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 … 이게 아닌데 >
"… 계약을 파기하자고?! 그게 무슨 소리야!"
공장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성태규 대표의 목소리.
그의 얼굴은 이미 당혹과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데 계약을 파기한다고?
영문을 몰라서 정우가 물었다.
"성 대표님, 계약을 파기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대한화학이… 대한화학이…!"
"예?"
대한화학이 뭐?
정우가 당황할 때 말을 잇지 못하던 성태규 대표가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 이 대표, 계약 논의 중에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편히 일 보고 오십시오."
"배려 고마워요. 계약 건은 조만간 연락드리지요. 그럼 이만."
성태규 대표와 실무진이 서둘러 공장을 빠져나갔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 * *
대한화학 측에서 계약을 파기한다는 소식에 성태규 대표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회사는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 막아보려 했는데…!"
"알겠으니까, 당장 모든 임원 다 소집시켜!"
모든 임원 및 팀장급 이상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긴급회의가 시작되었다.
"대한화학 측에서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자는 이유가 뭐야?"
"모르겠습니다. 공장라인 확장이라는 내부 프로젝트가 무산되어 진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게 표면상의 이유인데… 애매합니다."
"이런… 아무튼 파기한다니 어쩔 수 없고, 위약금은 얼마야? 계약 파기시 위약금 조건 알아봤어?"
"그게… 40억 정도입니다."
"아니… 2,000억짜리 계약인데 위약금이 고작 40억이라고? 그게 말이 돼? 어!"
성 대표가 소리쳤다.
임원 중 한 명이 쩔쩔매며 답했다.
"그것이… 위약금 조항을 작성할 때 계약금의 2배로 잡았는데… 계약금이 20억이었습니다."
"… 20억? 겨우 20억이었다고? 10%인 200억도 아니고 20억? 계약금이 1%인 게 그게 말이 돼!"
"…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임원. 하지만 이제 와서 부하직원 탓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계약할 때 세부적인 걸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성 대표의 잘못도 있는 것이다.
연구에 바빠서 본부장이 올린 결재서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성태규 대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으며 옆에 있던 성재민 본부장을 노려보았다.
"본부장! 계약금 왜 보고 안 했어!"
"2,000억짜리 계약이 진행이 되어서 매출이 발생하면 어차피 계약금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 끄응… 알겠으니 그건 있다가 얘기하고, 그보다 그동안 대한화학쪽에 잔금 얼마나 받았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차마 임원들 앞에서 아들을 욕할 수 없었던 성 대표는 임원들에게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모두의 안색은 이미 어두웠다.
"… 10억원입니다."
"10억? 2,000억짜리 계약인데 아직 10억밖에 안 들어왔다고?"
"… 예."
"지금 장난해! 잔금도 못 받고 뭐한 거야! 그럼 은행 쪽은 얼마나 대출받았어? 얼마 전에 대출 심사 승인 났다며?"
"… 승인 나서 650억원 입금받았습니다."
"650억… 하… 어쩌자고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린 거야!"
650억원이나 대출을 받았다니.
성태규 대표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대출금을 그대로 되갚으면 문제 없으니까.
"아무튼 그건 됐고, 대출금 그거 얼마나 남았는지나 말해. 그거라도 은행에 빨리 갚아야 할 거 아니야!"
"… 없습니다."
"뭐라고? 농담하는 거지?"
성 대표는 진심으로 놀랐다. 650억원 고작 몇 달 지났다고 없어질 수가 있나? 그저 본부장이 농담하는 거라 여겼다.
그러나 이어진 성재민 본부장의 대답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없습니다. 모두 공장 부지 확보 및 설비 자재 대금으로 치러서 사용했습니다. 남은 대출금과 사내유보금을 합쳐도 10억도 채 안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몇 달도 안 되었는데 그걸 다 썼다고? 그게 말이 돼! 무슨 일처리를 그따구로 하는 거야!"
"선입금 조건으로 러시아쪽에서 원자재를 싸게 매입하려 했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성재민 본부장은 뻔뻔하게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성태규 대표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유학까지 다녀와 경영자 수업을 받은 아들이다. 대출금도 그렇고 자금 유동성을 위해 사내유보금을 회사에 어느정도 남겨놓는 게 상식인데 그걸 안 해놓았다고?
그제야 이 모든 사건에 성재민이 얽혀 있음을 깨달았다.
대한화학과의 계약을 추진한 것도, 대출을 밀어붙인 것도, 위약금 항목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으로 잡아놓은 것도, 모두 성재민이 손을 댄 결과물이었으니까.
성태규 대표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다 나가고 본부장만 남아."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우르르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두 사람.
성 대표가 본부장을 노려보았다.
"본부장… 니가 벌인 짓이냐?"
최근 연구에 집중한다고 경영에 무관심하긴 했지만 성태규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공장을 지금의 성운이노베이션으로 키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손으로 이루어낸 업적.
그 힘든 IMF도 이겨낸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 바로 성태규 대표였던 것이다.
그를 지금까지 대표로서 살아남게 한 그 예리한 촉이 말한다.
이번 사단의 원흉은 자신의 아들, 성재민 본부장의 짓이라고.
그리고 아들은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 맞습니다."
"뭐?"
"제가 한 것 맞습니다."
그동안 죄송스럽고 걱정 어린 표정을 짓던 성재민의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아들의 자백에 성 대표는 아직도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본부장, 아니 재민이 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 지금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성태규 대표가 대표실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예. 아주 잘 압니다. 성운이노베이션을 팔기 좋게 아주 예쁘게 포장을 잘했죠. 그것도 제 손으로요."
"이 미친놈이…! 너 진짜 내 아들 재민이가 맞냐! 어떻게 우리 회사를 팔아넘길 작정을 할 수 있냐고!"
성 대표의 고성에 성재민 본부장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원래는 저도 회사까지 넘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기술만 넘기려고 했어요."
"기술이라고? 설마… 재민이 니가?"
"예. MG음극재 기술 유출 사태. 양규철에게 지시했던 게 접니다."
"… 이런 미친놈이! 너 제정신이야!"
성 대표가 경악했다. 그는 진심으로 MG음극재 산업스파이 사태에 아들이 엮여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어요. 그저 아버지가 그토록 매달리는 MG음극재 기술이 유출되면, 아버지의 연구 목표가 사라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게 전부예요. 기술을 잃어버리게 되면 아버지 의지도 꺾이게 될 테고 배터리사업부를 축소하거나 포기하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설마… 내가 지난번에 배터리사업부 축소 방안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 때문에…?"
성 대표는 일전에 아들이 적자만 키우는 배터리사업부를 축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을 떠올렸다.
배터리사업을 접을 생각이 없었기에 당연히 반대했던 일도.
그런데 그 사소한 갈등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얘기 나온 김에 제대로 털어보죠. 저희 회사가 매출이 작년에 얼마 나온 줄 아십니까? 500억입니다. 매출이 자그마치 500억이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업이익이 얼마인 줄 아세요? 마이너스 40억입니다. 적자가 40억이라구요. 심지어 올해는 상반기밖에 안 지났는데 적자가 150억입니다. 해가 갈수록 빚만 늘어나고 있다구요!"
"배터리 사업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그만큼 연구에 투자하고 10년, 20년 인내해야만 그 값진 과실을 얻을 수 있는 법이라고! 그리고 대한화학은 어떤데? 대한화학도 적자구조지만 버티고 있지 않냐! 걔들이 바보라서 배터리연구에 수백 수천억씩 쏟아붓고 있는 줄 알아!"
"말 참 잘하셨습니다. 맞아요. 우린 대한화학이 아니에요. 배터리 연구에 돈 때려 박아서 적자가 나도 다른 계열사에서 벌어서 메꿔줘서 버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구요! 적자폭이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늘어나는데 상식적으로 이게 맞다고 보십니까? 매출이 잘 나오면 뭐 합니까. 대표라는 양반이 연구에 미쳐가지고 버는 족족 되지도 않는 배터리 연구다 뭐다 다 꼬라박는데. 이거 완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입니다!"
"그 배터리 기술이 대단하니까 대한화학에서도 우리 회사를 욕심내는 거다! 이 멍청한 놈아!"
"압니다."
"안다고? 아는 놈이…!"
"대기업 수준의 규모의 경제 없이는 실용화는 어림도 없는 허상이라는 것도 알고요."
"……."
"그래서 대체 언제쯤 수익화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아버지는 되지도 않는 꿈을 붙들고 회사와 함께 가라앉고 계신 거예요!"
모든 걸 알게 된 성 대표는 답답해졌다.
아들은 배터리사업이 전혀 비전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말마따나 배터리사업부에 돈만 쏟아부었을 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저도 회사에 애정이 없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살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돈만 잡아먹는 하마인 배터리사업부만 축소하면! 주력업종인 설비제조에 힘을 실으면 적자를 줄이고 흑자로 전환해서 건실한 기업으로 만들 생각했다구요."
"이놈아! 직원은 가족이야! 잠깐 적자가 난다고 직원들을 감축하는 게 말이 돼!"
"가족이요? 가족을 위해서라면 수십억씩 적자를 감수하면서 월급을 줘도 감당해야 합니까?"
"그 사람들이 회사의 자산이 되고 미래가 되는 게다!"
고용유연화를 통한 경영효율성을 미덕이자 진리로 삼는 미국의 경영을 배워온 성재민과 인간 위주의 인화(仁和) 경영을 추구하는 성 대표.
그 두 사람의 생각이 충돌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던 성 대표가 푸들푸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미친놈이…! 기술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우리 회사 가치가 얼만데 니 할아버지 때부터 일군 우리 회사를 남의 손에 팔아넘기겠다는 거냐!"
"......"
"얼마야! 대한에서 얼말 준다고 하기에 회사를 네 손으로 포장해서 넘겨?"
"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는 성재민.
애당초 악마와 손을 잡은 순간, 그 말로(末路)가 깔끔하리라고 기대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성재민은 자신을 치밀하게 엮어 놓은 기소장을 보았다.
한민준 부사장은 법정 최고형을 자신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최고형 징역 10년.
강산이 변할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어찌저찌 그 시간을 채우고, 혹은 그보다 일찍 감옥에서 나온다고 해도, 이 한국에서 얼굴 들고 다니긴 힘들 터였다.
회사일을 다시 이어가는 건 더욱이 어림도 없을 터다.
그럴 바에는 회사를 넘기고 그 돈으로 두 번째 인생을 살고자 했다.
그뿐이었다.
"… 그러면 당장 해결책을… 해결책을 찾아와!"
"… 이미 늦었습니다."
성태규 대표가 눈이 시뻘게져서 소리치던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보고했다.
"… 대표님! 방금 은행에서 대출금 회수 진행하겠다고 전화가 와서… 한번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설상가상 사내유보금이 없는데 은행에서 대출금 회수가 들어왔다.
당장 650억원이라는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성태규 대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평생을 일군 회사가 당장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그런데 이 모든 원흉이 자신의 아들이 벌인 짓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분노가 극에 달한 성태규 대표가 성재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 너… 이놈 자식…!"
"아, 아버지!"
"너… 이놈… 자식이… 이놈… 이… 억!"
아들의 멱살을 부여잡던 성 대표. 하지만 갑자기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통나무처럼 뻣뻣해져서 쿵 쓰러지는 성태규 대표.
그런 아버지를 보고 성재민 본부장은 당황했다.
"… 아버지?"
"……."
"… 아버지? 아버지!"
뒤늦게 쓰러진 성태규 대표에게 달려간 성재민.
그의 얼굴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 * *
119를 불러 긴급히 성태규 대표를 응급실로 이송했다.
"심근경색입니다. 긴급히 수술이 필요해서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
"… 예."
수술 동의를 마치고 수술실에 들어간 아버지를 보며 성재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저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배터리사업은 비전이 없다고, 내 생각이 옳았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수술실 앞에 앉아 있을 때였다.
[한민준 부사장]
모든 문제의 시작점으로부터 온 연락에 성재민의 손이 떨려왔다.
"… 예, 부사장님."
-곧 은행에서 대출금 회수 들어갈 거야.
"… 이미 들어왔습니다."
-아, 이미 들어갔나? 아무튼 그거 말해주려고 전화했지. 아참, 본부장. 성 대표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자기가 한 거 모르나?
"… 알았습니다."
-이야, 자기 아들이 회사 팔아넘긴 걸 알았다고? 그 양반도 그래도 눈치는 있네. 성 대표가 뭐래?
"… 지금 응급실입니다."
-응급실이라고? 하이고- 충격이 크셨나 보네. 안 됐네 안 됐어.
"……."
-본부장, 아버지 일은 안타까워. 그런데 어쩔 수 있나.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그래도 매국노에 산업스파이로 낙인 찍히고 깜방살이하는 것보다는 패륜아가 낫잖아? 다시 한국에 발 못 붙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아무튼 계좌는 확인했지? 버진 아일랜드였나? 그거 꼭 직접 출금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거래 즐거웠어.
낄낄 웃어대는 한민준 부사장의 목소리가 성재민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울렸다.
* * *
성재민과의 통화를 마치고.
한민준 부사장은 연이어 통화를 걸었다.
"예, 아버지. 접니다."
놀랍게도 그가 통화한 인물은 대한그룹이라는 거산의 주인, 한광표 회장이었다.
"그 버진 아일랜드에 미국법인 쪽 역외탈세 문제로 묶인 계좌 있지 않습니까. 5천만 달러인가 들어 있는. 그거 해결했습니다. 고맙게도 총대 매줄 사람이 생겼지 뭡니까."
반대쪽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는지,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미간을 한껏 좁힌 한민준이 다시금 말했다.
"아 예, 알지요. 그 계좌 건드리기만 해도 미국 법원에서 세기 단위로 징역 때린다면서요? 그런 걸 누가 욕심냅니까? 병신들이나 건드리지. 저 병신 아닙니다. 예예,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회장과의 통화를 마친 한민준 부사장.
"노친네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기력도 겁나 좋아."
그가 통화 기록에 남은 성재민의 이름을 바라보고는 히죽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재민아, 나는 약속 지켰다~"
성재민은 약속대로 한국 검찰에 기소되지도 않고, 5,000만 달러라는 거액도 얻게 될 것이었다.
한민준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 *
성운과의 협상 진행은 모두 스톱되었고, 그 탓에 갑자기 일이 붕 떠서 정우도 포항 공장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사무실에서 주로 단타를 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급하게 올라간 성태규 대표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었는데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한화학과 계약이 파기되었답니다."
아직 성운 쪽에 인맥이 있는 건지 탁세훈 팀장이 소식을 전해왔다.
"저도 그때 공장에서 얘기하는 거 듣긴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 파기가 굉장히 심각한 안건인가 봅니다?"
"그게 이번에 대한화학 납품건 맞추려고 성운에서 무리하게 공장을 확장하려고 했었나봐요. 그래서 은행 쪽에 수백억을 대출을 받았는데, 계약이 파기되면서 그게 다 공중분해되게 생겼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부도 얘기도 나오고 있대요."
"부도요?"
부도라는 말에 정우는 회귀하기 전 미래가 떠올랐다.
양규철 산업스파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쓰러진 성 대표.
이후 머리가 없어진 성운이노베이션은 그 충격으로 흔들렸고, 그해 매출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았으며 적자가 너무 커져 부도 위기에 직면했었다.
그러다 구세주처럼 등장한 대한화학에 의해 인수되었던 것.
이런 미래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에도 대한화학이 성운이노베이션에 무슨 양념을 쳐놓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 것이다.
"이런… 불길하더니만 역시 그때 말려야 했었나 보네요."
"예? 대표님은 이렇게 될지 이미 아셨던 것 같습니다?"
탁세훈의 예리한 질문에 정우는 아는 것들을 이용해 변명했다.
"음… 뭐, 정확히 안 건 아니에요. 그냥 어렴풋이 대한화학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만 알았죠. 아시죠? 제가 산업스파이 잡은 거."
"네, 엄청 유명한 사건 아닙니까. 포상도 받으셨잖아요."
"예. 그때 제가 양규철이 대한화학쪽 라인이라는 정보를 어디서 들었거든요. 그래서 지난번에 회사에 대한화학 협상단이 찾아왔을 때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아서 대표실로 찾아갔었습니다. 위험하다고 경고해주려고요."
"성 대표를요? 그럼 성 대표는 알고도 당한 겁니까?"
"아뇨. 비서가 못 들어가게 막던데요. 대표님 바쁘시다고."
"… 아."
탁세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사태 왠지 김 비서 하드캐리 같은데요?"
"그건 아니죠. 일개 직원이 대표를 아무 때나 만나는 것도 사실 웃기잖아요. 대표실 김 비서 그분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듣고 보니 아쉽습니다. 미리 예방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정우도 조금은 안타까웠다.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성운이노베이션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역사는 바뀌지 않았고, 성운이노베이션은 또 다시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이대로 성운이노베이션은 무너지고 말 것인가.
정우가 생각에 잠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독보적인 전고체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성운이노베이션이 코스닥에 상장되었습니다. 대전기차시대 2차전지 관련 최대수혜주로 불리는 성운이노베이션의 시총은 현재 8,000억원으로….]
[대한화학 설비제조 전문 계열사 성운이노베이션이 시총 1조원을 달성하였습니다. 성운이노베이션은 한민준 대한화학 사장이 부사장시절 인수한 기업으로, 배터리제조 자동화설비를 만드는 2차전지사업의 핵심 기업입니다. 성운이노베이션은 앞으로 설비제조 뿐만 아니라 전고체배터리 생산을 위해….]
[한민준 대한화학 사장이 대한화학 CEO이자 부회장으로 전격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서 한민준 부회장은 대한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였으며, 차기 대한그룹의 주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취임한 한민준 부회장의 첫 번째 업무는 2차전지 수혜로 덩치가 커진 대한화학의 에너지사업본부를 분사하는 것으로…….]
……
머릿속에 갑자기 선명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아니 영상으로 찍은 것처럼 선명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건 TV로 뉴스를 보던 기억이었는데, TV화면에서 아나운서가 여러 경제 뉴스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 이건!'
이 경험은 이미 익숙했다.
바로 정우가 회식자리에서 미래 그래핀 기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던 그때의 경험과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집중해야 돼!'
정우는 미래의 기억이 상기되는 이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기억에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 재생되던 기억들이 사라졌다.
정우는 부랴부랴 떠오른 정보들을 한쪽에 메모했다.
-현재는 비상장 기업인 성운이노베이션이 코스닥에 상장한다는 것.
-시총 1조원 달성한다는 것.
-한민준 부사장이 성운이노베이션을 인수한다는 것.
-그 공로로 대한화학 CEO가 된다는 것.
주로 성운이노베이션과 관련된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다.
'… 지난번에 미래기술을 얻었던 기억과 달리 왠지 영양가가 없는데?'
미래기술이 아닌 그저 일상에서 본 뉴스 내용일 뿐이니 오죽하랴.
정우가 실망하려던 그때였다. 메모 중에 이상한 걸 발견했다.
'1조원?'
성운이노베이션이 1조원이 된다고?
그런데 지금 시총은 얼마지?
생각에 잠겼던 정우가 옆에서 그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던 탁세훈에게 물었다.
"팀장님, 혹시 성운이노베이션 지금 시총이 어느정도 되는지 아세요?"
"시총이요? 비상장 상태라 시총을 따지기 좀 애매하죠."
"음, 대략적으로라도 알 수 없나요?"
"굳이 따지자면 한 1,200억 정도? 물론 이것도 많이 쳐준 겁니다. 한 1,000억 정도면 적정선 같네요."
"1,000억원이라…."
그렇다면 지금 1,000억원짜리 회사가 5년 안에 1조원이 된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떠오른 정우의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흠, 이거 어떻게 먹을 방법이 없을까?
"… 탁 팀장님, 아까 성운이노베이션이 은행 대출 못 막아서 부도 직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근데 그건 왜요?"
"탁 팀장님이라면 물에 빠진 사람에게 가진 보퉁이 내놓으면 살려준다고 거래하자고 하면 응할 것 같으세요?"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목숨은 소중하니까 일단 응하지 않을까요?"
탁 팀장의 말에서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사면초가에 처한 성운이노베이션. 은행 대출을 못 갚으면 부도가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대한화학이 구세주로 등판한다면? 그 도움의 손길을 쉽게 거절하지 못할 터.
아마도 과거에 대한화학은 이런 식으로 성운이노베이션을 뒤흔들어 인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구세주라는 거 내가 해도 되지 않나?'
이거 잘하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가겠는데?
정우가 이 난장판에 뛰어들 여지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탁세훈이 물었다.
"대표님 혹시 대출금 대신 막아서 성운이노베이션 살려주시게요?"
"일단은요."
"흠… 근데 쉽지 않을 텐데요. 성 대표가 자기 회사에 애착심이 강한 양반이라서요. 무엇보다 구해주려면 동아줄값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닌데요?"
성운이노베이션을 대신하여 은행대출금 수백억원을 댈 수 있냐고 돌려 말하는 탁 팀장의 부정적인 반응에 정우가 씨익 웃었다.
"까짓거 단타 좀 쳐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