죠?"
그는 정우가 모르는 부분들까지 하나하나 알려주며 법인 설립 진행을 도왔다.
덕분에 잘 모르고 어려웠던 법인 설립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세워진 정우의 회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네뷸라 코퍼레이션>
성운을 뜻하는 영단어인 네뷸라Nebula를 회사명으로 정했는데, 네뷸라로 정한 데는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성운이노베이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신이 다니는 지금의 회사를 뛰어넘기를 바라는 마음과, 네뷸라라는 단어가 멋있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네뷸라 코퍼레이션이라 붙인 것.
회사명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내 회사가 생겼네.'
회귀한 지 3개월여 만에 나만의 회사를 설립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우는 곧장 포항으로 내려가 공장 인수 계약 건을 마무리 지었다.
"입금했습니다. 계좌 확인해보세요."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장 때문에 꽤나 심려가 컸었는지 공장 매각이 끝나자마자 공 사장은 매우 기뻐했다.
그런 그에게 정우가 하나의 제안을 했다.
"앞으로 뭐하실 겁니까?"
"이제 노후자금도 마련되었으니 일은 안 하고 쉴 겁니다."
"아이들은 다 컸나봐요?"
정우의 말에 공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애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혼자입니다."
"… 아."
"저희 아버지 때부터 2대째 운영해오던 건데, 요 공장이 뭐라고 결혼도 못하고 인생을 바쳤네요. 하하하…."
자조 어린 웃음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럽다.
정우는 하나의 제안을 했다.
"이해합니다. 공 사장님이 지금 굉장히 허무하실 거라는 걸요. 평생 바쳐왔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죠. 돈은 들어왔지만 뭔가 마음이 허합니다."
"하지만 공 사장님. 이 공장의 역사는 끝난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록 흑연가공은 중단되겠지만 이 공장을 아예 없앨 생각은 아니거든요. 앞으로 이 공장은 흑연가공 대신 저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겁니다."
"새로운 역사라…."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앞으로 계획이 따로 없으시다면 저희 공장 좀 맡아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에게 공장 관리를 제안한 이유는 간단했다.
20년이 넘도록 하나의 공장을 운영해온 경험. 비록 연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공장을 내놓기는 했지만, 하나의 공장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운영해온 경험은 무시하지 못한다. 심지어 IMF도 견뎌낸 사람이니 오죽하랴.
그 경험을 높게 사서 영입을 제안한 것이다.
"여기를요?"
"예. 그냥 관리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음… 보수는요?"
"그동안의 경력이 있으시니 제가 다니는 성운이노베이션 부장급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부장급… 좋습니다! 놀면 뭐합니까, 돈 벌어야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은퇴를 생각했었던 공 사장은 정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미 망해가던 공장이라 따로 내보낼 직원은 없었고, 그렇게 정우의 첫 회사의 첫 번째 직원은 공춘수 사장, 아니 공춘수 공장장이 되었다.
정우가 그에게 제일 먼저 맡긴 일은 간단했다.
"흑연가공설비를 제외하고 모두 치워버리세요. 고물상에 매각하든 폐기하든 없애시면 됩니다."
"네? 여기 이 많은 설비들을 전부 다요?"
"예."
정우의 지시에 공춘수가 경악하며 만류했다.
"아이고 대표님, 뭘 모르시나 본데 이 설비들 중에 하나라도 팔면 공장 멈춰요! 그런데 전부 팔다니… 도대체 어떤 사업을 하실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사업안이 나오기도 전에 멀쩡히 돌아가는 공장을 뜯어고치는 건 신중하셔야 합니다!"
"괜찮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흑연을 단순히 가공하는 사업은 안 할 거니까요."
"그럼…?"
"그래핀을 만들 거예요."
"그래핀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