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제가 병신이죠 >
"민준이 왔냐."
큰형 한성준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10살도 넘게 차이 나는 큰형은 유일하게 이 집안에서 친근한 존재였다.
다만 말도 없이 그를 무심하게 응시하는 한민준과 똑 닮은 얼굴의 소유자, 대한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유력하다는 차남 한동준 사장은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았다. 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눈빛은 같은 형제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한민준은 저 냉동인간 같은 둘째 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한성준이 동생에게 안부를 물었다.
"뉴스 봤다. 별일 아닌 거지?"
"내 선에서 수습 가능해. 걱정하지 마."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도와줄게."
"내가 애도 아니고 도움은 무슨. 내 앞가림은 내가 하니까 신경 꺼."
"쌀쌀맞기는. 그래 알겠다."
한성준이 피식 웃을 때, 한동준은 다리를 꼬은 채 무심한 얼굴로 한민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재밌어서."
"내 얼굴이 웃기다는 거야 뭐야."
"글쎄."
"… 재수없는 새끼."
"민준아, 너 형 앞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쳇."
한성준이 한마디 했지만 한민준은 사과 없이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다.
그런 동생을 한동준이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그때였다.
"뭘 그리 쫑알거리고 있어."
그때 거실에 중후한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한 노인이었다.
그를 본 순간 한민준을 비롯한 대한그룹 삼형제는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껄렁거림은 온데간데 없는 격식을 갖춘 인사였다.
"… 아버지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대한그룹 삼형제를 고개 숙이게 만든 남자.
그는 바로 대한그룹을 이끄는 거인, 한광표 회장이었다.
한광표 회장.
하얗게 센 머리에 발라진 기름은 단 한 올의 삐져나옴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고집을 증명하듯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거인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그의 체구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아니 오히려 작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업계에서 거인으로 불렸다.
원래 대기업이었던 대한그룹을 진정한 대기업 중의 대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는 대한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혼자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대한민국 서열 2위의 초거대기업으로 일구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 그의 성공신화를 본 재계의 사람들은 대한그룹을 홀로 떠받친 한광표 회장을 보며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지구를 들어 올리는 아틀라스라는 거인의 모습 같다고 하여 거인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형제들을 모두 제치고 대한그룹의 주인이 된 거인.
홀로 대한그룹을 지탱한다고 평가받는 거인.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한민준은 저 거인이 무서웠다.
거인 한광표 회장은 아들들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거실로 걸어오더니 소파 상석에 털썩 앉았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부리부리한 커다란 눈으로 아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아버지의 그 침묵이 두렵다.
숨 막힐 것 같은 그 압박 속에서 눈치를 살피던 그때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난 놈들. 사내자식들이 그렇게 눈치를 봐서야."
"……."
"그래, 내가 부른 이유는 알겠지?"
"민준이 건 때문 아닙니까?"
말이 거의 없던 한동준이 입을 열었다.
한광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중소기업 하나 인수 못 해서 우리 집안 꼴이 우습게 되었어. 또 재벌가의 횡포니 뭐니 기사 나오고 있던데 이번 사태 어떻게 수습해야겠어?"
한광표 회장의 시선이 삼형제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던 한민준이 어버버 입을 열었다.
"제가 판 깐에 끼어든 놈을 찾아서 족쳐야죠. 제가 좀 알아봤는데 네뷸라 코퍼레이션이라고 완전 구멍가게 놈들입니다. 대표도 성운이노베이션 출신 개발자라는데 일개 직원 출신이니 근본도 없구요. 저희쪽 협력업체에 압력 넣으면 고사시키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고사시킨다? 참나."
한민준이 열심히 떠드는 걸 듣고 있던 한동준이 코웃음쳤다.
형의 비웃음에 한민준은 짜증이 났지만 애써 억누르며 설명을 덧붙였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놈들부터 본때를 보여줘야 우리 그룹을 우습게 안 여기지. 그래야 대한그룹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도 보이고 우리 그룹 체면이 살지 않겠어."
"쯧쯧, 그래서 네가 아직이라는 거다."
한동준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미 언론과 여론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고 있어. 그런데 대놓고 견제를 하고 복수를 하겠다고? 너는 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놈이냐?"
"아니, 바로 안 하고 시간을 좀 두고 처리하면…."
"그건 당연한 거고. 좀 생각을 하고 얘기를 해. 지금은 복수가 아니라 수습을 논의할 때인데 훼방꾼을 족치자는 얘기를 하고 있어. 네뷸라인지 구멍가게인지 촌놈한테 맞고 오더니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거냐."
"아니 진짜 듣자듣자 하니까!"
"그래 동준아, 아버지 앞인데 말조심 좀 하자."
한성준이 수습에 나섰지만 고삐가 풀린 듯 한동준은 멈추지 않았다.
"검찰쪽에서 연락이 왔어. 성재민이라 했던가. 성운 본부장이라는 그 친구가 검찰에서 이미 다 얘기했다더라. 너 걔랑 약 했다며?"
그 말에 한민준은 당황했다.
"…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약이라니? 성재민 그놈이 증거도 없이 떠드는 걸 믿는 거야?"
"공범이 자백했으니 수사 진행 가능한데 무슨 증거 타령이야."
"…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아직도 약이나 하고 다닐 것처럼 보여? 아버지, 아버지도 저 아시잖아요. 제가 아무리 막 나가도 그런 것까지 할 놈으로 보이세요?"
"더한 것도 할 놈으로 보인다."
한광표 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막내를 바라보았다.
한민준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버지!"
"쯧, 머저리 같은 놈."
슬쩍 비웃는 한동준의 말에 한민준이 눈을 부라린다.
"뭐?"
"수원지검 그 검사 꼴통이더만. 민준이 너 잘못 걸렸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놈 중앙지검에서 진성그룹 수사하다가 좌천당한 놈이야. 재벌 때문에 인생 조진 놈이라고. 니가 곱게 보이겠냐? 아마 입에 거품 물고 너 쫓아다닐 거다. 우리 막내 어쩌냐?"
비꼬는 둘째 형이 얄미웠지만 그의 말마따나 한민준은 최근에도 몇 번 약에 손을 댄 적이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아버지. 이건 제가 수습이 가능합니다! 저도 대비를 안 해둔 건 아니에요."
"대비책이 있다?"
"예. 버진 아일랜드 계좌! 그걸로 협상하면 성재민도 입을 다물 겁니다. 놈은 지가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있어요. 미국에서 범죄자 인도로 송환되면…."
한민준이 허겁지겁 즉흥적으로 떠오른 방법을 설명하려 했지만, 옆에서 듣던 한동준이 또 다시 비웃었다.
"그건 송환이 됐을 때 이야기지."
"뭐…?"
"'임의적 인도 거절 사유' 몰라? 범죄인이 다른 범죄로 대한민국 법원에서 재판 중일 경우 인도하지 못한다. 미국이 범죄자 인도요청을 해도 한국 법률로 처벌받으면 미국으로 못 넘겨."
"아…!"
한민준이 성운을 먹어 치우는 것에 성공했다면, 굳이 한국 법으로 고발하지 않고 미국에서 평생 감옥에 썩게 만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놈 새 회사 주인한테 배임으로 고소당했다며?"
그 말에 한민준은 당황했다.
기껏 비장의 무기로 꺼낸 카드가 무쓸모라는 걸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증명했을 뿐이니까.
창피함에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할 때 싸늘하게 막냇동생을 쳐다보던 한동준이 나섰다.
"아버지, 아무리 이 꼴통 자식이 멍청한 짓을 했어도 감히 우리 대한에 기어오르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검사놈 제대로 보내버리죠? 이번엔 저기 어디야, 해남 땅끝마을로 보내버리자고."
그 말에 잠자코 있던 첫째 한성준이 반발했다.
"검찰과 자꾸 얽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게다가, 인사 발령 서류에 잉크도 안 마른 검사를 어떻게 다시 지방으로 보내? 괜한 짓 하다가 나중에 정치권에 책이라도 잡히면 네가 책임질 셈이냐?"
"그럼 이 새끼 빵 보내고서 그룹 이미지에 똥칠하는 거지 뭐."
"아 진짜 씨-!"
한민준이 좌불안석으로 듣고만 있다가 버럭 성을 내보지만.
"목소리가 크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한광표 회장의 한마디에 그 망나니도 기가 푹 죽는다.
제가 잘못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으니 그도 할 말은 없었다.
"… 총장에게 전화 한 통 넣으마."
"아버지!"
첫째의 만류에도 이미 이 거인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진 한동준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고, 첫째와 막내는 낭패한 표정이었다.
자기는 안중에도 없이 수습을 논하는 아버지와 형을 보며 한민준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치부가 까발려졌다는 점과 무능력한 면모만 보인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려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은 먹고…"
"… 생각 없어. 아버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자 한광표 회장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일군 이 대한에서, 제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이유가 무엇인 줄은 알고 있겠지."
거인이 그를 노려보았다.
한민준은 오금이 저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쓸모없는 놈들은 대한에서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다."
아버지의 경고에 침을 꼴깍 삼켰다.
"…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한민준이 황망히 저택을 벗어났다.
대한그룹에서 내쫓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두려움이 일면서도 한편으론 반발심이 치밀었다.
"… 망할 노친네. 하… 근데 성재민 이 새끼가 야부리를 털어? 또 털갈이 해야겠네 썅!"
검찰 소환과 마약 검사에 대비하려면 골치 아파질 터.
마약 양성반응이 검출되지 않으려면 모든 털을 제모하고 눈썹과 머리도 염색해야 하니 서둘러야만 했다.
* * *
자포자기한 성재민은 한민준이라도 같이 데려갈 요량으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차명진 수원지검 검사에게 낱낱이 고발했다.
"협조 감사합니다. 원활한 협조 감안해서 형량은 줄여서 구형하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검사님. 한민준 그놈도 꼭… 꼭 죗값 치르게 해주십쇼."
"말씀 안 하셔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런 놈들 잡으려고 검사 된 거니까요."
악을 응징하겠다는 의지로 철철 넘치는 차명진 검사.
저 신입검사라면 한민준을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어줄지도 모른다.
'너도 한번 좆 돼봐라.'
자포자기한 성재민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사실 이제 사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회사는 팔아넘겼고, 아버지도 떠났으며, 이혼까지 당해 양육권 역시 잃게 된 마당이다.
거기에 한민준에게 5천만 달러를 받기는 했지만 이미 배임 혐의로 계좌가 동결되었으니 곧 회수당하여 개털이 될 상황까지.
설사 풀려난다고 해도 유출 영상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쫑나버린 것이다.
조사를 마치고 구치소에 수감된 성재민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죽자.'
이제 살아서 더 뭐하냐.
구치소에서 구질구질하게 삶을 연명할 바에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어서 성재민은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제 목숨 하나 좌지우지 못하는 한심한 놈.
그렇게 자괴감으로 하루하루 썩어문드러지고 있던 그때였다.
"0391 면회."
누군가 그를 찾았다.
구치소에 있는 그를 찾아올 사람은 누굴까.
의욕은 없었지만 이왕 찾아온 사람이니 궁금하여 접견실로 향했다.
거기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아버지, 성태규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기에 놀랍기도 하고 창피함, 미안함, 부끄러움과 같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접견용 수화기를 들었다.
"… 왜 오셨어요."
아버지에게 나가는 퉁명스러운 말.
사실은 보자마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 아들을 보며 성태규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밥은 먹고 다니냐.
"… 죽지 못해서 먹고 있네요. 바보같이…."
-못난 놈….
"… 욕하실 거면 실컷 하세요. 그러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욕해서 후련해질 것 같다면 하세요. 전… 그래도 싸니까요."
-내가 널 욕해서 뭘 하겠니. 다 내 잘못이지…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너무 고집을 부렸어.
성태규가 담담히 자책했다.
-네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건데… 그런데 돌아보니 네 말이 맞더구나. 가족을 위한답시고 가족을 내팽개치고 연구에만 몰두했어. 난 그게 옳은 줄 알았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 네가 날 존경해줄 줄 알았어. 하지만… 맞아. 나는 네 엄마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못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미안하다….
아버지의 사과에 성재민은 울컥했다.
"… 아버지! 아버지 잘못이라뇨! 절대 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병신이죠. 그냥 잠자코 있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커지진 않았을 텐데… 탁상머리에서 경영 좀 공부했다고 자만하면 안 됐는데… 실제는 그런 게 아닌데… 제가 옳다고 믿고 까분 게 그냥 너무 후회됩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짜 제가 모든 걸 망쳐버렸어요… 어흐흑…."
-재민아. 울지 마 이놈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이 애비가 너무 미안하다….
부자는 접견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 * *
면회를 마치고 구치소를 나오는 길.
성태규는 구치소를 뒤돌아보았다.
혼이 나간 듯 수척해져 있던 아들의 모습.
원래는 모진 소리라도 하고 크게 꾸짖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핏줄이라고 막상 아들의 얼굴을 보자 그런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진 채 걱정부터 앞섰다.
'행여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견뎌라. 죗값은 치러야지. 대신… 나오면 다시 시작해보자.'
'어떻게요? 이미 모든 게 끝났는데….'
'회사 팔았다.'
'예? 회사를 팔았다구요?'
회사를 팔았다는 말에 놀라던 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시에 죄책감 가득하던 녀석의 눈과 주르륵 흘러내리던 눈물까지도.
'아니 회사를 왜 파셨어요! 버티고 또 버티셨어야죠!'
'됐다. 이만하면 잘 운영했어. 너나 나나 성운을 지배할 그릇이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하지만…!'
'괜찮다. 무려 500억이나 받았어. 빚더미인 기업을 비싸게 팔았으니 족해. 그거면 네가 나왔을 때 재기하기에 충분한 금액일 거다. 이걸로 건물 하나 사두면 평생 배곯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견뎌. 그리고 뉘우치고 반성하고 죗값을 달게 치러.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성재민은 아버지의 말에 하염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흐느끼던 아들을 두고 성태규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험한 꼴이라고는 겪어보지 못한 아들이 감옥 생활을 잘 견뎌낼지 걱정이 들지만, 자기 죗값이라 생각하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후 아들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를 만났다. 앞으로 진행될 재판이나 형량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 죄송합니다만, 이대로 가면 아무리 줄여도 최소 5년은 살아야 할 겁니다."
"5년이요? 아들 말로는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검사가 구형을 낮춰준다고 들었는데요?"
"예. 그걸 감안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아드님 차명계좌에서 600억이 나온 거 아시죠? 배임을 저지르면서 받은 대가성 자금 같은데, 특경가법(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부당하게 취득한 액수가 50억 원 이상일 경우 무기징역 또는 최소 5년 이상의 징역형이 떨어지거든요. 수수 금액에 따라 가중 처벌이 되니 최소 5년, 아니 편취금액을 봐서는 제 생각엔 10년은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받은 뒷돈이 버진 아일랜드 쪽 돈세탁 자금이던데… 이게 해외계좌라 상당히 골치가 아픕니다."
"아…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해외 돈세탁 계좌 건은 따로 국제변호사를 알아보셔야 합니다."
변호사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포기해버린 듯한 그를 보며 성태규는 제대로 된 변호를 위해서 실력 있는 국제변호사 선임이 급선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항상 법무팀에 법률을 자문하던 성태규는 막상 대표직을 내려놓고 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옛정이 있으니 성운이노베이션 법무팀에서 외면하지는 않을 터. 직접 연락하려다가 문득 자신은 외부인이라는 생각에 절차가 아닌 것 같아서 이정우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이 대표. 저 성태규입니다."
-아 대표님. 어쩐 일로 연락주셨나요?
"그… 아들한테 국제변호사를 선임해주려고 하는데 법무팀에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요. 제가 법무팀장에게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국제변호사요? 아 그런 거라면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심앤장에 심문철 변호사님이라고 실력 있는 분 알거든요. 그분 통해서 알아보고 연결해드릴게요.
"아, 고맙습니다 이 대표.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에이 은혜라뇨. 그럼 바로 연락해보고 알려드릴게요.
정우의 도움으로 성태규는 아들을 변호해줄 국제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장덕철 변호사입니다. 아드님 배임 소송 관련해서 오신 거죠?"
"예. 아들이 최소 5년은 살 거라는데 형량을 줄일 수 없겠습니까?"
"제가 좀 알아보긴 했습니다. 근데… 이거 특가법을 떠나서 굉장히 위험할 뻔했는데요."
"예? 위험할 뻔했다니요? 구속된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있습니까?"
성태규의 의문에 장덕철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진 아일랜드에 있던 계좌에서 5,000만 달러를 출금했더라구요. 해당 자금은 성재민 씨 차명계좌로 흘러 들어갔구요. 그런데 이 계좌가 문제가 많습니다. 돈세탁 아시죠? 돈세탁하다 남은 찌꺼기들을 모아둔 결정체 같은 건데, 쉽게 말해서 이 계좌가 돈세탁 범죄의 마지막 흔적 같은 거라서 미국 IRS에서 벼르고 있던 건이라 잡혔으면 평생 옥살이감이었습니다. 제 예상엔 최소 200년짜리 덫이었어요."
"… 200년이요?"
성태규는 진심으로 놀랐다. 미국에서 형량을 세게 때린다는 건 알았지만 고작 계좌 하나 건드렸다고 법원이 200년이라는 형을 때릴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그럼 우리 재민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200년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그랬다면 제가 위험할 뻔했다고 가정으로 말씀드리지 않았겠죠. 위험하다고 현재진행형으로 말씀드렸을 겁니다."
"아 그렇다는 건…!"
"예. 아드님이 미국으로 인도되어 200년짜리 감옥살이를 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된 겁니까?"
"법에는 임의적 인도 거절 사유라는 게 있거든요. 범죄인이 다른 범죄로 대한민국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일 경우에는 임의적 인도 거절 사유에 해당되어서 인도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예. 배임으로 고소한 게 전화위복이 되었네요. 한국에서 체포된 게 천만다행입니다. 그리고 5천만 달러 수수 혐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사는 부정 이익 수수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데, 성재민 씨는 돈을 한푼도 쓰지 않았더라구요. 그저 돈세탁에 이용당했다는 쪽으로 주장하면 특가법으로 때려 맞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배임 혐의는 벗기 어렵겠지만요."
그 말에 성태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정우가 배임으로 고소한다고 했을 때 살짝 갈등했었다. 그래도 아들인데 옥살이는 너무하지 않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때 괜히 배임으로 처벌받지 않게 하려고 눈감아주거나 했으면 오히려 더 큰일날 뻔했던 것.
"… 이런 식으로 또 은혜를 입었네요."
"예?"
"아닙니다. 이정우 대표에게 한 말이었어요."
"아, 이정우 고객님이요? 젊으신데 벌써 엄청 성공하시고 대단하신 분이죠. 제 동료인 심문철 변호사가 칭찬 많이 하더라구요."
정우를 칭찬하는 장덕철 변호사 앞에서 성태규는 고민했다.
정우에게 입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회사도 넘긴 상태라 딱히 도울 길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연구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좀 쉬시다가 괜찮아지시면 나중에 와서 일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정우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이라…."
성태규의 눈엔 어떤 결심이 서린 듯 보였다.